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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흡의 '갈역잡영'(葛驛雜詠)과 내설악
    작가의 고향 2022. 9. 8. 23:57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은 우리가 아예 모를 뻔한 시인이었으나 그의 산문 '낙치설'( 落齒說)연작시 '갈역잡영'(葛驛雜詠) 중의 하나가 교과서에 실리며 알려지게 되었다. ('갈역잡영'은 392수의 연작시이다) 김창흡은 그렇듯 존재감이 미미하나 그의 집안은 자못 빵빵하니 대강만 훑어봐도 놀랄만하다. 일단 <위키백과>에 소개된 김창흡의 대강을 들여다보자. 

     

    김창흡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학자이며 시인이다. 본관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 서울 출신으로 좌의정 김상헌의 증손이며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 아들이다. 또한 영의정 김창집, 예조판서 지돈녕부사 김창협의 동생이며,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달순의 고조부이다. 조선후기 노론을 대표하는 가문으로서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이기설에서는 이황(李滉)의 주리설과 이이(李珥)의 주기설을 절충한 형 김창협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위키백과>)

     

     

    삼연 김창흡(金昌翕, 1653 ~ 1722)

     

    위에 소개된 인물들은 탭하면 모두 긴 설명이 따라붙는 유명 인사들이다. 반면 김창흡은 이렇다 할 족적이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고 학문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에도 도통 과거(科擧)에 임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다 부모의 강한 압박에 초시에 응시하여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의 시험, 즉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이쯤 했으면 자식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는 했다고 여겼음이다.

     

    대신 노장사상에 심취하였다. 그는 젊은 날 <장자(莊子)>를 읽다가 '돈각'(頓覺, 문득 깨달음)했다. 이후 출세의 욕심을 버리고 천지를 부박했으니 그의 호 삼연은 철원 삼부연 폭포의 절경에 반해 작호(作號)한 것이고, 앞서 말한 '갈역잡영'이란 시는 강원도 인제군 내설악에 위치한 갈역촌 등지에서 읊은 시이다. 그는 금강산과 설악산에 오래 머물렀으니, 나이 53세 때인 1706년 10월, 문득 죽은 아내가 생각나 썼다는 아래의 글을 보면 그의 부초 같은 삶의 흔적이 보인다. (아내는 백사 이항복의 손녀다)

     

     

    삼부연폭포

     

    아, 나의 반생은 바람에 나부끼는 쑥대 같았으니, 한 곳에 머무르는 일도 수월치 않았소. 금강산을 미친놈처럼 돌아다니다 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신은 차분히 나를 기다려주었지.... 경신년(1680년)과 계해년(1683년) 막내아우와 누이동생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상심한 나머지 속병이 생기자 나도 어쩔 수 없이 산문(山門)을 떠나 어머니 곁에 머물다 한강 저자도에 집을 마련했다.

     

    김창흡은 스스로의 말대로 반생은 바람에 나부끼는 쑥대 같았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남편이 중이 됐다는 소문에도 차분히 기다릴 정도로 양처(良妻)인 듯했다. 하지만 경신년과 계해년에 형제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도 상심 끝에 병을 얻게 되자 드디어 산을 나오는데, 문집인 <삼연집(三淵集)> 어록(語錄)에 따르면 그가 하산을 한 까닭은 그보다는 같이 살던 스님이 호환(虎患)을 당한 것이 실제 이유인 듯하다.

     

    제자 조명리(趙明履)의 글에 의하면, 삼연(김창흡)이 거처를 마련한 영시암(永矢庵)은 너무나 외지고 고립된 장소여서 삼연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험벽한 곳이었다. 그러나 창흡은 봉정암 아래의 깊숙한 이 골짜기를 과거 매월당 김시습이 은거하던 터라 하여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은둔생활의 근거지로 삼는다. 그러다 62세 때인 1714년 2월 다음과 같은 창망한 일을 겪게 된다.

     

    선생이 설악산 영시암에 계실 때  여신화상(汝信和尙) 최춘금(崔春金)이 판자방에서 염불을 하고 있었다. 야밤에 홀연 산이 무너질 듯 범이 우는 소리가 나더니 선생을 모시던 노비가 놀라 소리치기를 "거사가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모두 황망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노비 두 사람이 판자방에서부터 밖으로 나가면서 횃불을 들어 살펴보니 옅게 깔린 눈 위에 혈흔이 남아 있었다.

     

    선생이 멍하게 한참을 있다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이 범놈에게 말을 잃고 또 노복을 잃었는데 지금 다시 이런 변고를 당하는구나"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 승려들을 불러 모아 산에 올라 찾게 하였는데 승려들이 돌아와 단지 머리와 발만 남았다고 알리므로 다비하도록 하였다. 선생이 비로소 대성통곡하고 마침내 산을 나가기로 하였다. <삼연집> 

     

     

    설악산 영시암(永矢庵) / 이미 쏜 화살처럼 영원히 속세를 떠나겠다는 의미로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창흡이 지을 때는 당연히 작은 암자였을 것임에도 지금은 휘황한 절집이 되어 차라리 보기 흉하다. 여기서는 그래도 예전 고졸(古拙)할 때의 사진을 올렸다.

     

    창흡이 살던 한강변 저자도(楮子島)로 가기 전, 시인이 내설악 갈역촌에서 읊었던 시 몇 개를 보고 가자. (갈역촌은 현재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 계곡 지역에 해당된다) 

     

     

    우부(又賦)

     

    갈역에서 머물며 아무런 흥취 없어

    시름겨운 얼굴로 설악산을 마주하네

    백성들은 역병을 앓느라 고달프고

    소는 밭 갈기를 마치니 한가롭네

    보리가 누워있는 둥글둥글한 들판

    소나무가 서 있는 얕은 물굽이

    오히려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생각에

    저녁도 되기 전 문을 닫네

     

    葛驛留無興

    愁顔對雪山

    民因經疫憊

    牛自輟耕閒

    麥偃團團野

    松扶淺淺灣

    猶存畏虎意

    未夕掩荊關

     

     

    백담사의 가을
    백담사 계곡

     

    복차백부기시운 두 번째 시 (<伏次伯父寄示韻> 其二)

     

    고금의 은둔의 뜻은 많은 궤범(軌範)이 있지만

    먼지투성이 속세에서는 길을 얻기 어렵네

    백곡연 한계산은 매월당 김시습이 살던 곳

    부디 더러운 때가 내 몸을 오염시키지 않기를

     

    古今隱義雖多軌

    塵裡終難得出塵

    嶽白溪寒梅月所

    庶無葷垢汚余身

     

     

    한계령의 겨울

     

    갈역잡영  3집 중의 다섯 번째 시 (<葛驛雜詠之三> 其五)

     

    마을마다 적막하게 초가집 문 닫았으니

    전염병에 누가 일어나 호미질하러 가랴

    보리가 나기 전에는 산나물을 먹으니

    늙은 이 몸이 어찌 음식 초라한 것 탄식하랴

     

    村村閴寂掩蓬廬

    病起誰能去把鋤

    麥未登塲猶菜色

    老夫寧嘆食無魚

     

     

    갈역잡영  3집 중의 41번째 시 (<葛驛雜詠之三> 其四十一)

     

    산나물 뜯는 아이 호미질도 못하니

    사방 마을이 같은 병을 앓는데 어찌하오

    먹을 것 아무것도 없어 신흥사로 쌀 얻으러 가니

    석가여래는 나를 비웃지 마시오

     

    菜色山僮莫把鋤

    四隣同病欲何如

    蕭條乞米神興去

    舍衛如來莫哂余

    신흥사의 봄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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