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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미도 등대와 인천상륙작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9. 12. 05:06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서막의 오마하 해변 전투씬 같은 장면이 없다. 유엔군의 인천상륙 때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때와 달리 적의 저항이 미약했기 때문이니, 레드비치(Red Beach,  인천시 만석동 일대) 지역 점령의 선봉에 섰던 미해병대의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중위가 떨어진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폭사한 것이 피해의 전부일 정도였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오마하 해변 전투씬 GIF
    UN군 인천상륙작전의 3개 지점 / 서해문집 자료
    로페즈 중위가 레드비치 방파제를 돌파하는 모습

     

    조선인민군이 가장 많이 주둔하고 있던 그린비치(월미도) 지역에서는 오히려 저항이 없었다. 월미도에는 400명의 인민군이 있었으나 상륙작전 이틀 전부터 퍼부은 함포 사격과 네이팜 탄 폭격에 섬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던 바, 9월 15일 유엔군이 상륙했을 때는 이미 전의가 상실된 상태였다. 아래 참호로부터 줄줄이 손을 들고 나오는 인민군의 모습은 당시의 정황을 잘 말해준다.(하지만 유엔군의 무차별 폭격에 주민 600명이 사상하는 비극이 있었다)

     

     

    그린비치 상륙을 시도하는 미해병대. 포격을 받은 월미도가 포연에 휩싸여 있다.
    항복하는 인민군들
    뭍에 오르는 맥아더 장군
    UN군 인천상륙지 그린비치
    월미도 공원 입구의 오래된 UN군 인천상륙지점 표석

     

    대신 영화 '인천상륙작전'에는 켈로(KLO·Korea Liaision Office)부대의 팔미도 등대 점등작전이 다이내믹하게 펼쳐진다. 켈로부대는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에 소속된 미군과 한국인 연합의 특수부대로서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북한 지역을 넘나들면 여러 첩보작전을 수행하던 북파공작대였다.

     

    켈로부대는 인천상륙작전 개시 전날 밤, 즉 1950년 9월 14일 밤,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15일밤 0시를 기해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히라는 지시를 받는다. 등대의 점등을 신호로 전 부대의 상륙작전을 개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켈로부대에서는 유진 클라크(Eugene Clark) 미 해군 대위와 한국 해군 대위 연정, 육군 대령 계인주를 주축으로 한 6명의 특공대를 조직, 주둔지 영흥도를 떠나 월미도 남서쪽 15.7km 지점의 팔미도에 침투한다.

     

    14일 밤 특공대원들은 팔미도를 지키던 인민군 2개 분대를 교전 끝에 무력화시키고 등대를 장악하나 아뿔싸, 점등에 필요한 부품이 보이지 않았다. 대원들은 1시간 40분 동안 부품을 찾다가 한국 대원 한 명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부품을 발견해 15일 새벽 1시 50분 드디어 점등에 성공한다.  

     

     

    인천 자유공원의 팔미도 포토 죤
    1903년 6월 1일 세워진 국내 최초의 등대였던 팔미도 등대(왼쪽)는 2003년 오른쪽 새 등대가 들어서며 100년 역사의 막이 내렸다. 옛 등대는 인천상륙작전 70돌이 되는 2020년 9월 15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557호)로 등록됐다.
    2016년 개봉한 '인천상륙작전'

     

    그 불빛을 신호로 유엔군 7만5000여 명을 실은 261척의 함선이 등대 불빛을 따라 15일 새벽 6시 월미도 해안에 도착했다. 그리고 상륙을 개시하였던 바, 성공 확률 5000분의 1이라던 상륙작전은 무사히 완수된다. 유엔군은 곧바로 인천을 점령하고 9월 20일 가장 먼저 출발한 미군 수색대가 서울에 도착한다. 놀란 김일성은 민족보위상(民族保衛相) 최용건을 사령관으로 하는 2만명의 서울 방위군을 투입했으나 한·미 해병대와의 두 차례 전투 끝에 궤멸하고 서울은 완전 수복된다. 1950년 9월 28일, 전쟁 발발 3개월 만이었다.

