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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금남로와 정충신 장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1. 24. 15:37


    광주광역시 금남로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다. 당시 시민들의 피로 물들여진 이 거리는 이제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다. 옛 전남도청 청사 앞에서 그때의 참상을 지켜보았을 회화나무는 이제는 죽고 없지만, 또 다른 역사의 목격자이자 증언자인 전일빌딩은 '전일 245 빌딩'으로 새단장을 하였다. 이 건물은 당시 시민들을 향한 헬기의 기총소사가 있었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의 증인'이었는데, 2020년 11월 30일 광주법원은 전일빌딩에 남겨진 탄흔을 '헬기 기관총 사격'으로 판단했고, 이로 인해 내란의 주역이었던 전두환은 실형을 먹었다. 


    ~ 전두환은 2017년 4월 발간한 회고록을 통해 "5·18 당시 헬기 기총 소사는 없었던 만큼 조비오 신부가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것은 왜곡된 악의적 주장이다. 조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고 강변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2018년 5월 3일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법원은 헬기 사격 목격자와 군인들의 일부 진술, 군 관련 문서 및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등에 비춰 "1980년 5월 27일 UH-1H 헬기가 마운트에 거치된 M60기관총으로 전일빌딩을 향해 사격했다"고 인정해 전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금남로


    당시의 헬기와 전일빌딩

    당시 전남일보와 지역 민방 전일방송 등이 입주했던 전일빌딩 앞에 헬기가 날고 있다. 


      광주직할시 동구 금남로 1가 1번지 전일빌딩 10층 기둥의 탄흔


    2017년 9월 13일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가 전일빌딩 총탄 흔적을 둘러보고 있다.


    2016년 12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총기안전실 감식반이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탄피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조선일보 사진) 


      

    2020년 6월 1일 재판에 증인 출석한 김동완 국과수 총기연구실장은 이렇게 증언했다.



    2020년 5월 11일 재개장한 전일빌딩

    이때 '전일빌딩 245'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 건물 벽과 기둥 등에서  발견된 245개의 탄흔을 명시한 것이다. 이로 인해 건물은 28번째 5.18사적지로 지정되어 리모델링되었다. 






    전일빌딩이 지켜본 그때의 모습



     옛 전남도청 앞의 회화나무

    2013년 6월 이 나무가 수명을 다해 죽자 위로의 조등이 걸렸다.(2012. 6. 12. 중앙일보)



    작년에 있었던 또 하나의 사건

    2020년 9월 7일 광주에는 191mm라는 사상 유래 없는 비가 내렸다. 사진은 서구 양동시장 앞의 범람 직전의 광주천 모습이다. 


    무시무시한 물살의 광주천과 금남로



    이 거리가 금남로로 불리게 된 건 뜻밖에도 이괄의 난과 연관이 있다. 앞서 '이괄의 난'의 성패를 가른 안현 전투'에서 말했듯 이괄의 난이 실패하고 종사가 회복된 건 오로지 안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정충신(鄭忠信) 덕분이다. 당시 안주목사였던 정충신은 이로 인해 난이 평정된 후 진무(振武) 1등 공신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지는데, 그의 봉호가 광주직할시의 지명이 된 건 그의 고향이 광주였기 때문이다. 



    충무공 정충신(1576-1636) 영정 



    그런데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정륜(鄭倫)은 광주부(光州府)의 아전이었고 어머니 역시 광주부에 딸린 관노였다. 이에 충신은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에 따라 노비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에 별 일이 없다면 일생을 노비로 마쳐야 했을 것인데, 별 일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 조선시대 양반과 노비 사이, 혹은 양민과 노비 사이에 태어난 자는 그 어미의 신분을 따르게 한 법 

     

    정충신은 1592년 7월 전라도절제사 권율이 광주 부근에서 모은 민병대 1,500명의 일원으로 충청도 이치(梨峙, 배티 고개)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에 참전했다. 이치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고개로서, 이 이치전투에서 권율은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왜군을 물리쳐 호남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권율은 의주로 몽진한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명나라 망명 계획을 보류시키려 하는데, 의주까지의 2천리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다. 왜군 천지의 상황에서 장계를 가지고 의주까지 간다는 것은 가히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었을진저.


