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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루살렘 왕국의 흥망성쇠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2. 10. 20:58

     

    예루살렘 왕국. 언뜻 많이 들어본 감이 드는 이름의 국가이다. 성직자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천국에의 비유 같기도 하고, 어떤 영화에서 나온 기독교 왕국의 이름 같기도 하다. 이 두 가지는 다 맞는 말이다. 나의 경우, 예루살렘을 천국에 중의(重義)한 설교를 들어본 적도 있고, 11세기 존재했던 라틴 기독교 왕국 예루살렘 왕국을 배경으로 하는 '킹덤 오브 해븐'이라고 하는 에픽 무비를 본 적도 있다. 예루살렘 왕국은 역사에 실재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나라는 과연 얼마나 존속했을까? 우리 인류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가? 그리고 그 존재가 지금도 입에 오르내릴 만큼 가치 있는 나라였을까? 

     

     

    '킹덤 오브 헤븐'의 포스터

     

    말한 대로 그런 나라가 존재했었다. 그런데 이 나라가 인류 역사에서 점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 아무리 길게 잡아도 200년 안쪽이다. 길게 잡았다 함은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1099년부터 1291년 이집트 맘루크 왕조에 의해 수도 아크레를 함락당해 멸망할 때까지의 193년 간을 말함인데, 짧게 잡으면 보두앵 1세가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공식 등극한 1100년부터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이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한 1187년까지의 88년 동안이 예루살렘 왕국의 존속기간이었다.(대개 후자를 이른다) 

     

    예루살렘 왕국의 존립은 이렇듯 길지 않았으나 그 나라가 남긴 인류사에의 족적은 지대하다. 여기서 '지대하다'라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부정적인 측면이 강조된 말이다. 보다 쉽게 말하면, 이 왕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옳았을 나라이니, 그 출발부터가 바르지 못했다. 대강을 말하자면 예루살렘 왕국은 1차 십자군이 건국한 기독교 라틴 왕국으로,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클레르몽 페랑 대성당 연설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연설에서부터 예루살렘 왕국의 건국까지를 앞서 '인류사의 비극이 탄생한 예수탄생교회' 에서 설명한 바 있다. 우선 예루살렘 왕국의 지도와 함께 그 내용을 상기해 보도록 하겠다. 

     

     

    예루살렘 왕국과  1차 십자군이 세운 주변국 지도.

    예루살렘 왕국은 초기에는 같은 십자군에 의해 건설된 에데사 백작국, 트리폴리 백작국, 안티오키아 공국 등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했다.

     

     

    1095년에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자신의 나라가 셀주크 투르크 제국에 의해 침략당하자 서방 교회의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지원을 호소하였다. 교황의 계산과 반응은 빨랐다. 서방 교회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기도 했고, 이 기회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짓눌려 있던 처지를 역전시키고 싶기도 했던 우르바누스 교황은 그해 11월, 클레르몽 페랑 대성당에 서유럽의 왕후장상을 불러놓고 일장 연설을 행했다. 일전에도 말한 바 있는 역사상 가장 우매했던 연설이었다.( ☞ '세계사의 비극 소년 십자군')

     

     

    세계사의 비극 소년 십자군

    신의 계시가 빚은 비극, 소년 십자군 역사적으로 볼 때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은 차고도 넘친다. 그래서 결과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긍정적

    kibaek.tistory.com

     

    "예수 크리스트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성스러운 예루살렘이 저 야만의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했소. 우리 크리스트 제국의 국왕과 제후들은 봉기하여 성스러운 땅 예루살렘을 탈환해 주시오. 이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는 자는 과거의 죄는 물론이요, 앞으로의 살육의 죄까지를 모두 면죄 받게 될 것이오."

     

    이후 이슬람에 점령당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200년 간의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는데, 앞서 여러 섹션에서 언급한대로 이때 출전한 1차 십자군은 군소 영주, 기사 및 농민들로 급조된 십자군 역사상 가장 비조직적인 집단이었으나 내분 중이던 이슬람군 역시 대비가 불충분했던 바,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떠났던 관계로 식량을 비롯한 모든 것이 부족했으니 사람의 인육까지 처먹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슬람인, 유대인, 기독교도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살육을 자행했다. 

     

      

    십자군의 마라 학살 묘사도
    1차 십자군은 안티오크, 마라, 예루살렘 등지에서 이슬람인과 기독교도를 가리지 않는 대규모의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을 뿐 아니라 마라 전투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이슬람인의 인육까지 처먹는다. 위의 그림은 그것을 그렸다.

