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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수의 시인 정지용의 서울살이
    작가의 고향 2022. 10. 8. 23:58

     

    정지용은 전에는 우리가 몰랐던 시인이다. 여기서의 전(前)은 1988년 7월 19일로, 이날 월북 문인 해금조치가 발표되었다. 앞서 말한 이태준, 백석, 박태원, 임화 등은 모두 이때 해금되어 작품이 다시 세상에 나왔다. 정지용의 시도 이때 빛을 보게 되었고, 대표작 '향수'는 지금은 당당히(?) 교과서에 수록됐다. 재차 말하거니와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지용 (鄭芝溶, 1902 ~1950)
    1935년 발간된 첫 시집

     

    하지만  해금이 되었다고 해서 정지용이 단박에 알려졌던 것은 아니다. 이후로도 그는 여전히 대중에게는 낯선 이름이었다가 1989년 갑자기 우리 곁으로 왔다. 그의 시 '향수'에 작곡가 김희갑이 곡을 붙인 대중가요를 당시 서울대 교수이자 성악가였던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함께 부르며 일약 유명해진 것이다. 노랫말, 작곡, 실력 있는 음악가의 화음이 훌륭하게 어우러진 이 아름다운 노래는 향후 130만 장이 팔렸다. 그 음반들은 대한민국 음악사의 명반(名盤)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런데 박인수는 유명세를 치러야 했다. 고상해야 할 성악가가 대중가요를 불렀다는 죄로 클래식계의 비난을 받았으며 국립 오페라단에서 축출되었다. 하지만 괘념치 않았던 것 같다. (물론 화는 났겠지만) 그는 올해 85세로서 얼마 전 '마이웨이'라는 프로를 보니 여전히 여유롭고 호기로웠다.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 불렸던 이동원은 그보다 한참 젊었음에도 작년 말 식도암으로 세상을 떴다. 음유시인답게 그는 말년에 지리산에 살고 싶어 했고 지리산이 보이는 남원에서 요양을 하다 유명을 달리했다.

     

    대중가요 '향수'는 싯구에 반한 이동원이 유명 작곡가 김희갑을 찾아 곡을 붙여달라고 1년간을 조른 끝에 세상에 나왔다고 하는데, 그는 그 곡을 가지고 유명 성악가인 박인수를 찾아가 함께 부르기를 청했다. 시와 곡을 보고 들은 박인수는 흔쾌히 허락하였던 바, 세기의 크로스오버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 첫 소절은 다음과 같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얼룩백이 황소는 어떤 소일까? 동요에서 나오는 그 엄마 닮은 얼룩소일까? 아마 맞을 것이다. 흔히 젖소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칡소'로 불려지던 우리나라 고유종 황소이다. 몸통의 얼룩빼기 무늬가 호랑이털을 닮았다고 해서 호반우(虎斑牛)라고도 불렸던. 옛이야기 재잘대는 듯 흐르는 실개천이 동네를 감아 흐르고, 해질 무렵의 햇빛이 금빛으로 외양간을 물들일 때 그 석양빛에 칡소가 하품처럼 울음을 뱉어내는 곳..... 그곳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이었다.

     

     

    고유종 '얼룩백이 황소'
    복원된 옥천읍 정지용 생가
    두 사람이 노래하던 시절

    향수 노래 듣기  

     

    나는 다음 소절을 좋아한다. 나의 누이와 아내도 그렇게 살았기에.....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는 일본 유학 시절의 정지용이 문득 고향이 그리워 지은 시라고 한다. 그는 윤동주 시인이 다닌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에는 모교인 휘문고보에서 영어선생으로 교편을 잡았고 광복 후에는 이화여전 교수와 문과과장으로 재직했다. 정지용은 백석과 함께 한국의 시문학을 이끈 두 천재로 평가받을 정도로 한국 초기 시단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져, '시는 정지용, 문장은 이태준'으로 불릴 만큼의 성가를 얻었다.  

     

    즈음한 그의 동선을 뒤쫓자면, 1929년 아래 사진의 시인들과 함께 〈시문학〉을 창간하여 동인으로 활동했고, 1933년 이상(李箱)의 난해한 시를 세상에 소개했으며, 1939년에는 <문장>지의 추천위원으로 박목월 · 조지훈 · 박두진 청록파 3인을 등단시켰다. 더불어 구인회(九人會, 김기림 · 이효석 · 이종명 · 김유영 · 유치진 · 조용만 · 이태준 · 이무영· 정지용)의 일원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시문학> 창간호에 실린 창립동인 기념 사진 /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하윤 박용철 정지용 변영로 정인보 김영랑이다.

