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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대 칼리프 우마르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1. 21. 02:06


    이슬람 정통 칼리프 시대*의 2대 칼리프 우마르(Abū Ḥafṣ Umar ibn Al-Khattāb, 재위 634~644)는 알파루크( الفاروق, al-Fārūq)라는 경칭이 붙는다.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는 자신의 치세에 이슬람을 크게 신장시켰던 바, 오늘날 이슬람이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은 2대 칼리프 우마르와 3대 칼리프 우스만 치세(治世) 23년간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우마르가 처음부터 이슬람을 믿은 것은 아니었으니, 그는 아라비아 다신교 신자로서 오히려 알라를 신봉하는 자를 잡으러 다니는 관원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꾸란>의 내용을 읽고(그가 잡으러 갔던 누이동생과 매제의 집이라고 전해진다) 개종을 해 열렬한 이슬람 전파자가 되었다.(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 사도 바울과 곧잘 비견된다) 




    [Daum백과] 칼리프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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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32년 무함마드가 후사(後嗣) 없이 죽자(632년) 아부 바크르 앗 시디크가 그의 정치적 입지를 이어받아 '칼리파 라술 알라'(신의 使者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후 우마르, 우스만, 알리까지 4명의 선출된 칼리프가 이어진 시기가 이른바 정통 칼리프(al-khulafā'ar-rāshidun) 시대이다. 칼리프는 칼리파의 영어명으로 이슬람 공동체의 정치적·종교적 수장이라는 의미로써 쓰인다.  



    우마르에 대해서는 전하는 이미지가 없다. 



    무함마드는 나이 40세 되던 610년 9월 산중 수도 중 천사 지브릴(가브리엘)로부터 알라의 계시를 받는다. 이후 무함마드는 "라 일라하 일랄라"(La illaha illa'llah, 알라 외에는 존경받을 대상이 없다)를 외치며 새로운 종교의 전파에 나섰는데 이 새로운 종교 이슬람은 곧 신앙적 폭발력을 발휘하며 근동으로 퍼져나갔다. 앞서 '이슬람 들여다보기 II - 이슬람 공동체의 확장과 '메카'에서 말한 대로 이슬람 신앙공동체는 무함마드 사후 10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중동과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및 남부 유럽까지를 석권하는데 그 바탕에 칼리프 우마르가 있었다.  

     


    메카 풍경

    우마르가 칼리프가 되었을 때 이슬람의 세력은 메카를 중심으로 하는 아라비아 반도에 머물렀지만..... 



    634년 병사한 아부 바르크에 이어 2대 칼리프가 된 우마르는 무함마드의 유언에 따라 이슬람 공동체의 영역확장 전쟁, 이른바 지하드(聖戰)에 나서게 되니 당시 시리아 · 팔레스타인 일대를 지배하던 동로마제국과 부딪히게 됨은 필연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오히려 동로마제국으로서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632년 무함마드의 사후 벌어진 이슬람 세력의 분열(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을 기회 삼아 아라비아 반도로 쳐들어갔다. 1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는 내우외환의 악조건 속에서도 여하히 침공을 물리쳤지만 곧 병사하였던 바, 2대 칼리프 우마르 역시 방어전의 입장에서 동로마제국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명장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Khalid ibn al-walid)가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승리해 시리아까지 점령하였으므로 우마르는 의외로 다마스쿠스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이때 우마르는 시리아 사람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고 다만 이슬람으로 개종한 자에게는 세금 감면의 혜택을 주었다. 아울러 피정복민에 대한 인사의 불이익을 주지도 않았던 바, 저항 없이 시리아 땅을 다스릴 수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이 이듬해 화평을 청해왔다. 말이 화평일 뿐 사실상 항복하는 것이었다. 



    이슬람 최고의 명장으로 일컬어지는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드라마 속 이미지


    야르무크의 위치


    야르무크 전투가 벌어진 알 야르무크 평원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진군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모스크(시리아 홈스)



    이에 우마르는 637년 시종 한 명만 데리고 예루살렘 사람들의 항복을 받으러 갔는데, 워낙 검소했던 그였던지라 당나귀를 한 마리밖에 구할 수 없었다. 이에 하인과 우마르가 번갈아 가며 당나귀를 탔는데 마침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에는 하인이 당나귀에 타고 있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당나귀에 탄 사람이 우마르인줄 알고 엎드렸다가 고삐를 쥔 자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고 소스라쳤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물었다. 


    "칼리프께서 왜 나귀를 타지 않으셨습니까?"


    이에 대한 우마르의 대답이 단순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올 무렵에는 내 하인이 (당나귀를 탈) 순서였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시 한번 소스라쳤다. 말로만 듣던 이슬람의 공평정대함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이때 그 자리에 모였던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입은 비단옷과 금은으로 장식한 말을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이후 예루살렘 제 1성당에서 우마르를 위해 준비된 이슬람 예배가 진행되었는데, 바로 그 직전 우마르가 성당에 들기를 사양했다. 


