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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요새 V - 칼리아크라·초지진·오사카 성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5. 27. 04:23
25. 칼리아크라 요새
칼리아크라 요새(Kaliakra Fortress)는 불가리아 칼리아크라 곶에 위치한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다. 이 요새의 기원은 기원전 4세기 이곳에 거주하던 트라키아 부족 시절까지 올라가며 이후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제국의 족적이 마쳤다. 특히 로마는 341~342년, 지금의 칼리아크라 요새의 형태를 완성시켰으며 동로마제국 시절 변방의 중요한 요새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칼리아크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곶'(beautiful cape)이란 뜻으로 불가리아 바르나 시에서 북쪽으로 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다.
칼리아크라 곶은 해발 27m의 깎아지른 절벽이 흑해를 향해 남북 방향으로 2km나 돌출된 지형인데 요새는 바로 그 절벽 위의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은 침략자들과 이를 막으려는 원주민들 사이에서의 전투를 피할 수 없는 장소가 되었는데, 15세기 오스만제국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였을 때도 큰 전투가 벌어졌다. 요새 함락 후 이교도로부터 순결과 신앙을 지키려는 40명의 처녀가 투신자살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26. 초지진(草芝鎭)
초지진은 바다를 통해 한양으로 진입하려는 외적을 방비하기 위해 효종 7년(1656) 구축하고 숙종 때 개축한 강화해협 초입의 요새이다. 초지진에는 장교 11명과 병사, 군무원 210명이 배속되어 해협을 수비하였으며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의 3곳 돈대를 거느렸다. 돈대의 군사는 요새에 배치된 중대 직할대의 개념으로 본진간의 협공체제를 통해 수비력을 극대화하였는데, 강화도에는 초지진과 같은 본진이 5곳, 대대와 같은 개념의 보(堡)가 7곳, 돈대가 53곳, 그리고 본진에 속한 8곳의 포대가 철통 같은 방어망을 구축했다.
초지진에서는 1866년,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내침한 프랑스 극동함대 소속 군인 1000여 명과 교전이 벌어졌고, 1871년 통상을 요구하며 상륙한 미국 아시아 함대 소속 해병대 450명과도 교전 끝에 일시 점령당했으나 정족산성과 광성보에서 각각 이들을 퇴치하며 근대 조선의 호국의지와 국방력을 과시하였다. 하지만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치며 강군(强軍)의 삼수병(三手兵: 포수, 살수, 사수)을 육성하던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물러터지고 줏대없는 고종이 친정(親政)하며 지원이 끊기자 막강했던 강화도의 수비력도 와해되었다.
그리하여 고종 12년(1875)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의 포격과 일본군의 상륙으로 초지진과 영종도가 큰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때 일본은 오히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개항을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1876년, 조선 침략을 노리던 일본과, 세상 물정 모르던 조선국 간에 최초의 국제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망국의 첫 단추가 꿰어진다. 지금의 초지진은 1973년 강화전적지 보수정비사업 때 초지돈대만 복원된 것이다.
27. 오사카 성(大阪城)
히메지 성, 구마모토 성과 더불어 일본의 3대 성으로 일컬어지는 오사카 성은 1583년 전국시대의 패자(覇者)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을 개시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거의 교토에 머물렀는데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으로 이주해 오고 2인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곳으로 와 정무를 보며 히데요리를 보좌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을 때 다이묘(大名)들에게 어린 아들 히데요리의 보필을 부탁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그러마 약속했으나 곧 이를 배반하고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히데요리를 옹위하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한판 붙는다. 이에 전국의 다이묘들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싸우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미쓰나리의 서군을 물리치게 되고 그 여세를 몰아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 성으로 쳐들어온다.
이에 난공불락의 오사카 성에서는 긴 전투가 벌어지나 양측의 식량과 탄약이 고갈되자 이에야스는 히데요리 측에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우는 조건을 내세워 화친을 제의한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해자가 메워지자 그해 겨울 다시 오사카 성을 공격하였던 바, 결국 벼랑 끝에 몰린 히데요리가 자결하며 싸움이 끝나게 된다. 이후로도 오사카 성에서는 막부군과 신정부군 간의 싸움이 있었고, 방화, 벼락, 태풍 등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1950년 이후 대대적인 정비 끝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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