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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중공군 개입의 진상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11. 3. 19:32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그는 잊을만하면 대한민국 국민의 복장을 긁는 소리를 한마디씩 해대 분노가 삭혀지지 않는데, 이번 일의 시작은 지난달 19일, 인민혁명군사박물관의 '항미원조(抗米援朝) 작전 70주년 전시'를 참관하며 "(항미원조 전쟁은)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하여 이룩한 정의와 평화의 승리"라고 주장한 데서 비롯됐다. '항미원조'란 중국이 6.25 전쟁을 이르는 말로, '침략자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도와준 전쟁'이란 뜻이다.

     

    시진핑은 이어 2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군 항미원조 참전 70주년 행사' 연설에서 "미국 정부는 국제 전략과 냉전 사고에서 출발해 한국 내전에 무력 간섭키로 결정했으며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38선을 넘어 전쟁의 불길을 북중 접경까지 끌고 왔다"며 6.25가 북침으로 비롯된 전쟁임을 천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25일, 한국전쟁 참전 노병들을 초청해 열린 '항미원조전쟁 참전 좌담회'에서 "위대한 항미원조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재차 피력했다.

     

    이는 한국과 미국이 연합해 북침했다는 북한의 주장과 다를 게 없는 언급이었는데, 나아가 그는 "중·조(중국·북한) 양국 인민과 군대가 흘린 피로서 맺어진 위대한 우정"을 언급하는 등 북·중 혈맹 관계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자 곧 중국 공산당의 청년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共産主義靑年團, 약칭 공천단)은 이상의 내용을 일반인에게 알렸다. 조선전쟁(한국전쟁)은 내전(內戰)에서 비화된 북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으로, 지금까지 교과서 등에서 명확한 표현을 피하던 관례와는 사뭇 다른 행보였다. 

     

     

    항미원조 7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시진핑  
     

    한국전쟁은 남침이 아니라고 말하는 공청단.

    공청단은 단원이 8000만명이 넘는 중국 공산당 내 최대 조직 중 하나다.

     


    공청단은 25일 중국의 트위터 격인 웨이보(微博)에 올린 글에서 "한국전쟁은 북한이 한국을 침략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아니다"(不)라고 강하게 부정했다. 이어 "당시 북한과 한국은 서로 한반도 전체에 대한 주권이 있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된 한 국가의 내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진 "항미원조 전쟁에서 이겼느냐"는 물음에는 "이겼다"고 답했고, "항미원조의 기점은 압록강이었는데 세계 1강국(미국)을 압록강에서 38선으로 물리쳤으며, 미국의 북한 전역에 대한 무력 점령 시도를 송두리째 부숴버렸다"고 덧붙였다.​

     

    중국 정부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날 왕원빈(汪文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6.25전쟁이 남침이 아니라는 공청단의 주장에 동의하는가"라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6.25전쟁은 본래 한반도에서 남북 쌍방간에 발생한 것으로 내전에 속한다"고 전제하며, "한국전쟁은 그 내전으로 시작됐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의 성질이 (국제전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6.25는 남북한 간의 내전이었음에도 미국이 개입해 북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 시진핑 주석의 2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발언을 덧붙이면 "(남북한 내전 중) 북한을 침범한 미국 전투기는 중국 동북 지역을 여러 차례 폭격했다" 이에 "중국 지원군은 북한 전장에 들어갔고 이는 정의로운 행위 중의 정의로운 행동"이었으며 "전쟁 기간 중국 공산당은 북한군과 힘을 합쳐 다섯 차례 전투를 치렀고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고 했다.(점입가경으로, 우첸 중국 국방부 대변인은 29일 월례 브리핑에서 "위대한 항미원조 정신은 반드시 영원히 전승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이상은 모두 궤변이다.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뚱의 공산당이 이기자 북한의 김일성은 크게 고무되어 남침을 계획했다. 이어 1950년 1월 미국의 태평양방위선인 이른바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자 6월 25일 4시 김일성은 7개 사단 9만 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그 선봉에 섰던 부대가 조선인으로 구성된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중공군 2개 사단이다. 하지만 그들 중공군과 북한군은 전세가 역전되며 궤멸되었고, 한국군과 UN군이 북상하여 평안북도에 이르자 드디어 진짜 중공군이 출현했다. 10월 19일의 일이었다.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중공군은 1950년 10월에 18개 사단 26만여 명이, 11월 초에는 12개 사단 12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넜다. 

