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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없는 의사회' 성 요한 기사단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2. 16. 01:07
앞서 말한 템플 기사단은 가히 십자군 전쟁의 꽃이라 할 만한 존재였다. 그 꽃은 화려하게 개화하여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거의 200년 간이나 그 향기를 뿌렸으나 결국 사그라졌고 멸종했다. 그런데 십자군 전쟁 중에 핀 꽃이 또 하나 있다. 이름하여 성 요한기사단(Order of Saint John)으로 몰타 기사단(Order of Malta), 로도스 기사단(Order of Rhodes), 구호 기사단(Knights Hospitaller), 병원 기사단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들은 놀랍게도 지금도 존속하며 게다가 UN이 인정하는 국가에 준하는 국제법 상의 주체이기도 하다.
이들은 사실 1118년에 설립된 템플기사단보다 먼저 만들어졌고, 기사가 주축이 된 템플기사단과 달리 장사하는 상인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들의 설립목적은 싸움이 아니라 구호로서, 예루살렘 순례자를 위한 진료소를 만들게 해달라는 아말피 상인 마우로의 부탁을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1035-1094)가 가납하며 시작됐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아말피는 지금의 이탈리아 반도에 있던 해양 도시국가로서(베네치아, 피사, 제노바와 같은) 동방무역의 선두주자를 자처하던 나라였다. 위 성 요한기사단의 엠블럼도 본래는 아말피의 문장이었다.
마우로가 예루살렘에 첫 진료소를 세운 것은 1050년경이었다. 예루살렘 성묘교회의 길목인 야파 문 앞이었다. 물론 당시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예루살렘 왕국도 당연히 없었다. 칼리프 무스탄시르가 기독교 순례자들을 위한 진료소의 설립을 흔쾌히 허가해준 이유는 우선은 당시가 평화로운 시기라는 것이 전제되어야겠지만 무스탄시르의 호혜가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무스탄시르는 무슬림의 성지순례처럼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도 성스러운 것이라고 이해했다) 아울러 아말피 상인들의 순수한 봉사정신이 간과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진료소의 초기 의사들은 아말피 가까이에 있었던 살레르노 의학교 출신이 대종을 이루었다.(최초의 의학교라 불리는 곳이다) 그러다 이후 동방무역의 침체로서 국력이 쇠퇴하며 아말피 상인들은 차츰 운영에서 멀어지고 그들의 손을 프랑스 성 요한 수도회에서 대신하게 되었다. 처음의 진료소가 병원 규모를 갖추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그들 또한 마찬가지로 훗날의 이스탄불 병원의 간호사 나이팅게일처럼 국적을 가리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았으니 아직까지는 다윗의 별과 십자가와 초승달(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이 같은 하늘 아래서 평화롭게 공존하였다.
그러던 그들에게 선택적으로 환자를 받아야 할 시기가 도래하였다. 십자군 전쟁이 격화되면서부터 더 이상 그들의 호혜평등의 원칙이 적용되기 힘들어졌던 것이었다. 나아가 그곳의 의료진들도 메스 대신 창을 들어야 했으니 앞서 말한 대로 십자군 1세대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며 예루살렘 왕국 군사력의 공백이 왔던 바, 요한 수도회 사람들 역시 창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왕이었던 보두앵 2세가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처지였다는 것을 '보두앵 2세와 쩐(錢) 맛을 본 템플(성전)기사단'에서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교도는 무조건 죽인다'는 원칙을 가졌던 템플기사단과 달리 이교도 말살을 강령으로 삼지 않았다. 성 요한기사단은 '우리의 임무는 의료를 주축으로써 기독교 성지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준수했으며 흰 망토에 새겨진 붉은 십자가를 뽐내며 걷는 템플기사단과 달리 빨간 바탕에 흰 십자가가 수 놓아진 망토를 여미며 다소곳이 걸었다. 다만 그들은 집에 돌아와서는 음식은 비록 소박하더라도 포도나무나 집안 문장이 디자인된 은접시를 식기로 사용하는 고급진 모습을 보여주었던 바, 이는 요한기사단의 거의가 귀족 출신이라는 풍문을 증거하는 예이기도 했다.
