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김대건 신부가 그린 조선지도 Carte de la Corée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2. 17. 19:34

     

    최근 개봉한 영화 '탄생'이 조용한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해서 주목해보았다. '탄생'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현재 누적관객 30만을 바라보고 있다는데 종교영화로서는 의미 있는 흥행 성적이라는 평가다. 하지만 한국의 천주교 신자수가 593만여 명이라는 통계에 따르면(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발간한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21')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니다. 특히 천주교회의 단체관람이 많았던 듯 보이는 관람후기를 보면 30만이라는 숫자는 오히려 아쉽다. 

     

    물론 천주교인이라고 그 영화를 보아야 할 의무는 없으며, 또 영화가 종영된 것도 아니니 관객수는 훨씬 더 불어날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궁금히 여기는 것은  흥행 성적이 아니라 영화의 사실성이 어디까지 미쳤을까 하는 점이다. 내가 김대건 신부에 대해 아는 바로는 그가 천주교 사제로서 소명을 수행한 시간은 13개월에 불과하였으며, 포교 과정이나 순교에 이르기까지 이렇다 할 드라마틱한 요소도 없었다.* 그는 단지 국법이 금한 서양종교의 포교행위를 했기에 붙잡힌 것이며 배교를 거부한 종교적 충성심을 보였기에 사형에 처해진 것이었다.

     

    * 관람평 중에는 '서사가 얕고 지루했다', '중간에 자리 이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후기가 올라온 것을 보면 없는 스토리를 짜내려는 노고가 효력이 못 미친 듯하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비단 김대건 신부 한 사람만은 아니니, 그가 순교한 병오박해(1846년, 헌종 12) 이전의 기해박해(1839~1940) 때는 70여 명이 순교했으며, 그에 앞선 신유박해, 을해박해 때 죽은 천주교인도 부지기수이다. 천주교 최대박해인 병인박해(1866~1872년) 때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포함한 8천 명 이상의 천주교인이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김대건 신부의 죽음이 유독 주목받는 것은 아마도 그가 조선 최초의 가톨릭 신부라는 점 때문이리라. 

     

     

    양화진 절두산 성당 김대건(1821~1846) 동상

     .

    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당진)의 평민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후 그의 가족이 천주교도 탄압을 피해 이주함으로써 용인에서 성장하였고,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피에르 모방(Pierre P. Maubant)이 용인 은이공소에 왔을 때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성직자 양성 방침에 따라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최방제와 함께 사제 후보로 선발되었다. 그의 나이 25살 때였다. 이후 그들은 모방에게 라틴어와 함께 성직자로서의 기본소양을 배운 후 마카오로 보내졌다.

     

     

    용인 '청년 김대건 길'에 있는 천주교 은이성지 / 용인시청 제공사진
    은이성지 김가항 성당 / 청년 김대건이 세례를 받은 곳으로 중국 상해에 있던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김대건은 만주·내몽골·중국을 거쳐 8개월 만인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가 마카오에 보내진 것은 당시 그곳이 포르투갈에 영구 임대되어 신앙의 자유와 가르침이 허용된 지역이었기 때문으로, 그는 마카오 소재 프랑스 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東洋經理部)에서 사제 교육을 받았다. 이후 본격적인 조선 포교를 위해  마카오를 나선 그는 중국 상해 소재 김가향 성당에서 정식으로 서품 세례를 받고  페레올, 다블뤼 신부와 함께 상해를 떠나 1845년 충청남도 강경에 잠입했다.

     

    그는 그 후 강경을 중심으로 충청남도·전라북도 일대를 오가며 비밀리에 신도들을 접촉하고 천주교 포교에 나섰으며, 이듬해에는 황해도로 진출하였다. 그가 황해도에 간 이유는 조선교구 교구장 페레올 신부로부터 중국 주재 선교사가 들어오는 비밀 항로를 개척하라는 명을 받아서였다. 황해도가 중국 산동반도에서부터 최단거리인 까닭이었다. 이에 김대건은 중국 어선들이 조기잡이를 위해 황해도 해안에 온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백령도를 루트로 하는 입국로를 개척해 이에 관한 지도를  편지와 함께 파리 외방전교회에게 보내려 하였다.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탑 / 상해를 떠나 사제로서 처음 이 땅에 상륙했던 것을 기념해 당진으로 부터 멀지 않은 익산 나바위에 순교 기념탑과 성당이 세워졌다.
    익산 나바위 성당 / 김대건 신부의 강경 상륙을 기념하기 위해 1906년 프링스 베르모렐 신부의 설계 감독 하에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해 지어졌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그 직전, 행동을 수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에 의해 1846년 6월 체포되어 해주 황해감영에 투옥되었다. (황해도 연안에서 청나라 배에 서신 등을 전해주고 돌아오다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이때 신문 관원으로부터 "당신은 천주교도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고 김대건은 순순히 인정하였던 바,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겪게 된다.

     

    그런데 그와 별개로 신문 관원이 주목한 것은 김대건이 그린 지도였다. 아울러 그는 글씨를 쓸 수 있는 깃털펜을 즉석에서 만들어 가늘고 꼬부랑거리는 서양 글씨를 써 보임으로써 관원들을 놀라게 하였다. 관원의 부탁에 의해 영길리(영국)에서 출판된 세계전도를 옥중에서 번역했다는 기록도 있다.

