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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과 파주 화석정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11. 21. 22:44

     

    조선 선조 25년(1592년) 4월 30일 새벽, 선조 임금은 일족과 백관, 기타 궁인들과 함께 창덕궁을 나와 피난길에 올랐다. 왜놈들이 충주 탄금대에서 조선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몽진은 조선 건국 이래 200년 동안 유래가 없던 일이었던 바, 창망하기 그지없었는데 거기에 비까지 내려 도무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임금과 동궁은 말을 탔고 중전 등은 뚜껑 있는 교자를 탔는데 일행이 홍제원에 이를 무렵 비가 굵어져 종이품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병조판서 김응남이 흙탕물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으나 여전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고, 경기관찰사 권징은 무릎을 끼고 앉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녁에 임진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임금이 신하들의 꼴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속에 몽진하는 선조 임금

     

    여기까지는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 내용이니 모두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래의 픽션이 끼어들며 사실인 양 녹아든다.

     

    다행히 배는 구했으나 비 내리는 밤이라 달빛도 없었다. 이에 주위는 칠흙같이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한 개의 등촉(燈燭)도 없어 우왕좌왕하는데 갑자기 주위가 밝아왔다. 누군가 주변의 정자를 발견하고 그 정자에 불을 붙여 사방을 밝힌 것이었다. 이 나루터에 마침 태울 정자가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했거니와 그것이 빗속에서도 활활 타올랐던지라 (임금이) 경황 중에서도 신기해 물었다. 도승지 이항복이 답했다.

     

    "스승이신 율곡 선생께서 생전에 이곳에 정자를 지어놓았습죠. 그때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자신이 죽은 지) 10년을 지나지 않아 토붕와해(土崩瓦解)의 병란이 일어날 것이며, 그때 주상전하께서 어둔 밤 빗속에 이 강을 건널 것인즉 너희들은 정자 기둥에 기름칠하기를 게을리 말라 했습니다."

     

    이항복은 율곡 이이(1536-1584)의 문하이던 사람이었다. 그가 율곡 생전에 이와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들었다는 얘기인데, 정자 기둥에 기름칠을 하라 함은 빗속에서도 잘 타게 하기 위함일 것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율곡 이이는 생전에, 구체적으로는 계미년(1583년) 4월에 "국세(國勢)가 극히 부진하여 십 년 안에 토붕의 화(국토가 무너지는 병화, 즉 임진왜란)가 미칠 것인즉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을 배치하라"고 주장했으나 임금 선조와 재상 유성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임금의 몽진을 예측하고 임진강 나루에 정자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이야기인즉 그 말을 들은 선조가 십만양병설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신을 책하며 눈물을 쏟는다는 것으로서 끝맺는다. 그런데 이쯤되면 이이의 신산묘계는 동남풍을 불렀던 <삼국지연의>의 제갈량을 뺨친다. 아니 그보다도 신(神)의 반열에 올라야 마땅하다. 한마디로 거짓말이라는 얘기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10년 전 미리 예측하고 게다가 임금이 야밤에 강을 건널 것과, 그때 비가 내려 암담할 것까지 정확히 예측해낼 수 있는 능력..... 이는 신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능력이다.

     

    그런데 임진나루 가까이에는 율곡 이이가 세웠다는 '화석정'(花石亭)이라는 정자가 옛 모습대로 복원돼 있다. 그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위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까 여겨지게 만드는데  안에는 이이가 8세 시절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라는 유려한 시가 걸려 있어 위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한다. 이 정도면 신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역사적 천재의 반열에는 올라야 될 듯싶다. 하긴 이이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전무후무한 타이틀을 지닌 인물이기는 하다.(승진시험을 포함한 9번의 과거에서 모두 장원급제를 했다는 것이니 수재 중의  수재인 것만은 분명함. 9번의 시험에서 모두 떨어진 나로서는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할...... - -;;)

     

    林亭秋己晩 (임정추기만)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 (새홍하처거)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숲속 정자에 가을이 깊어드니

    시인의 생각은 끝이 없구나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닿아 잇달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나무는 햇빛을 받아 붉구나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 낼 것만 같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도다

    변방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구름 속으로 날아가며 소리 사라지네

     

     

     

    파주 화석정

    6.25전쟁 중 불탄 것을 1966년 파주의 유림(儒林)이 복원했다. 이이의 5대조인 이명신이 세운 것을 성종임금 시절 증조부 이의석이 중수했다.