     

    중공군은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 제15연대를 기습공격했다. 뜻밖의 일격을 당한 국군은 크게 당황하여 패퇴했는데 중국은 한국군에 첫 승리를 한 이 날을 항미원조기념일로 지정해 기리고 있다.(이후로도 중공군의 공격은 화력이 약한 한국군에 집중됐다) 그 공격이 있고 얼마 후, 두꺼운 흰색 솜옷을 입고 중국 광동어를 쓰는 적군 한 명 생포됐다. 중국계 조선인이냐 묻자 그는 중국인이라고 답했다. 중국의 개입이 드러나는 순간이자 목전에 이르렀던 남북통일이 산산조각나는 순간이었다.

     

     

    전쟁 중 붙잡힌 중공군 포로

     

     

    마오쩌뚱은 참전 직전인 10월 13일 10시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보낸 '출병결정통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오강(高崗)과 펑더화이(彭德懷) 두 동지 및 기타 정치국 동지들과 논의한 결과, 전원이 우리 군대가 조선으로 출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처음에는 괴뢰군(한국군)하고만 싸운다. 우리 군대는 괴뢰군과의 싸움에는 자신이 있다. 조선의 평양-원산 이북의 넓은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조선인민을 분발시켜 인민군을 재조직할 것이다. 2개월 후에는 소련 공군의 지원이 가능하며 6개월 후에 소련이 제공한 대포와 탱크로 훈련을 마치면 그때에 미군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전쟁에는 우리가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 참전하면 이익이 아주 크고 참전하지 않으면 손해가 아주 크다."

     

    그러나 이것은 마오쩌뚱의 오산이었다. 스탈린은 대대적으로 중공군을 도울 것처럼 꼬셔 마오쩌뚱의 참전을 이끌어냈지만 중공군은 그저 총알받이일 뿐이었고, 아울러 중국은 손해가 매우 컸으니 결정적으로는 자국의 경제를 20년 이상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마오쩌뚱은 편지에서 가오강과 펑더화이가 참전에 찬성했다고 말했으나 사실 펑더화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비록 한국전 사령관으로 참전은 했지만 펑더화이는 처음부터 반전론자였던 바, 그가 회의에 참석했다면 중공군의 참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확한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펑더화이는 바쁘다는 이유로 그날 회의에 불참했고 대신 그의 참모였던 시중쉰(習仲勳)이 참석해 찬성표를 던졌다. 훗날 마오쩌뚱은 이를 평가절하해 "출병에 찬성한 사람은 1.5명"이라고 했다. 자신을 한 표로, 시중쉰을 0.5표로 계산했던 것인데, 시중쉰의 찬성표는 그저 마오의 눈치를 살핀 결과라는 것이 후세 정치가와 역사가의 중론이다. 이 시중쉰이 바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아버지다.

     

     

    펑더화이와 시중쉰

     

    펑더화이(왼쪽에서 두 번째)와 시중쉰(왼쪽에서 세 번째)

     

     

    미국은 지난달 시진핑의 발언에 즉각 반발했다. 모건 오테이거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 24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6.25 전쟁은 북한이 마오쩌뚱을 등에 업고 남한을 침략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자유 진영 국가들이 북한의 공격에 맞서 싸울 때 중국 공산당은 한반도 적화를 자신하며 압록강을 가로질러 수십만 병력을 보냈다"고 덧붙였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역시 "우리는 북한의 침략에 맞서 파병국들과 나란히 싸웠다"고 강조했으며, 피터 레스쿠이에 주한 벨기에 대사 등도 "6.25 남침은 시진핑도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임을 천명했다.

