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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의 비극 소년 십자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5. 3. 06:02

    신의 계시가 빚은 비극, 소년 십자군

     

    역사적으로 볼 때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은 차고도 넘친다. 그래서 결과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긍정적으로 작용한 경우의 예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오르레앙의 소녀 잔 다르크다. 조국 프랑스를 구하라는 천사장 미카엘의 계시를 받았다는 이 13세 소녀는 잉글랜드와의 오랜 싸움(이른바 백년 전쟁/1337~1453)에서 거의 대부분의 영토를 잠식당한 프랑스를 구해내는데, 그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전투가 바로 잔 다르크의 고향 근방에서 벌어진 오를레앙 성 전투였다.(1419년)

     

    그 소녀가 첫 참전했던 오를레앙 성 전투에서 정말로 신의 계시가 통했는지 프랑스군은 승리했고 이후 잉글랜드를 영구히 섬나라로 쫓아낼 수 있었다. 잔 다르크는 유감스럽게도 그에 앞서 붙잡혀 순국하는데, 이때도 그는 자신이 받았던 신의 계시를 강조했다. 하지만 그의 죄목은 이와 같은 계시가 무색하게 신성모독이었다. 그 두 나라의 종교가 동일했던 까닭이니, 잔 다르크를 신문했던 잉글랜드 왕 헨리 6세는 이렇게 말했다.

     

      "니, 웃기는 가시나 아니가?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나라데이. 니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면 우린 뭐꼬? 니,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증거 있나? 있으면 대보래이. 허면 용서할테니."

     

    잔 다르크에게 특별한 증거가 있을 리 없을 터, 1431년 5월 30일 그녀는 마녀로서 화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는데, 화형대에 묶인 그녀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나를 이 자리에 세운 사람들을 용서한다. 신이시여. 저들이 하루속히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안식할 수 있게 해주소서."

     

    잔 다르크가 이렇듯 경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자 잉글랜드군 내에서는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니(헨리 6세의 부관도 눈물을 보였다고) 이후 잉글랜드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그녀가 정말로 신의 계시를 받았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데, 반면 프랑스군은 오를레앙 전투 후 분위기를 일신해 연전연승하였던 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영토 내의 잉글랜드 땅을 모두 수복할 수 있었다. 

      

    ~ 이 양국의 싸움은 전쟁의 발발에서 종식까지 117년이나 그 기간 동안 줄기차게 싸웠던 것은 아니고 그때 그때 간헐적인 전투가 벌어졌다.(당시는 노르망디를 비롯해 프랑스 본토 내에도 잉글랜드의 영토가 존재했으므로) 다만 전쟁의 시작과 종식의 연도는 그러했던 바, 언필칭 '백년 전쟁'이다.  
     


    백년 전쟁 당시 영국군에 포위된 오를레앙 성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지만,


    기적의 소녀 잔 다르크의 출현으로 기사회생한다.(사진은 파리의 잔 다르크 동상)


    밀라 요보비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영화 '잔 다르크'(너무 재미 없어서 --;;)

     

     

    신의 계시 중 가장 나쁜 결과를 낳은 것은 1212년 프랑스 양치기 소년 에디앵이 받은 계시였다. 이 무렵의 유럽은 이슬람(셀주크 투르크 제국)에 점령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자는 이슈가 집단 히스테리를 창출하던 시절이었다. 그 집단 히스테리의 시작은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누스가 클레르몽 페랑 대성당에 왕후장상을 불러놓고 행한 일장 연설로부터였다. (☞ '예수의 정체에 관한 4가지 질문 I', '중세의 막장 드라마카놋사의 굴욕 II')


    "예수 크리스트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성스러운 예루살렘이 저 야만의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했소. 우리 크리스트 제국의 국왕과 제후들은 봉기하여 성스러운 땅 예루살렘을 탈환해 주시오. 이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는 자는 과거의 죄는 물론이요, 앞으로의 살육의 죄까지를 모두 면죄 받게 될 것이오."(일전에도 말한 바 있는 역사상 가장 우매했던 연설이다)

     

     

    오베르뉴의 클레르몽 페랑 대성당과 우르바누스 교황의 동상



    그것이 이른바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성지 탈환의 지상과제를 짊어진 그 십자군들은 첫 원정 때 일시 예루살렘을 회복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후 3차례에 걸친 원정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던 바, 유럽 사회에도 이 미친 짓을 계속 해야 하느냐 마느냐,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어려운 임무를 자신이 맡겠다며 소년 에디앵이 나선 것이었다. 그 어이없는 자신감의 근거는 그가 받은 신의 계시였다.


    그해(1212년) 여름, 양을 치던 에디앵에게 한 거지 노인이 찾아온다. 그는 신이었고 에디앵은 그로부터 성지 회복의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러자 바로 이때 들판의 양들이 일제히 자신에게 절을 올렸다는 게 에디앵의 주장인데, 그 진실의 여부를 떠나 양들이 절하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하다.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여기서 잠시 그동안의 십자군 전황을 살펴보자면 다음 같다.

