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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두앵 2세와 쩐(錢) 맛을 본 템플(성전)기사단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2. 12. 08:50

     

    예루살렘 왕국의 3번째 왕 보두앵 2세 때 탄생한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Poor Knights of Christ and of the Temple of Solomon)이란 이 길고 소박한 이름의 기사단이 이후 '템플(성전)기사단'으로 불리게 된 건 단지 이름이 길어서만이 아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지킨다는 '목적성'이 부각된 것 또한 아니니 그들의 주둔지가 예루살렘 성전산(Temple Mt.) 옛 솔로몬의 성전이 있는 곳이라는 '장소성'이 강조된 말이었다.

     

    보두앵 2세는 1118년 예루살렘 동쪽 성전산을 템플기사단의 주둔지로 제공하였다. 그곳은 본래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곳이니 기사단의 이름과 성격에도 걸맞은 적절한 장소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공교롭게도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했던 바, 기사단의 숙소로 쓰인 바위 돔 사원은 이슬람의 교조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이요, 그들의 마구간으로 사용된 알 아크사 사원은 이슬람 공동체의 2대 칼리프 우마르가 무함마드의 신탁을 기려 건립한 성스러운 곳이었다.(☞ '2대 칼리프 우마르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슬람인들로서 이래저래 눈에 불이 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의 주둔지를 바라보는 보두앵 2세는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그간 복잡하고 꼬였던 일이 이제는 왠지 술술 풀려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2대 칼리프 우마르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슬람 정통 칼리프 시대*의 2대 칼리프 우마르(Abū Ḥafṣ Umar ibn Al-Khattāb, 재위 634~644)는 알파루크( الفاروق, al-Fārūq)라는 경칭이 붙는다.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는..

    kibaek.tistory.com

     

    바위돔 사원(오른쪽)과 알 아크사 사원

     

    그도 그럴 것이 보두앵 2세로서는 이 템플기사단이 오랜 가뭄 끝에 맞이한 단비요,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니 그 대강의 사정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앞서 말한 대로 보두앵 1세가 자신의 형 고드프루아에 이어 예루살렘 왕국의 2대 왕이 된 건 고드프루아에게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는 나이 마흔에 총각으로 죽었다) 보두앵 1세는 쉰셋에 죽었고 결혼도 했으나 에데사 백작령의 수장으로 있던 조카 보두앵에게 예루살렘 왕국의 세 번째 왕위가 돌아갔다. 보두앵 1세 역시 후사가 없던 까닭이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른 사람이 지금의 보두앵 2세인데, 그는 고드프루아나 보두앵 1세와 같은 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예루살렘 공탈전에서 공을 세운 것도 아닌 단지 친척이란 이유 하나로 왕이 되었던 바, 십자군 전쟁이라는 운때가 만든 홍복일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당장의 가장 큰 문제는 부족한 군사력이었다. 그저 명색이 왕일뿐 왕권을 옹위해줄 실군(實軍)이 없었던 것인데, 그 군사들은 충원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즈음에 이르러 십자군 1세대들은 거의가 유명을 달리하였던 바, 유럽에서의 충원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마당이었다. 그러나 성지 회복이라는 목적을 이룬 마당에 새로운 군사들이 들어와 예루살렘 왕국 밑에 복속될 일은 없었다. 군대가 없는 왕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을 터, 이슬람인을 포함한 전 예루살렘 백성들에 대한 결혼의 자유를 선언한 것도 그 같은 다급하고도 애타는 지경의 표현일 것이었다.(인구증가책으로 기독교인과 이슬람인이 서로 결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예루살렘 왕국을 향해 사람들이 꾸준히 몰려왔다. 우선은 전쟁 통에 흩어졌던 그 땅을 중심으로 살았던 이슬람인들이 자리를 찾아 돌아왔고, 유럽에서는 회복된 성지를 순례하려는 기독교인들이 몰려들었다. 이 두 그룹은 보두앵 2세에게는 모두 골치거리였다. 순례객들의 경우, 그들이 흘리고 가는 돈이 국가 수지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거니와(신생 예루살렘 왕국은 별다른 기간산업이나 인프라가 없었던 바 가난을 면치 못하던 처지였다) 라틴 기독교 왕국의 왕으로서 그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을 보호해줄 군대가 없다는 것이었다. 