     

     

    그 절정은 1099년 6월 7일 벌어진 예루살렘 성 전투였다. 그날 오후 예루살렘 성벽을 넘은 십자군은 솔로몬 성전에 집결해 있던 이슬람군과의 최후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들은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이슬람군을 모두 처형하고 성 안의 유대인들 역시 학살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자들의 후손이라는 것이 학살의 표면적 이유였지만 그들의 재산을 탐냈던 것이었다. 그날 예루살렘에는 4만 명의 시체가 곳곳에 산처럼 쌓였으니 이후 이와 같은 종교적 학살은 20세기 홀로코스트 이전까지 없었다.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인하고 방화하고 강간했던 바, 당시 종군했던 한 성직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예루살렘의 성전, 거리, 광장을 가리지 않고 적들의 잘라진 머리와 팔 다리가 쌓여 있어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들 지경이다. 그동안 이교도에 의해 더럽혀졌던 이 신성한 도시는 이제 이교도들의 피에 씻겨 깨끗해질 것이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7월 15일 예루살렘을 완전 평정한 십자군 기사들은 그곳에 주님의 왕국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지도자로 고드프루아 드 부용을 뽑았다. 그는 로렌 지방(현 벨기에) 영주였다는 것 외에 자세한 프로필은 없으나 침략과 학살의 선봉장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였다.(그에 대해서는 아래 '위키백과'의 설명을 참조하면 좋을 듯싶다) 고드프루아는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돌아가신 이곳에서 왕관을 쓸 수 없다"며 왕의 칭호만큼은 거절하고 대신 '성묘(聖墓)의 수호자'라는 이름만을 얻었다.(왕위를 사양한 것이 아니라 분위기상 못 오른 것임) 

     

     

    고드프루아 드 부용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드프루아 드 부용(프랑스어: Godefroy de Bouillon, 1060년경 ~ 1100년 7월 18일)은 십자군 전쟁 중 1차 십자군의 지도 중 한 명으로 예루살렘의 초대 성묘 수호자였으며

    ko.wikipedia.org

      

    1차 십자군의 세 사령관

    왼쪽부터 투르 백작 레몽, 로렌 공작 고드푸르아, 푸리아 공작 보에몽

     

     

    그런데 그때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 예루살렘 공탈의 소식을 들은 로마교황청이 그곳을 교황청의 영지로 헌납하라는 요구를 해온 것이었다.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세속군주가 통치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이것이 교황청의 이유였다. 로렌의 땅과 집을 팔고 동생 두 명에 조카까지 데리고 원정에 임한 고드프루아로서는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으나 솟구치는 분노를 억누르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예루살렘 공함(攻陷)에 모든 것을 걸었소. 따라서 이곳이 교황령이 되면 내가 갈 데가 없소. 이집트를 정벌해 거점이 생기면 그때 돌려주겠소."


    고드푸르아는 약속 대로 이집트 원정에 나섰으나 중도에 급사했다.(1100년 7월 18일로,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독살설부터 온갖 설이 난무한다) 고드프루아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왕국의 두 번째 왕이 된 사람은 그의 동생 보두앵 드 불로뉴(Baudouin de Boulogne)였다. 그는 형과 달리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갖고 왕위에 올라(보두앵 1세) 예루살렘 왕국의 수장임을 선포했으니, 애써 얻은 예루살렘을 돌려줄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110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택해 대관식을 치렀다) 

     

     

    구스타프 도레가 그린 ' 고드푸르아의 예루살렘 입성'

     

    고드푸르아의 동상

    그가  영주로 있던 벨기에(로렌)의 브루쉘 후와얄드 광장에 세워졌다. 그가 십자군 원정에 나섰을 때는 서른여섯, 죽었을  때는 겨우 마흔에 미혼이었다.  

     

     

    보두앵은 고드푸르아가 죽었을 때 에데사에 있었으나 교황청의 시커먼 속을 간파하고 있었다. 교황의 대리인인 대주교 다임베르크가 (종부성사를 빙자해) 고드푸르아의 임종 직전까지 예루살렘을 로마 교회에 헌납하겠다는 유언을 끈질기게 요구했다는 사실과, 고드푸르아가 이를 끝까지 수락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고드푸르아의 부하에게 들어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우리가 갖은 어려움과 죽음을 무릎쓰고 얻은 예루살렘을 날로 먹겠다고?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보두앵은 이를 갈았다. 