    이때 열일곱 살의 정충신이 나섰다. 그리고 그는 스무 날의 고생 끝에 의주에 도착, 대나무 통에 든 장계를 전달하였다. 이를 본 임금이 뛸 듯 기뻐했을 것은 보나 마나 한 일이었으니 이 기쁜 소식을 전해준 소년 정충신에게 면천(免賤)의 상을 내려 평민으로 승격시켰다. 아울러 도승지 이항복에게 소년을 돌보게 했다. 이항복 역시 과거를 문제 삼지 않고 정충신에게 글을 가르치고 아들처럼 대했는데, 소년 충신은 이에 보답하여 문무의 습득에 게으르지 않았던 바, 행재소에서 치러진 무과시험에 병과(丙科)로 합격, 양반의 반열에 올랐다. 이와 같은 소설적 삶을 당시의 사관(史官)이었던 박동량(朴東亮)은 자신의 일기 <기재사초(寄齋史草)>에 다음과 같이 약술(弱述)했다.  


    정충신(鄭忠信)이라는 자가 있어 나이 17세에 징병에 응모하여 최원(崔遠)을 따라 종군하였다. 일찍이 왜인들의 목을 베고 이어서 서장(書狀)을 가지고 왔다. 그 얼굴이 아름다웠고 말에 조리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였고, 그 중에서도 이자상(이항복)이 특히 심하였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이불에서 자고, 길 갈 때에도 꼭 동행하고, 앉을 때에도 꼭 붙어 있었다. 그에게 과거 보기를 권하여 마침내 무과에 합격하니, 사람들이 그를 이판서(李判書, 병조판서 이항복)의 별실(別室, 분신)이라고 하였다.  (<기재사초> 임진잡록)



    이치대첩비

    이치(梨峙)는 충남 금산군과 전북 완주군 사이의 고개로, 1592년 7월 9일 권율 장군은 이곳에서 전주성으로 향하는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의 왜군 2,000명을 격퇴시켰다. 이치대첩비는 일제시대 파손되었다.(BSN 사진)


    이치대첩비가 있는 곳

    이치대첩비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에 위치한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싸움이나 일본에서는 이치전투를 '분로쿠노에키(文祿の役, 임진왜란) 3대 전투'로 꼽을 만큼 중시한다. 여기서의 패전으로 전라도 곡창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로 인한 보급의 차질로 전선이 교착됐다고 보는 까닭이다. 

     


    의 소설 같은 삶은 이후로도 내내 이어졌다. 무신이 된 정충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공을 세워 종4품 선사포(宣沙浦)* 첨사가 되었고, 1602년에는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이때 훗날 후금(後金)이라는 나라를 건국한 압록강 너머 여진족의 동태를 살피었다고 전해지는 바, 시대를 읽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듯하다. 이 시대에 과연 야만족 여진을 주목한 자, 다른 사람 누가 있겠는가? 


    * 평안도 철산부 곽산에 있던 조선시대 군사기지


    이후 1608년 조산보* 만호, 1610년 보을하** 첨사를 역임하며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을 방어했는데, 1618년 스승인 이항복이 인목대비의 폐비에 반대한 죄로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자 직을 사퇴하고 북청으로 가 중풍과 안질로 고생하는 이항복을 간병했다.(이때 이항복의 유배 기록 <백사북천일록>을 남기는데, 이항복은 그해 말 결국 유배지에서 숨을 거둔다)


    * 함경도 경흥군 조산에 있던 조선시대 군사기지

    ** 함경도 회령군 보을면에 있던 조선시대 군사기지 





    당시의 조산보와 녹둔도


    훗날 녹둔도에 두만강의 토사가 쌓이며

     

    정충신과 이순신 등이 조산진 만호로써 관리했던 녹둔도는 러시아의 영토가 됐다. 녹둔도는 32㎢, 여의도 4배 면적의 땅으로 언젠가는 되찾아야 할 우리의 미수복 영토이다.                                



    이후 정충신은 시대의 요청으로 복직되어 만포진* 첨사가 되었다. 즈음하여 북방에서의 판도가 바뀌었으니 1619년 만주 사르후 전투**에서 여진족의 후금이 명나라를 패배시키고 중원을 압박 중이었다. 광해군은 그 싸움 전 이미 판세를 파악하고 명·후금과 등거리 외교를 펼쳤으나, 사르후 전투 후에도 사태파악을 못한 대신들은 여전히 친명배금(親明排金)을 외쳤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I'


    * 만포시 압록강 국경 부근에 있던 조선시대 군사기지

    ** 1619년 3월 2일, 지금의 랴오닝성 푸순 근방에서 벌어진 명과 후금과의 전투로 명군(明軍)이 16만, 후금군은 4만5천에 불과하였으나 후금이 대승을 거두며 중원 정복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일제시대 엽서 속의 만포진 세검정과 압록강

     

     

