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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 선비족의 이동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6. 7. 23:49
북위(北魏)는 투르크계의 민족 탁발 선비족(拓跋 鮮卑族)이 세운 나라로 5호16국 시절, 다른 이민족 출신의 왕조와 같은 장삼이사 무리 중의 하나였으나 혼란의 5호16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화북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이후 북위는 선비족 본연의 전통과 중국 문화를 혼합한 새로운 문화와 질서를 창조했는데, 특히 그들이 중원에 와 받아들인 불교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질서를 이끌었으며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북위의 불교는 아무리 강조를 해도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북위의 불교가 창성했던 것만은 아니니 때로는 도교의 공격을 받아 폐불(廢佛)의 위기를 겪기도 하는 등 다난함이 있었고 과정 또한 대단히 흥미롭다. 다만 그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긴 필설이 요구되는 바, 차후 기회를 살피기로 하고 여기서는 탁발 선비족의 시원(始原)을 한번 훑어보려 한다.
앞서 말한 돌궐족과 동일한 투르크 계통으로 여겨지는 선비족은 탁발 부족을 비롯한 6개 부족이 내몽골 대흥안령 산맥 일대에서 수렵과 목축 등으로 삶을 영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부족 중의 탁발씨가 2세기 중엽 남쪽으로 이동해 현재 중국·러시아의 국경 하천인 어얼구나강(아르군강)이 흘러드는 후룬호(呼倫湖) 기슭에 정착한다. 역사서에 '대택(大澤)으로 남천했다'고 기록된 그곳이다.
탁발 선비족은 그곳에서 초원생활을 하다 3세기 초(AD 22~55년 사이)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 흉노의 옛 땅인 무천진(武川鎭, 현재의 내몽골자치구 우촨현)에 이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탁발의로가 대(代, 310~376년)라는 나라를 세우나 화북의 강국인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다.
이후 선비족은 전진에 복속되나 전진이 비수대전(肥水大戰)에서 동진(東晉)에 패해 세력이 꺾이자 이 틈을 이용해 탁발의로의 손자 탁발규(도무제, 재위 386-398)가 386년 대(代)를 부활시키고 성락(盛樂)을 도읍으로 삼는다. 대는 곧 위(魏)로 국호를 바꾸니 북위는 탁발규의 대로부터 시작된다.
북위는 차츰 강성해져 388년 5월 북쪽의 고막해 정벌을 필두로 고차 유연 등을 정복하였고, 이에 탁발규의 북위는 영토를 크게 넓히게 된다. 그리고 395년 11월, 모용씨의 후연과 한판 붙는데 참합피 전투에서 후연군을 크게 격파한다. 이후 화북의 강자로 부상한 북위는 398년 수도를 다시 평성(平城, 현재의 산시성 다퉁시)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남쪽을 도모하니, 3대 황제인 탁발도 태무제(재위 423-452)에 이르러 마침내 북중국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439년)
* <삼국지>로써 우리에게 친숙한 위·촉·오의 삼국시대는 진(晉)나라에 의해 마감되나 진나라는 곧 북쪽의 흉노족에게 멸망된다. 이후 화북지방에는 투르크 계통의 흉노, 갈, 선비족과 티베트 계통의 저, 강 등의 이민족이 이주해 각축을 벌이게 되는데, 그 130년 동안 16개 이상의 나라가 명멸하던 화북지방은 439년 북위에 의해 평정된다.
태무제의 화북 통일은 곧 5호16시대를 마감시켰다는 것으로 이제부터는 한족의 남조와 북방 선비족의 북조가 대치하는 남북조시대(439-581)가 개막하게 된다. 태무제가 화북을 통일하자 서역과 동북의 20여 개 나라가 조공을 바쳤고, 그 가운데는 고구려 북쪽에 위치한 오락후국(烏洛侯國)이라는 작은 부락 국가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락후의 사신이 찾아와 조공을 바치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아뢰었다.
"황제께서는 조상님들의 고향이 북방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저희 나라가 있는 곳으로 조상님들이 사시던 옛 터도 아직 있습니다."
이 말은 들은 태무제는 중서시랑 이창 등을 보내 그 터라는 동굴을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동굴 입구의 바위에 새겼다는 내용이 『위서(魏書)』「예지(禮志)」에 축문의 내용과 함께 전한다. 하지만 그동안 이 동굴이 어디인지 확인되지 않았는데, 지난 1980년, 이 지역에서 신문기자를 하다가 은퇴한 향토사학자 미문평(米文平)이 끈질긴 추적 끝에 대흥안령 알선동(嘎仙洞)에서 이 장소를 발견해냈다. 가히 기적적인 일이었다.
축문의 내용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維太平真君四年癸未歲七月廿五日
天子臣燾使謁者僕射庫六官
中書侍郎李敞傅菟用駿足一元大武
柔毛之牲敢昭告于
皇天之神啓壁之初祐我皇祖于彼土田
歷載億年聿來南遷應受多福
光宅中原惟祖惟父拓定四邊慶流
後胤延及冲人闡揚玄風增構崇堂剋
翦凶醜威暨四荒幽人忘遐稽首來王始
聞舊墟爰在彼方悠悠之懐希仰餘光王
業之興起自皇祖綿綿瓜瓞時惟多祜
歸以謝施推以配天子子孫孫福祿永
延薦于
皇皇帝天
皇皇後土以
皇祖先可寒配
皇妣先可敦配
尙饗
東作帥使念鑿
생각 끝에 태평진군 4년(443년) 계미년 4월 25일, 하늘의 아들인 저 탁발도는 알자복야(謁者僕射) 고육관(庫六官)과 중서시랑 이창(李敞), 부토(傅菟)로 하여금 좋은 말과 소와 양을 제물로 올리도록 하고 감히 고합니다.
천신(天神)께서 나라 터를 처음으로 일군 우리 조상님을 도우사 저 논과 밭에서 천억년의 세월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후세가 남쪽으로 옮겨 가 많은 복을 받으니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중원(中原)을 덕으로 밝게 다스렸고, 더불어 사방(四方)으로 영토를 넓히고 세상을 바로 잡으니 후손에게도 경사가 이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저에게까지 미쳤던 바, 올바른 도리를 세상에 널리 퍼뜨렸고 높은 집을 층층이 지었으며, 흉악하고 추한 무리를 이겨 없애 위엄이 온 세상에 미쳤사온즉 어찌 이 은혜를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던 중 이곳의 왕이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시원(始原)의 옛 터가 이곳에 있다 하는 바, 여기를 찾아와 아득한 옛날을 돌이키며 조상님께서 전해주신 은덕을 우러러 경배하옵니다. 무릇 나라를 일으킨 대업이 조상님에서부터 비롯되어졌고 자손이 면면히 이어 번성한 바, 생각해보니 때마다 천복이 있었습니다.
그 베풀어 주신 은혜를 돌아보며 조상을 하늘처럼 받들어 공경하며, 대대손손 복되고 번성하기를 위대하신 천신(天神)과 지신(地神)께 비옵니다. 황제 선가한(先可寒)이 받들고 황후 선가돈(先可敦)이 제수를 진상하오니 바라건대 부디 흠향(歆饗)하소서.
동작수사(東作帥使) 염(念)이 새김.
* '사라진 민족 선비족과 수·당제국'으로 이어짐.
* 연관 글: '북위(北魏) 효문제의 한화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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