     

     

    체포되는 김대건
    좌포도대장 '이응식'은 김대건의 능력이 국익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여겨 국왕 헌종 앞에서 자신의 소신을 밝힌다. / '탄생'의 스틸샷

     

    이 소식은 황해감영을 통해 조정에도 알려졌고, 조정은 그의 선진 지식과 능력, 그리고 그가 지닌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영화 '탄생'의 주된 모티브이기도 한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난 일로, 조정에서는 지도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며 서양 여러 나라의 문자와 말을 아는 그를 국익을 위해 활용하려는 생각을 가진 바 있었다.

     

    이에 조정 대신들은 그에게  "배교를 한다면 벼슬도 내리고 후한 보상을 하겠다"면서 설득하지만 김대건은 이를 강력히 거부함으로써 순교자가 된 것이다. 김대건이 체포되어 처형당하기까지 소요된 3개월이라는 기간은 그에게 긴 회유의 시간이 주어졌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결국은 그를 설득하지 못했으니 <현종실록>은 그 마지막 상황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김대건은 같은 해 9월 16일 한강 용산 백사장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쓴) 불랑국(佛朗國, 프랑스)의 글을 보았는가?"

     

    하자, 영의정 권돈인이 말하기를

    "과연 보았는데, 그 서사(書辭)에는 자못 공동(恐動)하는 뜻이 있었습니다.(공포스럽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또한 외양(外洋, 바깥 바다)에 출몰하며 그 사술(邪術)을 빌어 인심을 선동하며 어지럽히는데, 이것은 이른바 영길리(英咭唎, 영국)와 함께 모두 서양의 무리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대건의 일은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하자, 권돈인이 말하기를,

    "김대건의 일은 한 시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교(邪敎)에 의탁하여 인심을 속여 현혹하였으니, 그 한 짓을 밝혀 보면 오로지 의혹하여 현혹시키고 선동하여 어지럽히려는 계책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술뿐만 아니라 그는 본래 조선인으로서 본국을 배반하여 다른 나라 지경을 범하였고, 스스로 사학(邪學)을 칭하였으며, 그가 말한 것은 마치 공동(恐動)하는 것이 있는 듯하니,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뼈가 오싹하고 쓸개가 흔들립니다. 이를 안법(按法)하여 주벌(誅罰)하지 않으면 구실을 찾는 단서가 되기에 알맞고, 또 약함을 보이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처분함이 마땅하다.

     

     

    지도가 배경이 된 탄생의 포스터
    세계지도 속의 작은 나라 조선을 지목하는 김대건
    '탄생'은 현종을 배경으로 한 포스터도 있지만 당시의 국왕이 지도 제작에 관심을 둔 흔적은 없다.
    결국 형장으로 / 이상 '탄생'의 스틸샷

     

    그런데 지난 2019년 김대건 신부가 파리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위해 제작했다는 조선전도 「Carte de la Corée」가 발견되어 주목 받은 적이 있다. 이 지도는 1861년 제작된 대동여지도에 16년이나 앞선 1845년에 제작된 조선전도로서, 지명을 한국식 발음의 로마자로 표기해 소개한 최초의 지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Carte de la Corée」는 1855년 프랑스 지리학회보에 수록돼 6개 국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지도에서 서울은 지금과 같은 'Seoul'로 표기되었으며, 국외선교사들의 선교 편의를 위해 제작된 지도답게 관부의 위치, 만주 봉황성에서 의주 변문까지 이어지는 입국로, 한강 하류에서 서해안으로 이어지는 해로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특히 만주지역 및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했다는 점이었다. 이는 당시 만주 동간도와 서간도 지역이 조선의 영토였거나 실질적으로 지배했음을 나타내는데, 이는 이후에 만들어진 프랑스·독일 선교사들의 지도에도 마찬가지로  동간도와 서간도가 우리의 영토로 그려져 있으며, 나아가 북간도까지가 모두 조선의 영토에 포함된 지도도 존재한다. ('세종대왕의 특명-백두산 북쪽의 공험진 비를 찾아라')

     

    김대건은 그중에서도 울릉도와 그 동쪽의 독도를 정확히 그려넣고 로마자로 ‘Ousan’이라고 표기함으로써 뚜렷한 영토관을 나타냈다. (마치 후일 영토분쟁이 일어나리라는 예견이라도 했던 듯) 김대건 신부가 보낸 스무 번째 서한에는 마카오에 있는 스승 리부아 신부에게 두 장의 조선지도를 보냈다는 내용이 담겨졌다 하는데,  원본으로 추정되는 조선전도는 1855년 프랑스 왕립도서관에 기증돼 현재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앞서 말했듯 김대건이 그린 이 지도는 세계 여러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활용되기도 하였으니, 일례로 19세기 중엽 미국 해군 장교 펠란(J.R. Phelan)이 제작한 「조선전도(Carte de la Corée)」는 김대건의 지도를 그대로 옮겨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하고 인근 바다도 '동해'(MARE ORIENTALE)라고 정확히 표기했다. 지도는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미국 해군이 조선 해안의 탐문을 목적으로 2차례 파견한 셰넌도어호가 한반도 수로정보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이라 한다. 

     

     

    김대건이 그린 조선전도 속의 울릉도와 독도
    펠란 제작 지도 속의 울릉도와 독도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