     

    보두앵은 국왕 취임 후 대주교 다임베르크와 담판을 가졌다. 보두앵은 그에게 욕심을 좀 작작 부리라며 더 이상의 요구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만일 필요 이상의 요구가 있다면 부정축재와 같은 당신의 독직을 세상 사람 모두가 알게 만들어주겠다는 의지의 표명과 함께였다. 이 또한 고드푸르아의 부하에게 들은 정보였는데, 그러자 대주교 다임베르크가 바로 꼬리를 내렸다. 틈이 보이면 악착같이 상대의 재물을 갈취하려 들지만 세상의 이목은 더 없이 두려워 하는 것이 성직자의 속성임을 익히 알고 있던 보두앵이었다. 그 역시 로렌의 성직자로 있다가 형인 고드푸르아를 좇아 십자군 전쟁에 종군한 자였던 까닭이었다. 

     

    그는 이렇듯 안으로는 교황권과 싸우고 밖으로는 이슬람군과 싸웠다. 이슬람군과의 싸움에 있어서는 남쪽으로는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원정했고, 으로는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티레, 시돈, 베이루트, 트리폴리를 빼앗아 영토를 넓혔다. 그 전쟁에 앞장 선 사람은 십자군 세 사령관 중의 하나였던 푸리아 공작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디였다. 탕크레디는 그에 앞서서도 대소 전투를 이끌던 십자군의 선봉장 같은 사람이었는데, 1112년 12월 역병인 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그때 나이 서른여섯으로 당시로서는 요절이라 할 수 없는 나이였으나 그는 늘 팔팔했던 관계로 청춘으로 죽은 것 같은 애석함을 남겼다.

     

    그의 영웅적 삶은 훗날 시인 타소에게 영감을 주어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을 노래한 유명한 서사시<해방된 예루살렘 Gerusalemme liberata〉(1581) 속에서 젊음의 상징으로 부활했으며, 볼테르로부터는 희극 <탄크레디>가 탄생했고,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에게는 비극의 명작 <탄크레디>를 잉태시켰다.

     

    그 탕크레디의 사후 6년,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왕 보두앵 1세도 세상을 떠났다. 이집트 원정길에서였는데, 어떤 책에서는 그가 카이로를 점령한 후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하다 죽었다고 하고, 어떤 책에서는 이집트를 원정하려고 시나이 반도로 나아갔으나 국경 너머의 엘 아리쉬에서 쓰러졌으며 들것에 실려 돌아오는 도중 죽었다고 했다.(시오노 나나미는 후자의 자료를 참고했는지 <십자군 이야기>에 그렇게 적었고, 또 당시 예루살렘군의 군세로서 이집트 카이로로 쳐들어가는 것은 미친 짓으로서 그저 견제를 위한 원정이었다고 덧붙였다) 

     

     

    구스타프 도레가 그린 ' 보두앵 1세의 죽음'

     

     

    예루살렘  왕국 십자군의 휘장

     

     

    영화 '킹덤 오브 해븐'의 예루살렘  왕국 십자군

     

     

    시오노 나나미는 또 이렇게 썼다.

     

    보두앵은 원래 성직의 세계에 있었으므로 태어난 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성직의 세계에서는 지위가 모든 것을 말해주므로, 그 세계에 들어가자마자 나이는 '무(無)'가 되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의 경우에는 교황이 된 때에 태어난 해가 기록되는데, 그 이외의 성직자는 죽은 해밖에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두앵이 태어난 해도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 1065년 전후에 태어났을 테니,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는 쉰세살 전후였을 것이다. 

     

    그 1118년을 마지막으로 십자군 1세대는 퇴장을 하고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는 에데사 백작령의 수장으로 있던 조카 보두앵에게 이어진다. 이는 보두앵 1세의 유언에 따른 일로, 이로써 에데사 백작 보두앵은 보두앵 2세로서 예루살렘 왕국의 3대 왕이 되고, 그 다음은 특이하게도 멜리장드라는 이름의 여왕의 치세가 출현한다. 이후 이상적인 정치로써 '이상왕(理想王)'으로 불리기도 했던(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보두앵 3세를 거쳐, 한센병으로 인해 아래와 같은 가면을 쓰고 살아야 했던 보두앵 4세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슬람의 위대한 영웅 살라흐 앗 딘이 출현한다. 그 판타스틱한 이야기를 아니 쓸 수 없을 것이다.

     

    * 2편으로 이어짐.

     

     

     

     보두앵 4세의 강렬한 등장
    "안녕하쇼?"

     

    만만치 않은 포스의 살라 흐 앗 딘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리고 잿밥에 더 관심 있는 보두앵의 동생 시빌라(실제로는 한 살 위 누나)
    '그런데 저 괜찮은 남자는 누구지?'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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