     

     

    9.28서울수복의 상징으로 쓰이는 유명한 사진

     

    퇴로가 끊길까 걱정한 조선인민군은 이때부터 정신없이 도망가기 시작했으니 포항과 마산까지 진격했던 인민군은 3.8선을 넘어 후퇴했고, 이후로도 마구 쫓겨 개마고원과 청천강 너머까지 달아났다. 마찬가지로 개마고원까지 도망간 김일성은 강계를 임시 수도로 삼고 소련과 중국에 도움을 청하니, 그해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군했던 국군 1사단 제15연대는 난생처음 보는 적에게 의문의 1패를 당하게 된다.*(이후 중공군의 공세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천안까지 밀린다)

     

    * 앞서도 말했지만 중국은 한국군에 첫 승리를 한 이 날을 한국전 참전기념일, 이른바 '항미(抗美)원조기념일'로 지정해 기리고 있다.(☞ '한국전쟁, 중공군 개입의 진상')

     

    그런데  성공 확률 5000분의 1이라던 인천상륙작전은 왜 그렇게 쉽게 성공했을까? 김일성은 이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그만큼 긴 갯벌로 인해 상륙이 용이한 지점은 아니나 사전에 중국측으로부터 인천을 주시하라는 충고가 있었고,(곧 중공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하게 되는 팽덕회는 인천상륙작전을 정확히 예측했다) 김일성 역시 그것을 받아들여 인천에 병력을 증파했다. 

     

    하지만 낙동강 전선이 교착되자 김일성은 급한 마음에 각지의 병력을 빼내 모두 그쪽으로 보냈던 바, 인천의 병력도 낙동강 전선으로 내려가 총공세에 합세하게 된다. 김일성은 빠른 시간 내에 낙동강 전선을 함락시켜 전쟁을 종식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니 육전에 능한 소련군 육군장교 다운 발상이었다. 실제로 그즈음, 인민군의 총공세에 직면한 이승만은 제주도와 사이판 중 어느 곳에 임시정부를 세우는 게 유리한가를 고민 중이었다.

     

    맥아더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처음부터 인천을 상륙지로 고집했다. 이유는 단순명료하였던 바, 적의 허리를 끊어 남쪽으로 몰려 있는 인민군들을 단숨에 궤멸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만일 상륙에 성공해 유엔군이 남하한다면 낙동강 전선에 몰려 있는 인민군의 주력을 남북으로 협공할 수 있게 되며, 아울러 보급로도 차단할 수 있어 인민군 궤멸이라는 시나리오가 가능했다. 더불어 '서울 탈환'이라는 상징적 효과 또한 염두에 두었다.

     

    사실 인천은 상륙작전을 펴기에는 지리적 조건이 최악이었으니, 앞서 말한 10m나 되는 간만의 차는 긴 갯벌을 만들어 썰물일 때는 큰 배들이 해안에 접근할 수 없었다. 해군 상륙함들은 적어도 수심이 7m 정도는 돼야 하고 특히 전차를 실은 상륙함(LST·Landing Ships Tank)의 경우는 그 이상이 보장되어야 했으나 맥아더는 이런 악조건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오히려 이 같은 악조건이 적들이 방심시킬 수 있다는 허허실실의 이(利)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써 맥아더는 군산항이나 주문진항을 주장하는 참모들의 의견을 거부했는데,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그는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삼척항과 군산항을 포격하는 위장 작전을 펴기도 했다.(마치 그곳에 상륙할 것처럼)  어찌 됐든 지금 자유 대한(이 표현은 참 오랜만이다)이 온전할 수 있었던 데는 맥아더의 공훈이 지대하다. 한마디로 그는 대한민국의 은인인 것이다. 

     

     

    월미도 그린비치에 상륙하는 미해병대
    맥아더 동상

     

    그런데 언제부턴가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폄훼하고 유엔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부당하게 생각하는 시류(時流)가 생겨났다. 일례로 유홍준은 낙양의 종이값을 올린 저 유명한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동학농민전쟁 황토현 전적기념관의 부조를 조각한 조각가를 이렇게 몰아붙인다. 