귀족의 자제들이 의학교에 입학해서 의사의 길을 걸으며, 더불어 검약한 기사의 자세를 견지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어쩌면 이것이 혼란의 유럽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인지도 몰랐다.(※ 중세 유럽의 의사들도 우리나라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중인 계급이거나 그보다 조금 난 정도의 신분에 불과했으리라)
그렇다고 그들이 전투를 등한시한 것도 아니었다. 1177년 템플기사단의 단장 외드가 이끄는 80명의 기병이 몽기사르 전투의 선봉에 서서 살라흐 앗 딘의 이집트 대군을 깨뜨린 공적에 비교할 수 있을까는 모르겠지만,* 요한기사단 역시 자신들이 구축한 견고한 성을 바탕으로 한 공성전으로써 여러 차례 이슬람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후로도 그들은 템플기사단과 같은 저돌성을 지양하고 공성전을 택했는데, 크라크 데 슈발리에, 벨부아, 마르카브 등은 지금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 이때 예루살렘 십자군은 4천명, 이집트군은 2만6천명의 대군이었다. 하지만 템플기사단이 분전한 예루살렘 왕국군은 이집트군을 대파하였고, 살라흐 앗 딘은 병력의 90%를 상실한 채 빠른 낙타를 타고 도주함으로써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117년 11월 25일 몽기사르 전투의 예상 밖승리로 예루살렘 왕국은 누란의 위기에서 벗어나며 이집트 아이유브 왕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해 한동안 평화를 구가한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
트리폴리 백작국에 지어진 십자군의 대표적인 요새로 '기사들의 성채'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병력이 부족했던 요한기사단은 이와 같은 견고한 성들을 축조하였는데 해발 750m 위에 지어진 이 '기적의 성'은 이슬람 살라흐 앗 딘의 총공세를 막아낸 성으로서 더욱 유명하다.
폭격당하는 크라크 데 슈발리에
현존하는 가장 온전한 중세시대의 성이라는 평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성은 2012년 8월 성채에 의지한 시아파 반군을 살상하기 위한 정부군의 폭탄 공격을 받았다. 이듬해 7월 유네스코는 성채의 심각한 파손을 확인하고 '위험한 처한 세계유산'에 올렸다.마르카브 성
성 요한기사단이 안티오크 공국에 건설한 요새로, 이들의 축성법은 동시대 유럽의 성채를 훨씬 뛰어넘었던 바, 이후의 십자군을 이끌고 온 리차드 1세 같은 유럽의 왕과 제후들에 의해 벤치마킹된다.보드룸 성
터키 남서쪽 항구 도시 보드룸에 위치한 요새로 성 요한기사단이 '성 베드로 성'(또는 ‘페트로니움’)이란 이름으로 건설했다.또한 그렇다고 그들이 의료행위를 뒤로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슬람 군대와 싸우면서도 순례객들에 대한 의료봉사를 전과 다름없이 이어갔던 바, 이것은 중도에 이념이 변질된 템플기사단과 차별되는 또 다른 요인이다. 그들의 이같은 도덕성은 병원건물의 운영에서도 드러나니, 템플기사단이 성전산의 바위돔 사원과 알 아크사 사원을 숙소와 마구간으로 사용해 무슬림의 분노를 산 반면, 그들은 이슬람 권역의 민가를 개조한 집을 본부로 쓰며 그것을 병원으로 이용했다. 그러면서 주위의 민가를 흡수해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동을 갖추었던 바, 이는 이집트나 투르크에까지 소문이 나 그곳 의사들이 견학 오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요한기사단에 관한 호평은 자연히 많은 희사금을 이끌어내었는데, 템플기사단이 기부받은 돈이나 부동산을 기반으로 국제적인 사업을 펼친 반면, 그래서 '20세기 다국적 기업의 효시'로도 불려지는 반면, 요한기사단은 오로지 병원의 운영과 성채의 건립에만 돈을 썼다. 그들의 후예는 지금도 그때의 이념을 이어 '국가(영토) 없는 의사회'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들은 어쩌면 20세기 MSF(국경 없는 의사회)의 효시일는지 모른다. 성 요한기사단의 청렴은 도덕성이라기보다는 자존감의 표현임직도 하였으니, 시오노 나나미는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성 요한 병원 기사단'의 규칙에 '이교도는 박멸해야 한다' 같은 과격한 문구는 한 마디도 없었다. 또한 아무리 성인의 말일지라도 남이 한 말을 자신들의 근거로 삼지도 않았다. 어쩌면 '성 요한 병원 기사단'은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확인하기 위한 이론 무장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남자들의 집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남긴 글을 보면 '병원 기사단' 기사들의 속마음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것은 '크라크 데 슈발리에' 내부에 있는 회랑을 지탱하는 아치 위에 새겨져 있는 문구다. 원문은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Sit tibi copia, sit sapientia, formaque detur. Inquinat omnia sola superbia, si comitetur”
"네가 유복한 집 출신이거나 머리가 좋게 태어났다면, 혹은 잘 생게 태어났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중 하나라도 원인이 되어 네가 오만하고 건방져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 하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들 해(害)하기 때문이다."
