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Today
Yesterday
Total
  • 갱위강국(更爲强國) - 한강유역을 수복한 백제 무령왕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5. 14. 01:58

     

    먼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독음(讀音)을 짚고 가자. 이제껏 나는 백제 25대 왕의 명칭을 무녕왕으로 표기해왔다. 무녕왕의 녕(寧)은 '평안한 녕'으로서 '령'으로 발음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사마왕의 시호는 언제나 '무녕왕'이었고 나도 그렇게 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무령왕'으로도 쓰이더니 지금은 그것이 공식 표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가 적히 당황스럽지만 그것이 옳다고 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무령왕'을 지지하는 국립국어원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한자의 원음이 변하여 대중에 널리 쓰이는 음을 속음(俗音)이라고 한다. '武寧王'의 '寧'은 속음 '령'으로도 읽힌다. 한글맞춤법 제52항에 따르면 한자어에서 본음으로도 나고 속음으로도 나는 것은 각각 그 소리에 따라 적는다고 되어 있다. '寧'의 본음은 '녕'이고, 속음은 '령'인데, '무령왕(武寧王)'의 '寧'은 속음 '령'으로 발음되므로 그 소리에 따라 적은 것이다.

     

    따라서 무령왕이 올바른 표기라는 것인데, 원음을 무시하고 속음을 따랐다고 하는 설명이다. 이처럼 원칙을 무시하고 관습을 따랐다고 하는 설명이 아무리 해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것이 옳다고 정의한 마당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것은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나 현재 통용되는 화폐가 악화라면 그것을 쓰지 않을 재간이 없다. 

     

     

    공주 무령왕릉. 1980년대 중반까지는 입구가 개방돼 무덤 전실 입구까지 계단을 밟고 내려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유리를 통해 전실과 현실을 직접 볼 수 있었으나(석굴암처럼) 지금은 아예 입구부터 봉쇄했다. 그때로 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 무령왕은 가카라시마(加唐島)라는, 현 행정구역상 규슈 사가(佐賀)현 가라쓰(唐津)시에 딸린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문주왕의 동생 곤지(昆支)가 일본으로 부임하는 길에 동행한 임금의 부인에게서였는데,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斯麻)인 것은 그가 섬(시마, 혹은 사마로 발음됨)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일본서기>에 전해지는 바, 1971년 위의 무령왕릉이 발굴되었을 때 일본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가카라시마 전경
    가카라시마 해안
    무령왕 탄생지 안내문
    '백제 사마왕'의 명문이 새겨진 무령왕릉 지석
    가카라시마의 위치

     

    이어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1년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나는 조상 간무(桓武)천황(50대 천황, 재위 781~806년)의 생모(生母)가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 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는 폭탄 발언을 해 백제 무령왕은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일본 천황가가 백제 왕실과 밀접했다는 주장은 있어 왔지만 증명할 길은 없는 마당에 일왕이 직접 백제 왕실과의 연관성을 거론했던 바, 반향이 폭발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의 발언
    교토 오오미야(大宮)에 있는 오오에 릉(大枝陵) - 제 50대 일본왕 간무의 어머니인 백제왕손 고야신립(高野新笠, 다카노노 니가사)의 무덤이다.
    간무천황어모어릉참도(桓武天皇御母御陵參道, 간무천황의 어머니 능묘 참배로) 표석

     

    8세기 후반에 재위했던 간무천황의 어머니는 고닌(光仁)천황의 부인으로 이름은 고야신립(高野新笠, 다카노노 니가사)이다. <속 일본기>천황실록에 나오는 790년 1월 고야신립의 장례기사를 보면 "황태후의 성은 화씨(和氏)이고 이름은 신립(新笠)이며,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純陀太子)의 후손"이라고 기록돼 있다. 일본 왕실은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의 혈통이 한 번도 바뀌거나 단절된 적 없이 이어져 옴)를 자랑하므로 일본 왕가의 피 속에 백제인의 피가 흐름을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렇다 쳐도) 이에 대한 한국 측의 이렇다 할 논문이 없음은 유감이다.  

     

     

    순타태자를 모신 교토 히라노(平野)신사- 今木皇大神, 久度大神, 古開大神, 比売大神을 모신 격이 높은 신사로 이 중 주신인 今木皇大神(줄여서 今木神, 이마키노카미)가 바로 순타태자이다.

     

    무령왕의 탄생에 대해서는 이쯤에서 각설하고 그의 활약상을 주목해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재위 501-523년)은 40세라는 늦은 나이에 동성왕에 이어 백제 제25대 왕에 즉위한다. 그리고 그는 즉위년부터 고구려와의 전쟁을 시작하니 <삼국사기>에 나오는 "501년 겨울 11월에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서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게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후 백제를 쳐들어온 고구려군 및 고구려의 외인부대 말갈족과의 전쟁이 지속되는데, 그중 가장 하이라이트는 무령왕이 직접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고구려군을 공격한 무령왕 12년 9월 위천 전투이다.  

     

    502년 정월 가림성(加林城)에 근거를 두고 저항하던 백가를 토벌했고, 같은 해에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507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해 고목성(高木城)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 9월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을 공격해서 빼앗고 다시 원산성(圓山城)을 함락시키니 이에 무령왕이 직접 기병 3천명을 이끌고 위천(韋川) 북쪽에 나가서 싸웠다. 이때 고구려 군사들이 무령왕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업수히 여겨서 진을 치지 않았고 이에 무령왕이 기발한 작전을 써서 고구려군을 기습해 크게 무찔렀다.  

