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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엽의 청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5. 24. 11:57

     

    엊그제 '춘원 이광수의 마지막 삶'을 발행한 뒤 보니 '이광수의 여인들'이라는 검색어로 로그된 내용이 있었다. 사실 춘원의 여성편력은 제법 알려져 있어 팩트일 가능성이 높지만 한 번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다. 이번에는 괜히 '땡겨' 찾아보니 역시 그랬는데, 그중 작가 김일엽(1896-1971)과의 관계는 확실한 스모킹 건이 있다. 그들의 로맨스가 문제가 되는 건 그 둘이 당시 모두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몸이기 때문이다.

     

    당시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다니던 이광수는 1892년 생으로 27살이었고, 동경 에이와학교(英和學校) 신입생이던 김원주(김일엽의 본명)는 23살로, 이른바 '불타는 청춘'이다. 따라서 그 둘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때 이광수는 동경에서 만난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학생 허영숙과 사실혼 관계였고,(게다가 일찍이 고향에서 결혼한 백혜순과는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김원주 역시 이노익이라는 남편이 있었다.(게다가 일본 유학은 그 남편의 외조 덕이었다) 

     

     

    동경 유학 시절의 김일엽(그의 청춘 사진은 귀하다)
    동경 유학 시절의 허영숙(최초의 산부인과 의사이자 여성 개업의이다)
    동경 유학 시절의 이광수(<무정>으로 이미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랐던 때이다)
    이광수, 허영숙과 아들 봉근. 이 아들은 8세에 되던 해 죽는다.

     

    김원주는 이때 춘원으로부터 일엽(一葉)이라는 필명을 얻는데, 이후 그녀의 이름이 된다. 'Daum백과'에서는 '일엽은 김원주의 법명으로 금강산 표훈사에서 하안거(夏安居)를 하고 있던 만공 선사로부터 받았다' 하고, '본디 이광수가 그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사서 조선의 한 잎사귀가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아호이기도 하다'는 이중적인 설명을 달고 있다. 또 그러면서도 수덕사의 만공선사가 김원주를 "사내들 사랑을 받지 못해 안달이 난 애욕의 병에서 벗어나지 못할 환자"로 취급해 끝까지 불가(佛家)에의 입문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다음백과'에서 말하는 김일엽

     

    김일엽

    1923년, 예산 덕숭산 수덕사에 머물고 있던 송만공 선사에게 웬 젊은 여자 하나가 엎드려 절을 한다. “스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나야 늘 이렇게 여여하게 잘 지냈네마는

    100.daum.net

     

    김원주의 필명 '일엽'에 대해서는 그녀의 아들 일당스님(김태신)이 한 말이 정확할 듯하다. 그는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에서 춘원 이광수가 김원주의 아름다운 필체에 반해 지어준 이름이라고 언급했다.(아마도 일당스님의 말이 맞을 것이다) 춘원은 당시 일본에서 일문학에 심취해 있었고 이때 알게 된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의 이름을 김원주에게 주었다. 이후 두 사람은 깊은 관계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5천엔 권에 등장하는 히구치 이치요는 일본 근대 소설의 개척자이자 최초의 직업 소설가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폐결핵으로 24세의 나이로 요절했으나 불과 14개월의 작가 생활 동안 <키재기>, <섣달 그믐날>, <흐린 강> 등과 같은 근대 문학사에 길이 남을 14편의 소설을 썼다.

