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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왕의 특명-백두산 북쪽의 공험진 비를 찾아라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1. 20. 02:10
     

    원(元) · 명(明) 교체기, 중원을 평정한 명태조 주원장은 고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철령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니 요동에 귀속시키겠다. 그 나머지 개원·선양·신주 등지의 군(軍)과 민(民)은 원래의 생업에 복귀시키도록 하라." (鐵嶺迆北 元屬元朝 並令歸之遼東 其餘開元瀋陽信州等處軍民 聽從復業)

     

    옛 원나라가 다스리던 쌍성총관부의 땅에 철령위를 설치해 명나라 땅으로 삼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 땅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 즉 1258년(고종 45) 몽골의 침입 때 배신자 조휘(趙暉)와 탁청(卓淸)이 병마사 신집평을 죽인 후 철령 이북의 땅을 몽골에 들어 바치며 항복했고, 이에 몽골(원)이 그 땅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100년간을 다스렸다.

     

    이것을 1356년 공민왕이 되찾았다. 그 무렵 공민왕은 대대적인 반원운동(反元運動)을 전개하여 유인우(柳仁雨) 공천보(貢天甫) 김원봉(金元鳳)으로 하여금 그 지역을 수복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쌍성총관부는 폐지되고 철령 이북의 땅은 다시 고려의 영토로 환원되었으나, 요동을 탐낸 주원장은 그곳이 본래 원나라가 다스리던 땅이라 하여 명나라의 영토로 귀속시키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이에 고려 우왕은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보내 표문으로 그곳이 자국의 영토임을 밝혔다.

     

    "철령 이북을 살펴보자면, 역대로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기까지가 본래 본국(고려)의 땅이었습니다. 철령의 땅은 실상 대대로 고려에서 지켜 왔으니 과거대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切照鐵嶺迆北 歷文高和定咸等諸州 以至公嶮鎭 自來係是本國之地 鐵嶺之地實其世守 乞仍舊便)  

     

    그러자 주원장이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고려가 예전에는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으면서 이제 와서 철령이라 꾸며 말하니 거짓임이 분명하다. 칙유하노니 깨달아 본분을 지켜 쓸데없는 상쟁의 원인을 낳지 않도록 하라."(高麗舊以鴨綠江爲界 今飾辭鐵嶺 詐僞昭然  其以朕言諭之 俾安分 毋生釁端)

     

    이와 같은 보고를 받은 우왕은 더욱 분노했다. 우왕은 즉시 최영으로 하여금 요동정벌군을 꾸리게 했다. 그리하여 1388년(우왕 14년) 음력 4월, 기병 2만 천명을 포함한 도합 5만 명의 요동원정군이 결성되어 요동으로 출발했다. 힘으로써 철령 이북의 땅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패배를 두려워한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꼬셔 역으로 남으로 내려와 우왕을 공격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었다. 

     

     

    붉은 사선( / )이 동녕부와 쌍성총관부의 경계쯤으로 생각되는 곳이고, 붉은 박스 안이 동녕부가 있던 곳이다.(현 랴오량시)

     

    여기서 주원장이  말한 개원·심양·신주가 모두 만주에 위치한 지명임을 앞서 '명태조 주원장은 제주도를 명나라 땅으로 생각했다'에서 밝힌 바 있지만, 무엇보다 주원장 스스로의 언급, 즉 "고려가 예전에는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으면서 이제 와서 철령이라 꾸며 말하니 거짓임이 분명하다"고 한 말을 보아도 철령(쌍성총관부)이 우리가 말하는 강원도 철령(아래 지도)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즉 철령은 압록강 이북에 있어야 말이 되는 것이니, 이상은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I)'에서도 역설한 바 있다.

     

     

    옛 철령위의 위치와 5년후 옮겨진 철령위(현 테링시). 아래 철령이 우리가 말하는 강원도 철령이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즈
    한국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의 말도 안 되는 쌍성총관부 위치

    아무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우리는 압록강 이북의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오늘은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고려 밀직제학 박의중이 말한 동쪽 영토의 끝 공험진(公嶮鎭)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그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철령 이북을 살펴보자면, 역대로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기까지가 본래 고려의 땅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태종실록>에도 다시 언급된다.

     

    "본국에서 즉시 상항(上項)의 사건으로 인하여 배신(陪臣)  밀직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조정에 가서 호소하여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본국에 환속시켜 주기를 빌었습니다."

     

    일찍이 고려의 윤관 장군은 예종의 명으로써 별무반을 조직, 천리장성 동북방의 여진족들을 정벌한 후 9개의 성을 구축한 바 있었다.(1108년 / 예종 3) 이것이 함주(咸州)·복주(福州)·영주(英州)·길주(吉州)·웅주(雄州)·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공험진(公嶮鎭)인데, 과거 이병도·이기백 교수 등은 이 9성을 함흥평야에 고착시킴으로써 역사를 크게 왜곡시킨 바 있다. (이기백은 <한국사신론>에 지도를 첨부해 설명까지 했으나 이 학설은 지금 실질적으로 폐기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종대왕의 말을 대놓고 무시한 것이니 (혹은 개똥으로 여긴 것이니)  세종대왕은 1439년 8월 북방영토를 개척하러 가는 김종서에게 다음과 같은 특명을 내렸다.