    "내가 이 곳에서 예배를 올린다면 이 장소는 조만간 모스크로 바뀔 것이다. 나는 너희들의 전통을 파괴하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너희는 지금까지 너희가 했던 식대로 그간 모셨던 신을 숭배하라. 다만 이제부터 우리 무슬림들이 너희와 함께 살아갈 것이며 우리 방식대로 신을 숭배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은 모범을 보일 것이다. 만일 너희가 보고 마음에 든다면 그때 우리의 신을 믿어라."


    우마르는 점령지인 예루살렘에도 이슬람 공동체에 부과하는 인두세를 부과했다. 하지만 이 인두세가 동로마제국의 세금보다 낮아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는데 이에 대한 우마르의 답 또한 명료했다. 


    "우리의 세금이 낮은 게 아니라 과거 너희에게 부과된 세금이 높았던 것이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은 동로마 유스티니우스 대제 때 발생한 흑사병 이후 빈민구제를 명목으로 세금이 올랐다. 이후 사정이 정상화되었음에도 그때의 세금이 낮아지지 않았던 것이 우마르 시대에 바로 잡힌 것이었다. 이는 우마르 시대의 재정 상태가 좋아서가 아니라 재정 관리가 건전해진 까닭이었다. 우마르는 부세(賦稅)보다 세금의 관리와 누수 방지에 힘썼다. 이에 그는 헤지라 15년(636년) 페르시아에서 귀화한 마르주 반이라는 관리가 건의한 '디완'이라는 효율적 회계 시스템을 적극 수용하였던 바, 투명한 회계와 이로 비롯된 건전한 징수, 나아가 세수(稅收)의 공평 분배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우마르는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대대적인 도시 정화를 지시했다. 예루살렘은 예수가 승천한 곳이기도 했지만 무함마드 또한 승천한 성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이 심히 더러운 것에 분노했는데, 이에 때로는 자신이 직접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하루 종일  쓸고 닦았다고 한다.(갑자기 일본 TV에서 본, 회사 화장실 변기를 반짝 반짝하게 닦던 사장님이 생각난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루살렘의 어떤 시설물도 탐 내지 않았던 바, 오직 무함마드가 승천한 바위 곁에 작은 모스크 하나만을 세웠다. 


    우마르는 정복 사업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643년 북정(北征)을 단행해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젠 지역을 손에 넣었다. 아울러 명궁(名弓)으로 유명한 사드 이븐 아비 와카드(Sa'ad ibn Abi Waqqas)가 동정(東征)해 카디시아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군을 완파했으며, 642년에는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시켜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켰다. 또한 서쪽으로는 641년 아므르 이븐 알 아스(Amr ibn al-As)가 동로마제국군을 물리치고 알렉산드리아에 입성, 이집트 정복을 완수했으며 나아가 리비아의 트리폴리를 점령했다. 



    우마르 시대의 이슬람 공동체 영역


    우마르가 세운 알 아크사 모스크


    우마르의 칼


    643년 우마르에 함락된 아제르바이젠 성채


     사드 이븐 아비 와카드 사원(시리아 알렙포)


     사드 이븐 아비 와카드의 활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이븐 알 아스 모스크.

    이집트 카이로는 이슬람군의 주둔지 푸스타트가 확장돼 도시가 된 경우다. 



    우마르는 정복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검약했으니(유감스럽게도 이후의 칼리프에게서는 이런 모습이 사라진다) 칼리프가 된 후로는 오히려 술을 끊고 평생 해진 옷 한 벌로써 생활했으며 대추야자 같은 음식으로써 간소한 식사를 이었다. 반면 그는 백성들의 복리 증진에 매진해 마지 않았으니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개 한 마리가 굶어 죽었다면 그 또한 내 책임"이라는 말을 남겼으며, "자신이 아니고는 올바로 통치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 앞의 오만"이라며 위정자의 자세를 강조했다. 


    아울러 이집트를 정벌한 이븐 알 아스가 모스크를 건립하고 설교단을 세웠을 때 이에 분노해 모스크를 파괴시켰는데, "예언자(무함마드)께서는 누구라도 무슬림 위에 다른 사람이 서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이 파괴에 대한 그의 변(辨)이었다. 누구라도 종교적으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거나 가르침 따위를 줄 수 없으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써 <꾸란>의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에 그는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꾸란>을 만들었던 바, 이런 면에 있어서는 <흠정 영역성서>를 발간한 킹 제임스에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왕으로서 군림하지 않았으며 성직자 또한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신 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생각에 위의 무함마드의 의지를 빌려 성직자의 형성을 차단하였던 바, 신의 매개자가 없는 이슬람의 전통이 확립되어졌다.(사실 이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니 신의 말씀을 성직자는 듣고 일반인은 듣지 못하는 것도 어불성설이거니와 경전에 써 있는 신의 가르침을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른다는 것 또한 지대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우마르에 관한 대표적인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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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