     

    되돌아온 이슬람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단속하고 교화시키며 예루살렘 왕국에 순종하게 만드는 것 또한 군대의 역할일 터였겠는데, 더욱 큰 문제는 이들이 가끔 떼도적이나 노상강도로 둔갑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대상은 순례객들이었으니 때로는 수백 명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게다가 보두앵 2세는 왕위에 오르기 앞서 에데사 백작령의 수장으로 있었던 바, 가신(家臣)인 조슬랭 드 쿠르트네에게 위임하기는 했으되 그래도 에데사 백작령에의 왕래도 요구되었다.(시오노 나나미는 보두앵 2세의 13년간의 치세는 영토가 있는 그 남북의 땅을 왔다갔다 하다 세월 다 갔다는 식으로 표현하며 아마도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십자군 이야기 2>)

     

     

    예루살렘 왕국과 에데사 백작령(맨 위)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그 민답한 처지가 지속되던 어느 날,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시오노 나나미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고양이는 아니지만 손을 빌려주겠다고 나선 남자들이 나타났다') 프랑스 샹파뉴 지방 출신의 위그 드 파얭과 고드프레 드 생 오메르라는 자였는데, 그들은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한 7~8명의 프랑스 기사들과 함께 성지 순례자 보호에 헌신할 것을 약속했다. 당장은 적은 수였지만 그들이 각자 데려 올 수하들까지를 헤아리면 제법 도움이 될 성싶었다. 보두앵이 그들을 마다할 이유가 있을 리 없었을 터, 뛸 듯 기뻐하며 예루살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성전산의 넓은 평지를 그들의 주둔지로 제공했다. 

     

     

    성전산 과 예루살렘 시내
     성전산의 알 알크사 사원이 마치 요새 같다.

     

    그런데 이들의 성격이 무척 특이했다. 자신들 기사들은 전사(戰士) 이전에 수도사라는 것으로, 따라서 사적 재산을 가지지 않으며 결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금 구닥다리 단어를 빌리자면 싸우면서 일하는 향토예비군, 학생임과 동시에 군인인 ROTC 같은 성격이랄까? 하지만 그들과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은 국가나 왕, 혹은 주교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수도사처럼 오직 로마 교황에게만 예속된다는 것이었다. 수도원이 로마 교황의 직접적인 관할 하에 있으므로 자신들도 그러하다는 얘기였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왕의 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겠다는 말이었던 바, 보두앵 2세로서는 찝찝함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닌 보두앵 2세는 그들의 특별한 요구 조건을 모두 받아주고 칙사 대접을 했다. 그들 기사단 또한 대접에 부응한 행동을 하였으니 기사로써의 용감무쌍은 기본이요, 스스로에게도 청빈, 복종, 순결, 근검을 강요하는 엄격한 생활 자세를 유지했다. 한마디로 성서의 말씀만이 그들을 지배할 수 있었고 나머지 모든 것에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별난 수도사 기사단이 출현한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장작을 갖다 대면 불이 붙을 듯한 건조함과 마른 수건에서 물을 짜낼 것 같은 지독함이 느껴지는 그들 집단의 행동과 강령이었지만 여기까지는 그저 좋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그 건조함과 타이트함이 지나치는 부분도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교도를 보면 즉시 죽인다'는 원칙이었다. 개종을 권한다거나 회개를 기다린다거나 하는 짓 따위는 그들의 사고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바, 이 역시 신명기 등에 실려 있는 헤렘(말살·멸절)을 받들어 원칙으로 삼은 것이었다.  

     

     

    템플기사단에 관한 책의 표지

     

    템플기사단의 문장.  1마리 말에 기사 둘이 타고 있는 문장은 "말 하나를 기사 둘이 탈 정도로 가난함"을 어필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탄 적은 없다고.(말도 안될 뿐더러 잘못하면 말이 죽을 걸?) 

     

    그들의 이미지는 늘 이렇듯 비장하다.

     

    템플기사단의 절제된 행동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들의 흰색 겉옷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와 피갑칠을 한 모습은 신뢰이자 신앙 그 자체였다. 그들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용감하게 싸웠으며 그런 가운데 그 수가 급속히 늘어났으니 9명에서 출발한 인원은 어느새 수 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렇게 10년이 되었을 때 이들은 이미 무명의 전사 집단이 아니었으니 드디어 로마 교황으로부터 공식적인 인가를 받게 되었다. 로마 교황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전체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그들은 예루살렘 왕국에만 머물지 않았으며 어느덧 그리스도교 국가 방위의 절대적인 존재로서 자리매김되어 세계의 중요 성지에 주둔했다. 

     

    더불어 다른 종교를 가진 자들을 말살하는 행위 또한 정당성을 부여 받게 되었으니 훗날 가톨릭 성인의 반열에 오르기도 한 당대의 유명 성직자 베르나르도는 <템플기사단의 서: 새로운 기사단을 찬양하며>라는 글을 써 그들의 공로를 칭찬하며 이교도의 말살 행위는 그리스도교의 기사로서 지당한 행동이라고 옹위했다. 그러자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한술 더 떠 1139년 <완벽한 선물(Omne Datum Optimum)>이라는 칙서를 공표, 템플기사단은 인간에 의해 제정된 속세의 모든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안 되는 특권을 부여했다. 템플기사단은 자신의 위에 정말로 교황만이 존재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무소불위의 위치에 오르게 된 셈이었다. 