     

    소실되기 전의 모습

     

    복원된 지금 모습

     

    화석정 현판

    이의석의 스승 암 이숙함이 나라 시인 이덕유 별장 평천산장의 전경을 빌려 화석정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글씨는 1973년 일대가 이율곡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으로 정비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라 하니 이 또한 언제 사라질지 모를 운명이다. 뒤로 팔세부시가 보인다.

     

    팔세부시

      

    화석정에서 본 임진강

     

     

    결론을 말하자면 율곡 이이가 앞날을 걱정해 세워 기름칠을 하게 했다는 화석정 스토리는 완전 픽션이다. 위의 사진 설명대로 화석정은 이이의 선조들이 세우고 중수한 정자이다. 더불어 이이가 여덟살 때 지었다는 '팔세부시' 역시 그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시에 대해서는 송강 정철과 서해 유성룡이 저작권을 다투는데, 과거 노산 이은상 선생은 송강 정철의 손을 들어주었던 기억이 있다.(그러면서 이이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부언했다)

     

    율곡 이이가 주장했다고 알려진 십만양병설 또한 사실이 아니다. 율곡 이이를 칭할 때면 곧바로 십만양병설이 따라붙고, 과거 국정교과서에도 실렸던 만큼 모두들 사실로 알고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선조실록>에는 이와 같은 단어나 내용이 단 1회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역시 누군가의 창작이라는 얘기다. 아마도 <유비무환>을 강조하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안보 이데올로기에 동참한 어용학자들이 이를 만들어 교과서에까지 게재했을 것인데, 그렇다고 생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던 바.....

     

    어용학자들은 당시 율곡의 제자 사계 김장생(1548-1631)의 개인 문집인 <사계집(沙溪集)>에서 십만양병설의 근거를 찾았다. <사계집>의 한 챕터인 <율곡행장>에 이이가 10만의 군병을 길러 완급에 대비하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토붕와해의 병란이 일어날 것을 말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음이었다.(請預養十萬兵 以備緩急 否則不出十年 將有土崩之禍....) 하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단지 율곡이 경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뿐, 다른 증빙은 없었다.

     

    그런데 이 근거 없는 이야기를 김장생의 제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확대 재생산하였다. 그가 쓴 <율곡연보>에 따르면 율곡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함과 함께 임진왜란이 발생할 해와 달까지 정확히 예측하여 훗날 서애 유성룡이 그를 진짜 성인(眞聖仁也)이라고 탄복했다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역시 율곡이 경연에서 이런 계고의 말을 했다는 것뿐이다.(先生於經筵啓曰)

     

    김장생이야 그렇다 치고 송시열은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우암 송시열과 율곡 이이는 몰년(歿年)이 100년 이상 차이가 나는 바, 그가 율곡의 경연을 들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히 율곡의 경연 내용에 대해 떠들고 있다. 즉, 실록에도 없고 다른 사료에도 없으며 오직 율곡 제자의 개인 문집에 실린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양 회자되고 있는 현실은 그 제자들의 창작력에 기인한다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하필 '10만'을 거론했을까? 유성룡의 <징비록> 등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입한 왜군의 수가 16만이었다. 이에 맞서 싸울 조선군이 20만이면 더욱 좋았겠지만 당시 2만의 상비군도 가지고 있지 못한 조선의 현실에서 20만은 과했을 터, 10만 쯤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듯싶다. 

     

      

    이율곡과 신사임당 동상

    파주 법원리 자운사원 입구에 세워진 동상이다.

     

    자운사원 사당과 묘정비(廟庭碑)

    율곡 이이와 사계 김장생이 배향됐다.

     

    화석정 안내판

    더욱 황당한 이야기가 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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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