     

     

    벨기에·룩셈부르크 참전 기념비

    3498명의 육군을 파병한 벨기에는 임진강 전선에서 중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440명이 사상했다. 벨기에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이유없이 침략당한 나라의 연대를 보여주고 싶어서" 였다는데, 그밖에도 세계 15개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이라는 낯선 국가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이역의 전장에서 피를 흘렸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대응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원래 시각이 좌편향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야당은 어째서 이런 발언에 침묵하는지 알 수가 없다. 넋 빠졌다는 표현은 이럴 때 어울리는 수사일 듯싶다. 하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의 전승절(戰勝節) 행사에 좇아가 천안문 사열대에 섰을 때 이미 답은 나왔었다. 그런 속없는 짓을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일까 했더니 사드 보복 같은 엄청난 답례가 있었다. 눈치보기가 일상화된 한국정부의 변(辨)은 언제나 '중국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경제 파트너' 운운 등이지만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서로마제국을 신성로마제국이 계승했다는 억지 논리가 가능한 것은 그 땅에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의 땅에는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며 명맥과 후손이 끊겼다. 그래서 비잔틴 제국이라는 가짜 이름의 역사 왜곡에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걸 따질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김대식의 '타인의 역사') 그런데 우리는 후손이 버젓함에도 시진핑의 발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일전에 "한반도는 중국역사의 한부분"이라고 했을 때도 꿀먹은 벙어리더니(☞ '광해군의 중립외 II'/'역사전쟁 중국 동북공정 I') 결국 다시 한방을 먹고 말았다.

     

     

     

    압록강 단교(鸭绿江断桥)와 중공군 참전상.

    압록강철교는 1911년 일본이 대륙 침략을 목적으로 압록강 하구에 건설했으나 6.25전쟁 때 미국이 중공의 개입을 막기 위해 파괴시켰다. 그것을 전쟁기념물로 놔두고 있는데 남아 있는 중국 쪽 다리 끝에 중공군 참전상이 설치됐다. 망원경을 든 자가 총사령관 펑더화이, 옆에서 손가락질하는 자가 마오쩌뚱의 아들 마오안잉이다. 마오안잉은 전쟁 중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다. 

     

     

    중국이 6.25전쟁의 대표적 승리하고 선전하는 상감령(上甘岺)전투.

    1952년 10월 14일에서 11월 5일까지 철원 부근에서 이어진  '저격능선전투'와 '삼각고지전투'를 통틀어 중국 측에서 이르는 말로, 이것을 자신들의 승리로 규정한 중국은 영화를 만들어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무려 1만4867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보았다.(한국군 4830명)

     

    영화 '상감령'(上甘岺)의 포스터

    미국의 제재로 궁지에 몰린 중국 화웨이의 런정페이(任正非) 회장은 작년 5월, "내년에 배출되는 뛰어난 인재들을 이끌고 상감령을 향해 진격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인민해방군 장교 출신이다.

     

     

    엑소의 레이와 에프엑스의 빅토리아

    중국 출신 K팝 아이돌 가수들이 ‘항미원조 70주년’ 기념 글을 SNS에 올려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배워 알고 있는 내용을 피력했을 뿐, 다른 정치색 같은 것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힘없는 어린 애들이나 잡고 힘있는 어른에게는 꼼짝하지 못하는 우리 스스로가 오히려 반성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6.25는 남침이라는 UN 안보리 결의가 있었고 구 소련의 기밀문서 공개로 남침임이 명확해졌는데도 우리는 시진핑에게는 아무  말 못하고 그저 애들만 잡고 있다. 한심하다. 따지지 않으니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거 아닌가. 

     

     

    * 관련 글: '역사상 가장 추운 곳에서 벌어진 싸움, 초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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