     

    그 기발한 작전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가불성, 원산성, 위천의 위치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무령왕이 이 무렵 한성 일대를 수복한 것은 분명해보이니 아래의 기사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507년 여름 5월에 고목성 남쪽에 2개의 목책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했다.(七年夏五月立二柵於髙木城南又築長嶺城以備靺鞨)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고로(髙老)가 말갈과 함께 한성을 치기 위해 횡악 아래에 와서 진을 치니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물리쳤다.(冬十月髙勾麗将髙老與靺鞨謀欲攻漢城進屯於横岳下王出師戰退之)

     

    즉 무령왕은 7년간의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결국 승리하여 한강 유역을 완전히 수복한 후 장령성을 쌓았다. 그리고 512년 고구려 말갈 연합군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다시 한번 승리를 거두고, 523년 한성으로 왕이 직접 행차하여 쌍현성을 쌓고 이듬해 봄 웅진으로 돌아온다.

     

    523년 봄 2월에 왕이 한성으로 가서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 등에게 명령하여 15세 이상 되는 한수 이북 주·군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하였다.(二十三年春二月王幸漢城命佐平因友逹率沙烏等徴漢北州郡民年十五歳已上築雙峴城) 3월에 왕이 한성에서 돌아왔다.(三月至自漢城)


    이와 같은 HOT한 활약을 보이는 삼국시대의 왕은 많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를 보면 그는 512년 섬진강 유역까지 진출한 대가야의 세력을 몰아내고 낙동강 서쪽까지 진출하게 되는 바, 521년 중국 양나라에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우리 백제가 여러 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비로소 선린관계를 맺었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이와 같은 更爲强國(다시 강국이 되었다)의 증거가 한강변에 남아 있었다. 바로 백제 무령왕이 475년 장수왕 남하 이래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을 공격했을 당시 고구려군이 요새에 있던 무기와 비품, 식량 등을 내팽개치고 황급히 도망갔던 현장이 서울 구의동 잠실대교 북단 언덕 위에 남아 있다가 1987년 한양아파트 단지가 건설되며 없어졌다.

     

     

    구의동 보루
    구의동 보루 복원 모형(서울대박물관)
    천정은 이와 같았을 것이다.(구리 고구려대장간마을 경당)
    구의동 보루에서 발견된 화덕과 솥
    구의동 보루 출토 쇠솥
    구의동 보루 출토 시루
    쇠솥에 얹힌 시루
    구의동 보루 출토 항아리
    구의동 보루 출토 보습(농기구)
    아차산 보루 출토 '후부도□형'(後部都□兄) 기와. 고구려가 아차산 보루 일대를 중요한 장소로 여겼음을 짐작케 해준다.
    한강 유역 고구려 보루 분포도

     

    구의동 보루에서는 위의 철제품, 토기류와 더불어 1,300여 점에 달하는 쇠화살촉과 무기도 출토되었다. 한 유적에서 이처럼 많은 종류와 양의 철기가 출토된 것은 흔치 않은 일로서, 백제 무령왕의 공격을 당한 고구려군이 경황없이 도망갔음을 증거한다. 특히 구의동 보루에서는 고구려군 칼이 2점, 철부(쇠도끼)가 4점, 철모가 10점이나 출토되었던 바, 개인 무기와 철모를 챙기지도 못할 정도의 다급한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고구려의 전쟁용 도끼
    고구려 철모

     

    나는 이것이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기발한 작전'의 성과가 아닌가 여겨지지만, 이제까지 무령왕의 성과는커녕 한강수복의 업적마저 발현됨이 없이 백제에 의한 한강유역 회복은 551년 성왕(聖王, ?-554) 시대의 일로 간주되어 왔다. 이에 그에 대한 학계의 인식 전환을 바라며, 마지막으로 일본 스다하치만(隅田八幡) 신사 인물화상경(人物画像鏡, 인물화 거울)에 새겨진 48의 글자를 새겨보며 글을 맺을까 한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503년) 8월 10일 대왕의 연간에 남동생인 왕을 위하여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께서 아우님의 장수를 염원하여 보내주는 것이다.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보내어 최고급 구리쇠 200한(旱)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도다.

     

    일본의 가장 오랜 금석문인 스다하치만 인물화상경
    무령왕릉 출토 구리거울
    무령왕릉 출토 구리거울 (총 3점이 나왔다)

     

     

    명문에 써 있는 대로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은 무령왕이 동생인 남제왕(男弟王)의 건강을 기원하며 제작해 보내 준 것이다. 이 남제왕이 26대 천황 게이타이(繼體, 재위 507~531)로,  일본의 진실된 역사학자들은 '만세일계'를 부정하고 게이타이 천황의 즉위를 새로운 왕조의 성립으로 간주한다. 지금의 일본 황실은 게이타이 천황의 후예라는 것이니 위의 인물화상경은 그 증좌가 될 수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일부는 레이저로 판독된 명문이라 하니 부정확성의 여지가 남아 있다. 따라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고 무령왕릉 출토 왕비의 팔찌에 새겨진 명문과 같이 같은 글자라도 여러 해석이 가능하니 딱히 이거라도 얘기하기도 어렵다. 다만 희귀한 명문 인물화상경이니만큼 그 속에 등장한다는 무령왕의 모습을 찾아보는 재미는 느껴볼 만하다. 과연 이 아홉 사람 중 무령왕은 누구일까?^^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소재 스다하치만 신사에 크게 만들어져 전시 중인 인물화상경( 人物画像鏡 )

    youtu.be/FK9odz5LY54

     

    댓글

    기백김님의
    글이 좋았다면 응원을 보내주세요!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