낙서조차 '학식 있는' 사람의 것으로 여겨지던 중세 유럽사회에서 이와 같이 기록한 남자들이 '병원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죽여라! 죽여라!"라고 외치는 템플기사단과는 달랐다.
1187년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한 뒤에도 그들 성 요한기사단은 떠나지 않고 트리폴리와 아르크(아코)를 사수했다. 그러다 1291년 그곳마저 이슬람에 함락되자 템플기사단이나 튜튼기사단 같은 다른 가톨릭 기사단들은 모두 유럽으로 철수했음에도 그들은 가까운 키프로스 섬에 주둔하며 권토중래를 도모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두려워 한 키프로스 왕에 철수의 부탁을 받자 결국 그 섬을 떠나게 된다.
몽골의 황색 바람이 스쳐간 아주 훗날의 이야기지만, 이곳저곳을 떠돌던 그들 성 요한기사단은 그리스 로도스 섬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1522년 그곳을 침공한 오스만 제국 슐레이만 대제의 대군과 1승 1패를 기록하고, 1565년의 몰타 공방전에서는 4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슐레이만 대제의 군대를 패퇴시키는 기적을 연출했는데, 그들이 로도스 기사단과 몰타 기사단이라는 별칭이 생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후 그들은 몰타 섬에 주둔하며 268년 동안(로도스 섬에서 몰타 섬으로 이주한 1530년에서부터 1798년 6월까지)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솔직히 말하자면 해적) 그러던 요한기사단은 1798년 나폴레옹의 공격에 무너져 섬을 빼앗기나 '같은 기독교 군사는 공격하지 않는다'는 강령으로 인해 소극적 대응을 한 것이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을 보면 그들은 끝까지 기사도를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앞서 말한 대로 그들은 아직 건재하며 지금도 전 세계에 퍼져있는 단원들이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다.(약 120국에서 1만3천 명이 활동 중이라는데 지원봉사자도 1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단순한 의료봉사단체가 아니다. 그들은 로마에 '몰타 기사단'이란 이름의 본부를 두고 있는 준국가로서 세계 106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나아가 자국의 헌법은 물론이요, 외교 사절, 자국 등록 선박, 자체 자동차 번호판 등을 갖고 있으며, 자국의 여권(일부 국가에서만 제한적으로 통용되기는 하나)과 우표와 화폐도 발행한다.
이에 그들은 "영토 없는 국가"로 불리기도 하는데, 지금은 로마교황청에서 파견한 추기경이 단장과 국가수반을 겸하고 있다. "영토 없는 국가"인 몰타 기사단은 1986년 실제로 영토를 가질 뻔했다. 스페인 정부가 옛 인연을 생각해 자국의 영토인 몰타 군도의 섬 하나를 떼주려 했다가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던 것인데, 한때 카리브 해로 진출하려고 했던 노력을 보자면 언젠가는 영토를 획득할 듯도 하다. 하지만 이 경우 어느 나라는 부분적으로라도 영토를 잃는다. 이 지구상에서 남극대륙을 제외하고는 주인 없는 땅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분쟁 없이 "영토 있는 국가"가 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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