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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위(北魏) 효문제의 한화정책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6. 6. 12:08

     

    북위(北魏, 386∼534)는 혼란의 5호16국 시절, 북방의 탁발 선비족(拓跋鮮卑族)이 중원으로 남하해 세운 나라로 본래의 국호는 위(魏)였으나 삼국시대의 위나라 등 다른 위나라와의 구별을 위해 후세인들이 북위라는 명칭을 붙였다. 북위는 중원에 정착한 이후 성락(盛樂, 386~398년) 평성(平城, 398~494년) 및 낙양(洛陽, 494~534년)으로 수도를 옮기며 복잡다난했던 5호16국 시대를 평정했는데, 우리나라의 고구려, 백제의 역사·문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북위의 삼존불상
    고구려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리움 미술관  
    북위의 상평오수전
    부여 왕흥사(王興寺)에서 출토된 상평오수전

     

    내가 그 북위라는 나라를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아차산성 때문이다. 앞서 여러번 말했거니와 아차산성은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참수된 곳이다. 고구려 군의 공격에 수도 한성이 함락되며 개로왕은 피체되었고 아차산성에서 목이 달아났다.  

     

    개로왕은 그에 앞서 북위에 고구려 정벌을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고구려와 관계가 좋았던 북위는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이 사실이 고구려에 알려지게 되는 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대대적인 침공에 직면하고 결국 죽음을 맞게 된 것인데, 그가 북위에 보낸 국서가 「백제상 위주청벌 고구려표(百濟上魏主請伐高句麗表)」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개로왕이 죽은 아차산성


    북위는 또 고등학교 세계사 시험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문제로서도 기억에 남는데, 쉬운 예로는 '다음 중 한화(漢化) 정책을 실시한 북위의 황제는?' 이라는 효문제(孝文帝)의 답을 고르는 문제가 있었고, 어려운 예로는 '다음 중 북위 효문제의 업적이 아닌 것은?'이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내가 그 '효문제'라는 인물을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달리 기억력이 양호해서가 아니라 그의 대표적 업적이라는 '한화 정책'의 뜻을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한화 정책? 사실 이 말은 고등학생에게는 어려운 말이다. 여기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앞서 말한 대로 북위는 북방 유목민족이었던 탁발 선비족이 세운 나라로서, 그 나라를 다스리던 황제 가운데 한 명이던 효문제(북위의 7대 황제. 재위 471-499)가 기존에 이어오던 북방민족 시절의 제도와 풍습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중국 문명(한족의 문명)을 받아들여 중국화되었다는 뜻이다.  

     

     

    낙양 인근의 용문(룽먼)석불은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494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수·당 시대까지 조성되었다. 사진은 675년 완성된 '봉선사동'으로 용문석불의 얼굴 같은 곳이다.  
    용문석굴 빈양중동(賓陽中洞) 석불
    태안 마애삼존불 
    태안 마애삼존불의 정면. 태안 백화산 밑 암자의 바위에 새겨 있다. 중국 북위 불상의 백제식 번안으로 추측된다. 

     

    효문제는 즉위 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옛 한나라의 도읍지인 뤄양(洛陽)으로 천도하였다. 아울러 자신들 선비족의 성씨를 중국식으로 바꿔 탁발(拓跋)에서 원(元)으로 고쳤으며, 자신도 탁발굉(宏)에서 원굉으로 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하들에 대해서도 반강제적으로 중국식 성씨를 하사하였고, 복식을 비롯한 선비족의 풍습 또한 중국식으로 바꾸고 선비족 언어의 사용까지 금지시켰다.

     

    나아가 한족과의 적극적인 통혼(通婚)을 추진해 민족의 피마저 희석시켰는데, 이에 반대해 옛 수도 평성을 중심으로 일어난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시키고, 여기 가담했던 황태자 원순(元恂)마저 폐적시키고 처형하였다. 북위는 첫 황제인 태조 도무제 탁발규(拓跋珪)가 386년 나라를 세웠고 3대인 세조 태무제 때 화북지방을 통일하였다. 이후 북위는 기존 선비족의 문화에 한족의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지배질서의 구축을 시도하였는데,(대표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화했다) 그렇지만 효문제와 같은 적극적인 한화정책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진(晉)나라가 흉노족에게 멸망된 후 화북지방에는 몽골리안의 흉노, 갈, 선비족과 티베트 계통의 저, 강, 등의 오랑캐가 이주해 각축을 벌이며 각지에 나라를 세웠다. 이후 약 130년 동안 16개 이상의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화북지방은 439년 북위에 의해 통일된다.  