     

    "황토현 전적기념관의 부조는..... 아무리 미술에 문맹이라도 이처럼 유치한 조각을 보면서 한숨짓지 않을 수 없는 금세기 최고의 '문제작'이다. 이 조각을 맡은 분은 작고한 김경승씨로 그는 4.19때 부숴진 이승만 동상, 인천자유공원의 매카서(맥아더) 동상, 일제말기의 징용 · 징병 권장도를 제작한 당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맥아더 동상을 제작한 것도 그 조각가의 죄상 중의 하나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예는 그저 양념에 불과하고 당시에는 실제로 인천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니,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 중의 하나인 '우리민족 연방제통일 추진회의'의 공동의장이란 사람은 철거의 이유를 "맥아더는 한반도 분단을 부추긴 점령군 괴수이고, 한국전쟁 때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범죄자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철거가 옳으냐, 그르냐를 다룬 KBS의 토론 프로그램이 마련되기도 했는데, 이 자리에서 좌익들은 맥아더를 "우리끼리 잘 살려는 통일 과업을 제국주의의 시각으로 절단낸 악질 훼방꾼"이라고 대놓고 성토했고, 어떤 좌파는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인민군들은 (작전상 후퇴였으므로) 질서정연하게 인천을 빠져나갔다"고 말해 방청석에서는 좌·우 불문의 폭소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때 방청객 자리에 앉아 있던 소설가 오정희 선생께서 주어진 마이크에 대고 작은 소리로 울먹이듯 말했다. "사상에는 자유가 있으나 그렇게 말하는 건 이 땅에서 죽어간 참전 16개국 젊은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 젊은이들은 일면식도 없던 이 나라 사람들의 도와달라는 외침에, 오직 그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었다....."

     

    오정희는 인천이 고향이다. 태어난 곳은 아니고 어릴 적 인천으로 전근 온 부친을 따라 차이나타운 근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종종 인천이 배경이 되곤 하지만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담은 적은 없다. 인천에 관한한 그는 그저 오래된 거리의 남루한 일상과 그 속에서의 옅은 희망을 말하는 이야기꾼일 뿐이었다. 

     

    2005년은 정말로 그런 시절이었다. 그래서 당시 한 대학교수는 "6.25전쟁은 북한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고 당당히 공개적으로 주장했으며, 이에 고발당해 입건되었을 때 당시의 실세 법무부 장관은 수사지휘권을 발동해 불구속 수사를 지시하기도 했다. 그 사람들은 이후 또 다른 시류에 낙동강 오리알처럼 떠내려 가 지금은 존재조차 없다. 아울러 그 시절의 거센 광풍(狂風)은 미풍(微風)으로 바뀌었다.  

     

     

    동상 철거를 위해 행동에 나선 사람들. 2005년 7월
    다른 막가파. 맥아더 동상에 불을 붙인후 우상 철거를 외치는목사님. 2018년 7월

     

    다행히도 철거를 면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정의에는 국경이 없다. 인천상륙으로 전 세계가 싸워 자유의 승리와 대한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으니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일이다." 그 밑에서 '민족'이 들어가는 긴 이름을 가진 단체의 상임의장이란 사람은 여전히 다음과 같이 외쳤다. "국민 대부분이 양키에 속아서 거짓된 현대사를 배우고 있다. 자랑스런 독립국의 자녀로 살기하기 위해서는 이 동상을 끌어내려야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올라가 동상에 불까지 질렀다.

     

    ※ 그래도 이 나라는 법치국가여서 동상과 주변에 불을 지른 사람은 방화죄로 징역 1년이 구형됐다.

     

    여기 대해서 뭐라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다. 대한민국엔 사상의 자유가 있으며 자신의 생각을 표출할 자유도 있기에..... 다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토록 자유가 없는 독재국가에서의 헐벗고 굶주린 삶을 갈망하고 있는지....? (게다가 그 나라엔 종교의 자유마저 없는데.....) 며칠 후면 9월 15일 인천상륙 기념일인데 그때도여전히 이런 소리가 들려올까?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몇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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