     

    이제 그들은 제후의 말 따위는 가볍게 씹을 수 있었으며,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면세권을 가짐은 물론 무장한 채 유럽 내의 국경을 넘나들어도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들의 흰 망토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는 그 자체가 프리패스의 여권이요 비과세의 징표이자 살인 면허였다. 이쯤 되자 템플기사단에 지원하려는 자는 물론, 기부하여 곁불을 쬐려는 자 또한 줄을 서게 되었으니 그들 조직은 위에서부터 말단까지 모두가 자연히 부를 누리게 되었다. 각국의 왕후장상으로부터 귀족의 지위 및 성(城)과 영지를 하사 받는경우도 있었다. 

     

    사서가 전하는 그들 최대 전성기의 숫자는 2만 명으로 십자군 점령 지역인 예루살렘, 트리폴리, 안티오크를 비롯하여 프랑스,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헝가리, 아라곤, 포르투갈,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등 유럽의 전역에 지부를 두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수익 사업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니 수도사(修道舍)인 Templar Houses를 숙박업소로 이용하거나 환전상과 같은 금융업소로 전용하기도 했다. 노상강도의 위험에 노출돼 있던 성지 순례자들은 템플기사단의 유럽 지부에 돈을 맡기고 통장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다시 환전하는 시스템을 이용했는데 이때 거둬들이는 수수료는 노상강도를 뺨쳤다. 예수가 성전을 더럽힌다며 몰아낸 환전상들이 이제는 성전을 점거하고 예수의 이름으로써 장사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1300년경 유럽의 템플러 하우스
    여행자에게 통장을 발행해주는 템플기사단

     

    그들은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운용하여 금·은 등의 귀금속을 밀수하기도 했으며 군사력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방해되는 상인 세력을 찍어 누르기도 했다. 그들에게 그보다 더 쉬운 돈 벌이는 성전 앞에 놓인 헌금함이었다. 템플기사단 초기, 용맹함으로 번뜩이던 그들의 눈매는 이제는 그 돈 통을 노려보고 있었다. 거둬들인 돈은 물론 자신들이 먹고 마시며 부를 축적하는 데 쓰였으나 명목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는 돈이었다. 하나님께서 왜 돈이 필요하시며 그 돈을 어떻게 쓰시는지 모르는 것은 그때도 같았다.

     

    이렇듯 배에 기름기가 끼게 되자 초기의 경건함과 강건함은 자연스레 사라져 갔으니 수도사처럼 하루 7번 기도하고 기사처럼 무술을 연마하던 습관은 언제부턴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수도하는 기사 집단이 아니라 절대 권력을 가진 장사꾼 집단에 다름 아니었으니 그들 지부는 장사 잘되는 프렌차이즈 외식업의 체인점처럼 번졌고 그들을 관리하는 본사의 위세는 가히 21세기 그것의 초기 모델로서 손색이 없었다.(프렌차이즈 정도가 아니라 당시 템플기사단의 상행위를 20세기 다국적기업의 효시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이렇게 막대한 부를 축적한 기사단은 유럽 내에 광활한 영지를 갖고 과수원과 농장을 운영하였으며 독자적인 함대까지 만들어 키프로스를 점령했다. 그들은 자신의 돈을 유럽 정부에 빌려주기도 했으니 템플기사단의 파리 지부는 프랑스 왕국의 비공식 재무성이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들은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때로는 자신들 템플기사단 본연의 임무에 맞는 일을 하기도 했던 바, 유럽 전역에 교회를 짓고 성을 쌓고 요새를 건립했다.  

     

     

    포르투칼 토마르의 그리스도 수도원. 템플기사단이 만든 요새 겸 템플러 하우스였으나 훗날 엔리케 왕자에 의해 수도원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아마도 키프로스를 기반으로 하는 그리스도 천년 왕국을 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신의 뜻에 반하는 그들의 꿈과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부와 목숨을 노리는 간 큰 강도가 유럽 한가운데서 야욕을 드러냈던 것이니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바로 그자였다. 플랑드르, 영국과의 전쟁을 비롯해 타고난 호전성에 상습적으로 주변국과의 전쟁을 벌이던 그는 늘 재정이 달렸던 바, 프랑스 내의 유대인과 템플기사단에게 돈을 빌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는 1307년 10월 13일의 금요일, 프랑스 내의 템플기사단에 대한 체포령과 재산 몰수령을 내렸다. 아울러 교황 클레비스 5세를 겁박해 전 유럽의 템플기사단에 대한 파문과 체포령도 내리게 했다. 그들에게 진 빚을 무효로 함은 물론 그들이 가진 막대한 재산을 빼앗기 위함이었는데, 그 죄목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 3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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