     

    김일엽과 춘원은 같은 평안도 사람이라는 것 외에 일찍이 부모를 여읜 불행을 겪었다는 것과, 배우자를 두고 유학을 왔다는 환경적 공통분모가 존재했다. 이것이 오히려 두 사람을 급속히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천재적 문학성은 당연히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드는 끈이었으니, 일엽은 진남포 삼숭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07년, <동생의 죽음>이라는 시를 발표했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근대시라고 하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에 1년 앞선 작품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빨리 가까워진 만큼이나 빨리 식었던 바, 이후 그녀의 사랑은 노월(蘆月) 임장화(林長和)라는 유학생에게로 옮겨간다. 임장화는 진남포 대지주의 아들로 춘원과 같은 와세다대학을 다녔고(문학과 현대미술사 전공) 이후 도요(東洋)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인텔리로 시, 소설, 문학평론, 미술평론, 수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글을 발표하던 의욕적인 청년이었다.(그의 저작은 적지 않으며 국내에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를 최초로 소개한 선각자임에도 그에 관한 연구논문이 발견되지 않는다)

     

     

    국민대 방민호 교수가 임장화의 소설 6편을 묶어 출간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매우 뜨거웠던 듯하니 김일엽은 이때 아예 이장화와 동거에 들어가는데, 이 꼴을 본 김동인은 "드디어 보금자리를 찾았느냐?"며 질타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유분방한 그녀로부터 소설 <김연실 전>의 테마를 얻는다.(자유 연애주의자 김연실을 그린 <김연실 전>은 여류소설가 김명순이 모델이라고들 하나 내가 볼 때는 김일엽에 훨씬 가깝다)  

     

    하지만 이장화와의 뜨거웠던 관계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일본 유학 중  국내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김일엽은 이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급거 귀국을 하고 이화여전 학생들과 함께 전단을 등사·배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한다.(이로 인해 헌병대에 끌려가 일정기간 고초를 겪는다) 그리고 만세운동 뒤에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성에 머무르며 잡지 <신여자>를 창간, 여성 계몽과 언론 활동에 나선다.(1920년 3월) 

     

    이 잡지는 서양화가 나혜석이 동경에서 발행한 <여자계>(사진)라는 잡지에 자극받아 만든 최초의 여성지로서 나혜석, 박인덕, 김활란, 김명순, 차미리사 등 쟁쟁한 신여성들을 필진으로 두었지만 4호로 폐간된다. 이후 김일엽은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되는데 이때 남편 이노익과 이혼한다.(이노익은 제 돈으로 <신여자>를 후원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으나 일엽을 쿨하게 보내주고 자신도 미국으로 떠난다. 그러나 당사자인 남편과 달리 보수 성리학계와 기독교계는 분노했으니, 이노익이 일본 유학을 보내주고 <신여자>를 후원한 사실을 들며 그와 같은 남편을 버린 일엽을 크게 비난했다. 이때 일엽은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은 무의미하며 상대(남편)에 대한 희롱에 불과하다'고 응수한다. 

     

     

    <신여자> 창간호. 총 4호가 발간되었다.
    부녀잡지 <신여자>의 광고문. "들으라. 불같은 부르짖음을!! 읽으라. 꽃같은 미문묘구(美文妙句)를!!", "창간한 제1호에 만천하 청년남녀의 열광적인 환영으로 2천부를 매진하고 제2호를 발행했다", "주문할 때는 반드시 선불해야 함", "신여자의 요구와 주장", "남녀평등주의"같은 문구가 이채롭다.

     

    1921년 봄, 일본으로 돌아온 김일엽은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규슈제국대학 법대생이던 오오타 세이죠(太田淸藏)를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일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다고 하며 폭우가 쏟아지던 날, 여관에 들어가 폭풍 같은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그리고 임신을 하게 되었고 결혼 또한 하고자 하였으나 명문가였던 오오타 집안에서는 일엽이 조선인이라는 것과 그의 아버지 김용겸이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였다는 것, 그리고 장애인 남편을 버렸다는 이유를 들어 극력 반대한다. 

     

    소문을 따르자면 오오타의 아버지는 당시 도쿄은행장이었다 하고,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정한 장수였다고 하는 바, 여러 가지로 두 사람의 결혼은 성사되기 힘들었을 듯 보인다. 이에 일엽은 오오타의 만류를 뿌리친 채 귀국을 하고 아들을 낳는데, 이 아이가 앞에서 말한 일당스님 김태신(1922~2014)이다.  