     

    "동북 지경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本國)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本鎭)이  장백산(長白山) 북록(北麓)에 있다 하나, 역시 허실(虛實)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윤관(尹瓘)이 공험진에 비(碑)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점(先春岾)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이  선춘점의 어느 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일 길이 막히어 사람을 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폐단 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밖[江外]에 옛 성(城)이 많이 있다는데, 그 고성(古城)에 비갈(碑碣)이 있지 않을까.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謄書)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女眞)을 쫓고 구성(九城)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城)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 쪽에 있는가. 상거(相距)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

     

    하지만 김종서 장군은 유감스럽게도 윤관이 선춘령(先春嶺)에 세웠다는 공험진 비석을 찾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고려 때 잃었던 옛 강역을 다시 개척하여 6진(鎭)을 세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7년을 머무르며 야인(여진족)들이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던 바, <세종실록지리지>는 조선의 북방 영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고려) 예종 2년에 중서시랑 평장사 윤관을 원수로 삼고, 지추밀원사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17만을 거느리고 동여진을 쳐서 몰아내고, 함주에서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9성을 쌓아서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공험진의 선춘령에 세웠다.... 이를 회복하였으니 조선의 강역에 속하는 준령이 백두산으로부터 기복(起伏)하여 남쪽으로 철령까지 뻗쳐 있어 천여 리에 이른다. 북쪽은 야인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 철령에서부터 북쪽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1천7백여 리다...."

     

     

    선춘령과 윤관 9성의 위치
    선춘령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고 새겨진 비를 세우는 장면을 담은 17세기에 제작된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 / 고려대 박물관 소장

     

    세종대왕은 1441년 1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김종서가 개척한 조선의 북방영토를 통고하여 확정짓는데, 공험진 이남으로부터 철령까지는 물론이고,  삼산(參散), 독로올(禿魯兀),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  등 여진족 땅 10처(處) 또한 조선의 관할로 하는 칙유를 받아온다. (<세종실록> 92권, 세종 23년 1월 8일 병오 2번째 기사)

     

    그 여진족 땅 10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산에 천호(千戶)가 산다 하였던 바, 꽤 넓은 영역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두만강 너머의 땅이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의 4군 6진은 여전히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있으며, 그 양강을 조선과 중국의 경계로 삼고 있으니 우리 스스로 우리의 옛 강역을 말아먹은 셈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공험진의 위치에 대해 '함길도 길주목 경원(慶源)도호부'조에서 "두만강가에 있는 경원에서 북쪽 688리가 공험진"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함경도 회령(會寧)도호부 고적(故跡)'조에서 공험진 선춘령 비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다.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선춘현이니, 곧 윤관이 비를 세운 곳이다. 윤관은 고개 위에 '고려지경’(高麗之境)' 비석을 세웠고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胡人)이 그 글자를 모두 깎아버렸다. 공험진은 소하강변에 옛 터가 있다." 

     

     

    선춘령이 표시된 조선 영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전도》/서울대 규장각 소장

     

    위 지도에 대한 '독도 본부'의 설명에서는 이 지도를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시 주목해봐야 할 백두산정계비 / 토문강을 북간도 지역의 국경으로 확정했다.
    훗날 청나라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해석했으나 '토문'이라는 지명은 만주어로 쑹화강 지류를 가리키는 용어로 쑹화강 상류가 한중 국경이 된다.
    두만강 너머 '고려경(高麗境:고려 강역)' 비석이그려진 조선 후기의 《요계관방도》 / 경기신문
    1745년 키친(T. Kitchin)이 제작한 A Map of QUAN-TONG or LEA-TONGE PROVINCE / 서간도와 북간도가 모두 조선의 영토에 포함돼 있다.
    1801년 영국 지리학자 존 케리(J.Cary)가 제작한 A NEW MAP OF CHINA & KOREA / 서간도 쪽 영토가 축소됐으나 여전히 압록강을 넘는다.
    중국 주재 미국 외교관 윌리엄스 웰스(W. S. Wells)가 1884년 뉴욕에서 발간한 중국지도 속의 조선
    1920년 로마교황청이 작성한 교구도 / 조선의 교구를 3교구로 나눠서 표현했다. 서간도는 완전 상실했으나 고려시대의 9성과 조선시대 6진에서 이어진 북간도는 오랫동안 조선의 영토로 존속되었음을 말해준다.
    1928년 7얼 19일 프랑스 선교회가 그린 연길지목구 설정 당시 한국 천주교회 관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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