    이에 조정 대신들은 왕의 뜻과는 다르게 후금에 국서를 보내기를 반대하였던 바, 광해군은 그 대신 정충신을 파견한다. <실록>을 보면 정충신이 노비 출신이라는 것이 때로는 그의 발목을 잡으나 광해군은 이와 같은 신분의 벽을 무시하고 그를 중용했던 바, 광해군의 지인지감(知人之鑑)이 감탄스럽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고산리(高山里)는 바로 서방(西方)의 큰 진(鎭)인데 장차 성을 쌓는 역사를 하게 되었으니, 새 첨사를 마땅히 극진히 가려야 합니다. 정충신은 천출(賤出)인데다 재기(才器)가 과연 합당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울러 뭇사람들이 매우 온당치 못하다고 여기니 교체를 명하소서.(<광해군일기> 18권, 1609년 7월 27일  기사

     

    임금이 전교하기를, "정충신은 일을 알고 영리하니 이 사람을 오랑캐의 소굴에 들여보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비변사로 하여금 급히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충신이 강을 건너는 날과 노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날을 자세히 길일을 택하여 보내라."(<광해군일기> 139권, 1619년 4월 19일, 22일 기사) 



    사르후의 위치와 조선군의 참전로 


    청태조 누르하치의 칼


    강홍립의 묘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조선 도원수 강홍립의 묘는 이렇듯 초라하다. 명나라의 요구로 1만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게 된 그는 심하 전투에서 패하자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항복하여 '관형향배(觀形向背, 형세를 봐 나아갈 바를 결정함)하라'는 광해군의 복심을 받드나 이로 인해 인조반정 이후 지금까지 푸대접을 받고 있다. 



    정충신은 요양성에 도착했지만 누르하치는 만날 수 없었다. 대신 억류된 강홍립 등을 만나고 후금 팔기군의 규모 등을 직접 눈으로 파악하고 돌아오는데, 이후 그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더욱 지지하게 된다. 그가 광해군을 몰아내는 서인(西人)의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앞서 '이괄의 난'의 성패를 가른 안현 전투'에서 말한 대로 이괄의 난에는 반대하여 서인을 돕는데, 이는 그의 반란을 올바르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 그는 안주목사로서, 도원수 장만, 부원수 겸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 순변사 겸 구성부사인 한명련과 함께 북방 방어의 요직에 있었다. 그리고 난이 발발하였을 때 한명련이 이괄과 함께 도성으로 쳐들어온 반면, 그는 장만과 함께 적극적으로 난의 진압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난을 진압하였는데, 이는 반란의 주모자 이괄과는 절친한 사이였고, 까닭에 반군과 한패일지 모른다는 조정대신들의 의심을 딛고 이룩한 성과이기에 더욱 의미 있다 할 것이다. 


     정충신의 교지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 정헌대부 금남군에 봉해졌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기는 했으되 주모자였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된 일과, 조선이 다시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돌아선 일을 고하였던 바, 정묘호란이 발발하게 된 일은 앞서와 같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부원수 겸 평안도병마절도사로서 후금의 부대를 황해도에서 방어하며 화평을 이끌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633년 후금이 세폐를 올리고 양국의 관계를 '형제의 맹(盟)'에서 '군신(君臣)의 의(義)'로 고칠 것을 요구하자 조정은 후금과의 단교를 선언하였다. 이때 정충신은 이를 극력으로 반대하였다. 그 결과가 어찌 될지 뻔히 보였던 까닭이나 그러한 그의 신세 또한 어찌 될 지가 뻔했다. 


    그는 파직되어 당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길에서 다음과 같은 시조를 남겼다. 


    공산(空山) 적막한데 슬피 우는 저 두견새야
    촉국흥망(蜀國興亡)이 어제 오늘이 아니거늘
    어찌 지금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는가

    두견새는 촉(蜀)나라 마지막 황제 유선(유비의 아들)이 죽어 새가 되었다고 전설이 따라 귀촉도(歸蜀道)라고도 불려지는 새이다. 그 촉나라는 제갈공명 사후 나라의 방비가 흐트러져  결국 망하고 말았는데, 정충신은 이 나라 조선도 그렇게 될까 염려했던 것이었다. 결국 1636년 12월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후금이 다시 쳐들어왔던 바, 병자호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정충신은 유배 이듬해인 1634년 풀려나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역임했으나 삼전도의 치욕이 이루어지는 병자호란에 있어서는 아무런 역할도 못했다. 전쟁이 일어난 그해, 지병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서산시 지곡면의 정충신 부부 묘   

    정충신은 사패지(임금이 내려준 논밭)가 있는 서산 땅에 묻혔다. 그가 죽자 인조는 제갈량과 같은 신하가 죽었다고 애통해 했으며 하사한 어포(임금의 두루마기)로 수의를 삼게 했다. 명길은 고인의 지용(智勇)과 검약을 찬하는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했으며 훗날의 정약용은 '무등산의 정기를 타고 난 자로서 이순신에 비견할 인물'이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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