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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부식의 '낙산사'
    작가의 고향 2022. 10. 4. 02:33

     

    사서(史書)를 볼 때면 가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부족하나마 삼국의 역사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은 오롯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덕이다. 알려진 대로 김부식은 고려 중기 최고의 유학자요 정치가이다. 그는 41살 되던 1116년(예종 11) 7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의 지식에 매료된 송나라 황제 휘종으로부터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질을 선물로 받았다.

     

    <삼국사기>
    김부식(1075~1151)의 표준영정

     

    <자치통감(資治通鑑)>기원전 403년부터 기원후 959년(주 위열왕 23년~후주 공제 원년)까지 1362년의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기술한 294권의 역사서로, 사마광은 이 책의 편찬에 장장 20년의 세월을 쏟았다. (그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여러 학자들을 모아 편찬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펴낸 것은 필시 그것에 자극받았을 터이다. (그 역시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여러 학자들을 모아 편찬했다. 최산보·이온문·허홍재·서안정·박동계·이황중·최우보·김영온·김충효·정습명 등이 참여했다)  

     

    여기서 <삼국사기>에 대해 논할 생각은 없으나 김부식의 사관(史觀)이 사대주의에 몰입되었다는 세간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삼국의 역사 중에서 신라에 치중했다는 생각은 같은데, 신라의 역사가 장장 천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 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경주김씨였던 바, 증조부 김위영(金魏英)은 고려 왕건에게 귀의해 경주지역의 지방관을 지냈다.

     

    김부식의 집안은 아버지 김근(金覲) 때에 이르러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으로 보이니 즈음하여 개경으로 이사를 했을 것이나 김근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하지만 그의 아들 4명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 관료가 되었고, 또한 문장에 뛰어났으니 셋째와 넷째의 이름을 부식과 부철(富轍)로 지은 보람이 있었다. 부자(父子) 3인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였던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동파) 소철(蘇轍)의 전철을 밟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송나라 사신으로 와 고려에 대해 기록했던 서긍(徐兢)은 그 책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김부식을 이렇게 평하였다.
     
    "박람강식(博覽强: 박식하고 총명함)해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의 신복을 받으니, 그보다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고려도경> 권8 인물조)

      
    하지만 그가 평생 붓을 잡지만은 않았으니 묘청(妙淸)의 난에 임해서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진압 사령관으로서 칼을 잡았다. 그리하여 1135년 서경파 정지상(鄭知常) 김안 백수한 등의 목을 벴으며, 서경(평양)으로 진격하여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 묘청 일파를 소탕하였다. 김부식은 개경파의 거두였던지라 서경파의 득세를 막기 위한 생존전쟁을 벌인 것이데, <백운소설>의 저자 이규보는 흥미롭게도 이 싸움을 김부식과 정지상의 천하제일필(天下第一筆) 다툼으로 해석하였다. 

     

    정치적 성향이 달랐을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문사(文士)임을 다투던 두 사람이 결국 사생결단을 벌었다는 것인데, 정지상은 교과서에 '송인(送人)'이란 시가 실렸던 까닭에 시인으로서는 오히려 김부식보다 친근하다.

     

     

    送人(송인) ㅡ 님을 보내며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 초색다)하니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 동비가)하고
    大洞江水何時盡(대동강수 하시진)이니
    別淚年年添綠派(별루년년 첨록파)라

    비 그친 강둑에 풀빛 한결 짙푸른데
    남포로 님을 보내려니 슬픈 노래 절로이네
    대동강 물이 언제 다 마를 것인가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푸른 물에 보태지는 것을

     

     

    이규보는 <백운소설>에, 김부식이 화장실에서 일을 보다 혼귀가 되어 나타난 정지상에 불알을 잡혀 (고환이 터져) 죽었다는 야담(夜談)을 옮겼는데, 그에 앞서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적었다. 두 사람의 시문에 대한 치열한 경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이다.

     

    정지상을 죽이고 개경으로 돌아온 김부식은 어느 봄날 마당의 풍경을 보며 아래와 같이 읊었다. 
      