     

    효문제의 이 같은 정책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북위는 그 결과로 북방 오랑캐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중원의 보편적인 국가 체제로 일신하였고,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으며 나아가서는 같은 이민족인 수·당 왕조의 건국에도 기여하게 된다.(우리는 흔히 수·당 제국을 한족의 나라로 알고 있지만 모두 선비족이 세운 국가이다) 반면 지금까지 견강했던 북방민족의 상무정신은 물러졌으니 결국 문약(文弱)해져 나라가 기울게 되는데, 향후로도 중국 문물을 향유한 북방 정복왕조들(이를테면 요·금·원 같은)은 같은 전철을 밟는다.  

     

     

    뤄양에 있는 효문제의 장릉
     효문제 사후 한화 정책에 반대하는 6진의 난이 일어나고 이후 북위는 동서로 갈라져 기울게 된다.
    2016년 중국이 공개한 선무제의 경릉
    효문제의 둘째 아들인 선무황제 원각(元恪)의 무덤으로 1년 간의 수리 공사 끝에 시민에 개방됐다.  
    현실(관이 있는 방)에서 밖을 향해 찍은 사진

     

    최근 중국 관영매체인 신화통신이 갑자기 이 효문제를 띄워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와 부인 문소황후가 위의 용문석굴에서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분향하고 예불 드리는 1분 51초짜리 동영상을 공개한 것인데, 뤄양 출토 '위(魏) 효문제 예불도'와 '문소황후 예불도'의 장면이 재현된 것으로 알려졌다. 꼼꼼한 고증으로 인해 준비 기간만 석 달이 걸렸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이 고증에 있어서는 이미 도굴돼 미국 캔자스시티 넬슨-애킨스 미술관과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각각 소장돼 있는 부조상의 복식을 따랐다는 사실을 부언했다.

     

     

    위 효문제 예불도
    문소황후  예불도
    신화통신이 공개한 예불 준비 장면. 뒤에 용문석굴 봉선사동의 석불이 보인다.  
    효문제 역할을 한 배우
    문소황후 역할을 한 배우

     

    위에서 말했다시피 효문제는 강력한 한화 드라이브 정책을 시도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를 통해 북위는 남북조시대 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지만, 그의 선비족은 정체성을 잃고 한족으로 흡수되었다. 훗날 한족을 지배한 선비족의 나라 수나라와 당나라가 그러했고, 청나라를 세웠던 만주족 역시 그러한 길을 가고 있듯이..... 그와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거행된 행사를 공개한 배경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최근 신장위구르 자치주의 위구르족을 비롯한 중국 내 소수민족에의 억압정책에 대한 서방세계의 반발 및 내부 반발일 것이다. 얼마 전 세계적 기업인 H&M, 나이키 등에서 위구르족 강제 노역의 산물인 신장 면화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데 이어, 일본의 아식스(ASICS)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중국인들은 당연히 반발하였으니 나이키 등에 대한 불매운동에 들어갔고 아식스 용품 일체를 중국 마라톤 대회에서 퇴출시켰다)

     

    이에 자오리젠(趙立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신장위구르 지역에서의 강제 노역은 일절 없으며 미국이 하는 짓은 불량배식 약자 괴롭히기일 뿐이라고 비난했다.(ㅎㅎ 이 말이 웬지 우리 귀에 친숙하다 했더니 내로남불!) 하지만 지난 3월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터키를 방문했다가 그곳 위구르족의 한바탕 시위를 겪어야 했다. 강제 노역이 없다는 중국측의 주장을 믿기 힘든 이유다. 

     

     

    3월 25일 왕위 부장 방문시 터키 주재 위구르인들의 시위 
    "우리는 위구르인의 인권을 위해 여기 왔다" "중국은 위구르인에 대한 학살을 멈춰라"

     

    그래서 말이거니와 위의 용문석굴 행사는 '중국에 동화되어 잘 삽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몇 대(代) 못 가 모두 중국화될 걸 공연히 용쓰지 마라'는 메시지를 담은 퍼포먼스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중국인들은 쪽수가 엄청나 인종의 용광로가 따로 없다. 중국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소수민족쯤은 그냥 녹여 메이드 인 차이나 틀(거푸집)에 부어 중국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어렵지 않다. 그래서 금번 위의 행사를 보도한 매체가 신화통신 한국어판이라는 사실이 못내 찜찜하다.

     

    * 여기서 중국인이라는 개념은 중국 내의 '한족'과 '그에 동조하는 소수민족'을 말한다. 현재 중국 내의 한족은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그에 동조하는 소수민족'에는 조선족도 포함된다. 그 조선족들의 국적은 물론 중국이며 현재는 초기 이민자의 3대와 4대가 주류인데 머잖아 모두 한족에 흡수되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재일동포 3, 4대보다도 훨씬 민족 정체성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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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