     

     

    히비야공원의 봄

     

    * 이쯤에서 김일엽을 위한 변명을 하나 하자면 그녀의 청춘이 꼬인 것은 첫 결혼이 얼크러진 데서 비롯됐다. 일엽은 1918년 이화여전 예과를 졸업한 후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간호사 과정을 마친 상태였는데 이 무렵 들어온 노총각(당 40세) 이노익과의 혼담에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승낙을 하고는 바로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당 22세) 앞서 말한 대로 그녀는 조실부모한 뒤 조모 슬하에서 컸던 바, 늙은 할머니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결혼을 서둘렀던 것이다.

     

    당시 이노익은 미국 웨슬리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에서 화학을 가르쳤는데, 김일엽은 첫날밤에 남편의 다리가 하나 없는 것을 보고 소스라친다. 그녀는 이노익에게 약간의 장애가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이 정도인 것은 몰랐고, 더욱이 총각인줄 알았던 남편이 결혼의 경험이 있었고 그 파경의 원인이 남편의 장애에서 기인했단 사실을 알고는(첫 부인도 남편의 장애를 모른 채 결혼을 했으며 첫날밤에 놀라 달아났다고 함) 이중으로 충격을 받는다. 그녀의 일본 유학은 이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나 한다.

     

    ** 일엽의 아들 김태신은 일엽이 불가에 귀의해 수덕사에서 수행할 때 어린 몸으로 그를 찾아온 적이 있다. 당연히 어미가 그리워서일 터, 하지만 일엽은 모자로서의 속세의 인연이 끝났다며 어머니로 부르지도 못하게 하고 절 밖으로 쫓았다. 그러자 때마침 (변호사 김우영과 이혼 뒤) 수덕사 입구 수덕여관에서 머물던 나혜석이 어린 태신을 데려와 같이 잤고 그를 거둬 그림을 가르쳤다. 이후 나혜석처럼 화가의 길을 걸은 김태신은 해방 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가 되었는데 지금도 그 그림이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 있다 한다.(김태신 역시 훗날 불가에 귀의해 김천 직지사에 머물다 2014년 입적했다)

     

     

    동대문 부인병원 자리에서 보이는 흥인지문
    고암 이응노 화백의 자취가 어린 수덕여관
    그 무렵의 나혜석(자화상)
    말년의 일당스님(김태신)
    김태신의 그림. 착색한 돌가루를 묻혀 그린 그의 불화는 일본에 고가로 팔렸다.
    김태신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린 '승려도'

     

    화려한 일엽의 애정행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니 귀국 후 김일엽은 일본에서 같이 살던 임장화와 다시 동거에 들어간다. 그리고 임장화와의 결혼을 생각할 즈음 또 한번의 청천벽력을 겪는다. 그에게 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것이었다.(어느날 임장화의 부인과 자식들이 찾아오고 이에 임장화와 동반 음독자살을 결심하나 임장화가 약을 바꿔치기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한다)

     

    임장화와의 동거는 물론 곧 쫑이 났으나 이때쯤의 김일엽은 시인과 문필가로서 꽤 이름을 얻었던 바, 그만큼의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다름아닌 '난잡한 여자'라는 비난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비난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다시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이자 불교학자인 백성욱과 동거를 시작한다. 

     

    그녀의 회고록 <청춘을 불사르고>에 따르면 일엽은 백성욱이 불교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할 무렵 만나 7~8개월 간 살림을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인지 어느날 백성욱이 "우리 사이의 연(緣)이 다했다"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다.(백성욱은 잠적 후 1930년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는데, 1925년 무렵 임장화도 돌연 절필을 선언하고 증발한다) 이때 백성욱으로부터 받은 이별 선언은 꽤 충격이 컸던 듯, 그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이 자전소설 <희생>에 드러나 있다.