    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

    버들 빛은 천 가닥 실처럼 푸르고 복숭아꽃은 일만 송이가 붉도다

     

    바로 그 순간 죽은 정지상이 혼귀가 되어 나타났다. 그리고는 김부식에게 이렇게 꾸짖었다. "뭔 시가 이렇게 유치하냐? 누가 일일이 버들가지가 천 가지이고 복숭아꽃이 만 송이인지 세어 보았더냐?"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고 훈계했다. (딱 한 자씩만 고쳤다)

    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

    버들 빛은 가지가지가 푸르고 복숭아꽃은 송이송이 붉도다

     

    아무튼 김부식은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혼백은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육신은 후히 장사지내졌으나, 이후 19년 후 묘가 파헤쳐서 부관참시당했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우고 매질한 사건으로 무신정변이 일어나며 그 화가 아비 김부식에까지 미친 것이다. 그의 무덤은 지금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일제시대 인종의 능에서 나왔다는 참외모양 청자병
    개성의 제릉 / 태조 이성계의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


    김부식의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문집은 20여 권이 되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문장과 시가 <동문수(東文粹)>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전하는데, 그중에서
     '洛山寺'(낙산사)라는 시를 골라 보았다. 낙산사는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근방의 굴에서 예불하던 중 관음보살을 친견한 곳으로 유명하다. <삼국유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昔 義湘法師始自唐来還 聞大悲真身住此海邊崛内 故因名洛山 盖西域寳陁洛伽山


    옛날에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이 이 해변의 굴 속에 계신다고 하기에 (그를 만나 절을 짓고) 이름을 낙산이라 하였다. 이는 서역에 보타가락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지어진 낙산사가 고려시대에도 유명하였던지 김부식이 이곳을 찾아 아래와 같은 명시를 읊은 것인데, 그 풍경은 지금도 전혀 다름이 없다.

     

    一自登臨海岸高(일자등임 해안고)하니  
    回頭無復舊塵勞(회두무부 구진로)하고 
    欲知大聖圓通理(욕지대성 원통리)하니  
    聽取山根激怒濤(청취산근 격노도)라

     

    결국 한번 스스로 올라 바닷가 절벽 높은 곳 바라보니

    한번 고갯짓에 지난날의 갈등·먼지·고생 따위 사라지고

    원통보전에 들어 큰 성인의 진리를 알고자 하니

    절벽 아래 부딪히는 성난 파도소리 들려올 뿐

     

     

    파도 치는 낙산사 홍련암
    의상대 풍경과 일출

     

    낙산사는 명성과는 달리 유명 문화재는 별로 없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병란마다 화마를 겪으며 절이 불탔기 때문인데, 2005년에 다시 큰 산불이 나 홍련암을 제외한 절 전체가 불탔으며 보물 479호 낙산사 동종이 소실되었다. (그 동종의 잔해가 경내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절을 불태운 맹렬한 불길은 숲을 타고 바닷가까지 왔다가 문득 불어온 바닷바람에 꺾이며 홍련암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 아슬아슬,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하다.

     

    2005년의 양양산불은 온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킨 대화재였다. 그래서 불길이 낙산사에 접근했을 때는 모두가 마음을 졸였고 화마가 덮쳤을 때는 모두가 가슴 아파했다. 그때 다행히 원통보전 안에 모셔졌던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1352호)화를 면했다. 대화재 때 스님들이 미리 대피시킨 덕분이었다. 이후 완전 복원된 낙산사를 찾아 반가운 마음으로 그 불상을 찍었는데,(아래 사진) 그때 갑자기 한 스님이 찍지 말라며 벌컥 화를 내었다. 밑도 끝도 없이 소리를 지르던 그 얼척없던 여승은 여전한지 궁금하다. 그가 왜 화를 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미증유의 화마로 동종이 불타고 있다. / 강원도민일보 사진
    홍련암 앞에서 거짓말처럼 멈춘 불길
    용해된 동종 / 사진 속 왼쪽 사진이 원래의 조선 초 동종으로 화재로 인해 보물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위에서 말한 건칠관음보살좌상 / 원통보전 문 밖에서 찍어 사진이 흐리다.
    공공누리 사진 /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으로 세조 때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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