     

    한국 전쟁이 났을 때 그는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가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함께 북한군에 피체되었다. 이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할 때 다른 납북자들과 함께 끌려다가 9월 25일 미군기의 동두천 폭격 때 폭사하였다. (2003년 문학평론가 박태상의 증언 / 한편으로는 그가 이광수 등과 함께 평양감옥에 갇혔다가 이후 폭사하였다는 말도 있으나, 이광수가 김일성의 각별한 보호 이래 강계 야전병원에서 죽은 것을 미루어보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정지용은 1918년 5년제 휘문고보에 입학하며 상경해 이후 줄곧 서울에 살았다. 그는 마포, 아현동, 경기도 녹번리 등지에서 생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중 서대문구 북아현동과 은평구 녹번동에서의 거주지가 확인되었다. 북아현동에서 그가 살던 집은 확인이 안 되었으나 추정되는 집 터가 남아 있으며,(지번이 교란되어 명확치는 않다) 주변에는 '지용마을마당'이라는 소공원이 꾸며졌다 

     

     

    북아현동 1-64 일대의 정지용의 집 터로 추정되는 곳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126-10번지에는 정지용이 1948년부터 1950년 납북되기 전까지 살던 집이 있었다. 정지용은 녹번동으로 이사하기 전인 1947년에 경향신문사를 그만두었고, 1948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에서도 물러나 이곳 녹번리로 와서 ㄱ자 형태의 6칸 초가를 짓고 살았다. 지금 그곳에는 다세대주택이 들어서 옛 모습은 전혀 찾을 길 없으나 당시 쓴 '녹번리'라는 시에서는 풍경이 물씬하다. 어느 날 술 취한 정지용은 집까지의 신작로를 이렇듯 힘겹게 걸었다. 

     

     

    녹번동 126-10번지 가는 길
    녹번동 126-10번지 집 문 옆에는 '녹번리' 시가 쓰여진 안내문이 걸려 있다.

     

     

    녹번리 / 정지용

     

    여보
    운전수 양반
    여기다 내버리고 가면
    어떡하오


    녹번리까지만
    날 데려다주오


    동지섣달
    꽃 본 듯이 ......아니라
    녹번리까지만
    날 좀 데려다주소

    취했달 것 없이 

    다리가 휘청거리누나

     

    모자 아니 쓴 아이

    열여덟 쯤 났을까? 

    "녹번리까지 가십니까?"

    "너도 서울감화원께까지 가니?"

    "아니요."

     

    캄캄 야밤중 

    너도 돌변한다면

    열여덟 살도 

    내 마흔아홉이 벅차겠구나

     

    헐려 뚫린 고개

    상여집처럼 하늘도 더 껌어

    쪼비잇하다

     

    누구시기에 이 속에 불을 켜고 사십니까?

    불 들여다 본 사람은 

    난데

    영감님 눈이 부시십니까?

     

    탄탄대로 신작로 내기는

    날 다니라는 길이겠는데

    걷다 생각하니 

    논두렁이 휘감누나

     

    소년감화원께까지 내가 찾아가야겠는데

    인생 한번 가고 못 오면 

    만수장림(萬樹長林)에 운무(雲霧)로다

     

       1951. 1.  새한민보 61호

     

     

    주변에 이와 같은 박물관도 있지만
    이것이 녹번동에서 정지용을 기억할 수 있는 전부

     

    정지용의 또 다른 대표작 '고향'을 덧붙인다. 이 시 역시 노래로 만들어져 귀에 익을 법하지만 그동안은 박화목 작시 '망향', 혹은 이은상 작시 '그리워'로 알려진 채 불려졌다. 작곡가 채동선에 의해 진작에 가곡으로 만들어졌으나(1935년) 앞서 말한 월북작가로 분류됐던 까닭에 다른 문인에 의해 조금씩 개사된 가사가 다른 제목으로서 불려졌던 것이다. 오리지널은 이렇다. 

     

     

    고향 /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  노래듣기 / 조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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