     

    그럼에도 일엽의 애정행각은 멈추지 않았으니 친구 유덕, 그리고 그의 애인이었던 소설가 방인근과 더불어 삼막사에 놀러 갔다가 방인근과 눈이 맞아 삼각관계가 되기도 하고, 동아일보 기자 국기열과 눈이 맞아 동거를 하지만 국기열은 워낙에 바람끼 가득한 놈이었던 바, 곧 파국을 맞는다. 이후 첫 애인이던 이광수와도 다시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이때 이광수는 확실한 유부남이었으므로 어쩔 도리없이 헤어지게 된다. 이때도 그녀는 주위에 비난에 이렇게 항변했다. "나의 행각이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는데 왜 타인이 나의 연애 문제에 개입하려 드는가?"

     

    그리고 자신의 정조론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자신들은 그렇지 못하면서 왜 타인의 육체적 순결을 강요하는가?  남성이라는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여인이라면 언제나 처녀로 재생할 수 있다. 그런 여인을 인정할 수 있는 남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여인, 그것이 바로 나 김일엽이다."

     

    이후 일엽은 일시 불가에 귀의해 1928년 4월 금강산 표훈사에 들어가 수행하나 다시 이혼한 대처승 하윤실을 만나 1929년 8월 대구에서 정식으로 결혼한다.(공식적인 재혼임) 그러나 2년 후인 1931년 다시 이혼을 하고 정식으로 불가에 입문하고자 수덕사를 찾아간다. 오래전 들은 만공선사의 법문에 감화받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공스님은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당신은 수행할 사람이 못되니 돌아가 다시 생각해보라는 것이었다. 일엽은 결국 수덕사에서 계를 받지 못하고 금강산 표훈사 서봉암에서 이성혜라는 비구니를 은사로 삭발 출가한다.  

     

     

    일엽이 출가한 내금강 표훈사
    그 유명한 표훈사 보덕암
    전쟁으로 불타기 전의 표훈사

     

    그리고 그곳에서 3년을 용맹정진하다 마침내 수덕사 만공스님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일엽이 출가하기 앞서 친구 나혜석을 만나 함께 불가에 귀의하자며 꼬셨다는 것인데, 이때 일엽은 나혜석으로부터 "현실 도피로써 종교를 선택해선 안 된다"는 면박을 받는다. 그런데 이에 대한 앙금인지 훗날 나혜석이 마음이 바뀌어 승려가 되고자 찾아왔을 때 일엽이 받아주지 않았던 바, 만일 그가 거절하지 않았다면 나혜석이 행려병자라는 최악의 상황으로써 생을 마감하는 비극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기도 한다.(사망시 그녀의 나이는 58세,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나혜석의 일생을 그린 1979년 영화 '화조'(火鳥)
    이때 또릿또릿한 신여성 나혜석을 연기한 배우 윤정희도 치매로 오락가락한다 하니 그저 세월이 무상할 뿐이다.

     

    김일엽의 파란만장했던 청춘은 이렇게 종지부를 찍는다. 그런데 아쉬움인지 해탈이지, 일엽은 산중에서 자신의 삶을 정리한 회고록을 집필하나 '글도 망상(妄想)의 근원'이라는 만공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절필하고, 그때의 글들은 그후 30년이 지난 1960년과 1962년, <어느 수도인의 회상>과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한바탕 바람을 몰고 온다. 그 영향인지 이어 가수 송춘희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가 나오고 그 노래비까지 수덕사 입구 주차장에 세워지지만 곧 수덕사의 스님들에 의해 철거된다. 그 가사가 다음과 같았던 까닭이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김일엽은 산중에서도 일엽이란 이름을 법명으로 사용하였다. 그 옛날 달마대사가 나뭇잎 하나를 타고 장강을 건너와 선종을 전파했다는 전설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일엽스님은 수덕사의 비구니 선원(禪院)인 견성암에 내리 머물다 1971년 76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1962년 출간되자마자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김일엽의 책이 50년만에 영문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수덕사의 여승' 노래듣기(윤태화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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