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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위례동에 백제 무왕이 쌓은 성이?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1. 30. 23:39
서울 송파구 위례동은 지난 2015년 신설된 행정구역으로 600년 역사의 서울에서 보자면 갓난아기에 불과한 마을이다. 그런데 서울은 또 백제가 약 500년간 수도로 삼은 도시이기도 한 바,(BC 18~ AD 476) 그 한성백제의 유적이 위례동에 남아 있다. 이른바 하남위례성으로 불렸을 때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곳은 또 백제 무왕(武王, ?~641)과도 연관 지을 수 있다.
우리는 백제 무왕을 말할 때 흔히 익산을 떠올린다. 대표적으로는 위의 미륵사지가 폐사지로도 당대 동양 최대 사찰로서의 위용을 뿜고 있는 바, 이 절을 창건한 사람이 바로 무왕이다. 그밖에도 왕궁리 유적, 제석사지, 사자사지, 익산 쌍릉, 익산토성 등이 무왕과의 연계성을 짐작케 하는데, 그중에서도 왕궁평의 왕궁리 유적은 남북 492m, 동서 234m에 달하는 네모난 형태의 성으로 주변에서 발견된 수많은 명문(銘文) 기와편은 무왕의 익산 천도설을 강력히 증언하고 있다. 익산시는 경주·공주·부여와 더불어 문화재청이 지정한 고도(古都) 지구이기도 하다.
무왕은 백제 제30대 왕이다. 그는 재위기간(600~641년) 동안 과거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 602년(무왕 3)의 신라 모산성(母山城) 공격을 시작으로 적어도 10 차례 이상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신라와의 싸움에만 집중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무왕은 북방영토 관리에도 소홀하지 않았으니 632년 고쳐 쌓았다는 마천성(馬川城)이 이를 증명한다.
무왕은 그에 앞서 611년(무왕 8) 여름에 고구려로부터 송산성(松山城)을 공격받았다. 백제는 이때 송산성 수성에 성공하였으나 석두성(石頭城) 전투에서는 패해 남녀 3천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후 무왕은 마천성을 개수하였다. 이상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의 기록인데, 이어 의자왕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어어진다.
의자왕 15년(655년) 7월 마천성을 중수했다. 8월 왕이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신라 30여 성을 공격해 파괴했다. 신라왕 김춘추가 당에 사신을 파견해 표문을 올려 이르기를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우리 북쪽 경계에 침공해 30여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마천성은 백제의 북쪽 국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왕 때 고구려의 공격을 받을 것을 보면 당시 한강 유역을 신라가 점유하고 있었다는 교과서의 내용과 달리 백제와 고구려는 국경을 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백제가 무령왕 때 한강유역을 회복해 다시 강국이 되었다(更爲强國)는 얘기는 이미 '갱위강국(更爲强國) - 한강유역을 수복한 백제 무령왕'에서 마친 바 있다.
만일 이 지도대로라면 무왕 당시의 고구려는 신라의 허락 하에 길을 빌려 백제를 침공한 셈이 된다. 그리고 의자왕 때 고구려·말갈 연합군과 함께 신라 북쪽을 침공해 30여 성을 함락시키는 일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삼국시대 말기의 형세는 분명 백제가 공세적이었으니,(<삼국사기>) 이에 위중함을 인지한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태를 꼰지르고 처지를 하소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 있어 대부분의 국사교과서에 실린 삼국시대 말기의 지도는 무책임하다)
아울러 같은 책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말갈 연합군과 함께 신라 북쪽을 침공해 30여 성을 빼앗을 당시의 백제군 본영이 마천성임을 알 수 있는 바, 마천성은 한강 유역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서울 송파구 위례동에 약 1km나 뻗쳐 재현된 석성은 아마도 이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되어 흥미롭게 여겨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발상은 아마도 위례동의 옆동네에 마천동과 하남시가 위치한 때문이리라. 마천동의 '마천'(馬川)은 <삼국사기>의 마천성과 한자 표기가 같으며, 하남시는 정약용 이래로 온조의 첫 도읍지 하남위례성의 장소로 꾸준히 비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 '초기 백제를 찾아서 5 - 백제 첫 사찰은 하남 천왕사?')
물론 위례동의 석성은 뚜렷한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재현된 것이 아니고, 인근 아파트 단지와 송례 초등학교 옹벽 축대의 성격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그럼에도 그 길에는 온조와 무왕의 안내문을 두었으며, 성벽 또한 정성껏 재현돼 보는 이로 하여금 온조대왕과 무왕 시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생각하는 지자체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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