     

     

    1차 십자군

     

    1차 십자군은 기사와 농민들로 급조된 역사상 가장 비조직적인 집단이었으나 이슬람군 역시 대비가 없었던 바,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십자군은 이후 그곳에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귀환하지만, 밥 먹듯 학살을 자행한 관계로 역대 십자군 중 가장 잔인했던 집단이라는 오명을 남긴다. 더불어 역대 십자군 중 예루살렘을 정복한 처음이자 마지막 케이스로 남았다.(1099년)


     

    십자군 기사단의 휘장


    십자군의 마라 학살 묘사도

    1차 십자군은 안티오크, 마라, 예루살렘 등지에서 이슬람인과 기독교도를 가리지 않는 대규모의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을 뿐 아니라 마라 전투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이슬람인의 인육까지 처먹는다. 위의 그림은 그것을 그렸다.

     

     

    2차 십자군

     

    2차 십자군은 다마스쿠스 점령이 목표였으나 목적지에 가지도 못한 채 돌아왔고, 그 사이 이슬람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흐 앗 딘(재위 1169-1193)은 오히려 예루살렘을 공탈한다.(1187년) 아이유브 왕조는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왕조인데, 이때 살라흐 앗 딘 역시 신의 계시를 받았음을 천명했다. 아이유브는 꾸란에 나오는 인물로 성서의 욥(Job)에 해당한다.


    이후 술탄 살라흐 앗 딘은 이슬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예루살렘을 공탈하지만,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자행한 잔학행위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는다. 이에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무사할 수 있었는데 이후로도 보여준 여러 휴머니즘으로 인해 유럽 사회에서도 존경의 대상이 됐다. 유럽인들에게는 살라딘으로 불려졌다.(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피폐한 십자군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라스트 신의 그 사람이다. ☞ '킹덤 오브 헤븐으로 가는 길')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 속의 살라흐 앗 딘



    3차 십자군

     

    3차 십자군은 '붉은 수염 왕'으로 불린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존엄 왕'으로 불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사자 왕'으로 불린 영국의 리처드 1세 등, 당대 유럽의 스타들이 모두 참전한 별들의 전쟁으로서 역대 최강의 전력으로 불렸다. 하지만 명색이 무색하게 줄줄이 패하고 리처드 1세만이 살라흐 앗 딘과 평화조약(유럽인의 예루살렘 순례 허용과 안전보장)을 체결하고 돌아온다.(1192년)


     

    3차 십자군 전쟁을 주제로 만든 '킹덤 오브 헤븐'.


    '3차 십자군 전쟁에서의 가장 큰 싸움이던 하틴 전투(1187년)에서 기독교 왕국 연합군은 살라흐 앗 딘이 이끄는 이슬람군에 괴멸당하며 예수가 못박혔다고 하는 '성 십자가'마저 노획당한다.(이 십자가를 앞세우고 싸우면 승리할 줄 알았지만....)


     


    4차 십자군

     

    4차 십자군은 프랑스 기독교 기사단이 주축이 됐으나 베네치아의 장사꾼에게 이용당해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 교회와 민간의 재산을 약탈한다. 이후 동로마제국을 본격적으로 유린해 라틴제국(Latin Empire, 1204 ~ 1261년)을 세우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날벼락을 맞은 동로마황제 알렉시우스 4세는 남쪽의 니케아로 피신해 망명 국가를 세우나 곧 죽고, 그 반 세기 후, 후예인 미카엘 8세가 이슬람 용병의 도움을 얻어 콘스탄티노플을 회복한다.(1261년)

     

    ~ 4차 십자군의 무자비한 약탈과 이들이 세운 라틴제국을 로마 교황청이 추인한 일은 이후 동서 교회의 분열과 갈등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았는데, 그 분열과 갈등은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지난 2004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당시 십자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했으나 동방정교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라틴제국의 영토(붉은 색)

     

       

    대천사 미카엘이 새겨진 라틴제국의 화폐

      

     

    소년 십자군


    본론으로 돌아와 소년 십자군에 대해 말하자면, 에디앵은 이 말 같지도 않은 신의 계시를 떠들며 돌아다녔고, 소문을 들은 소년 소녀들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신의 계시가 있었는지 그 수가 금방 수천 명에 달했다. 아울러 그 같은 기적(?)에 흥분한 각지의 부자들이 돈과 물품을 희사하였던 바, 마침내 1만여 명의 '어린이 십자군(Childen's Crusades)'이 결성되었다.(고아와 부랑자들이 주축이 됐던 그들 소년 소녀들의 가장 연장은 12~13세였다 한다)

     

    국왕 필리프 2세는 이들의 출정을 당연히 허락하지 않았다. 3차 십자군의 지휘관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이 어린아이들의 행동이 그저 기막혔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에디앵은 듣지 않았고, 막무가내로 남쪽 마르세이유 항을 향해 내려갔다. 자신이 바다로 가면 모세의 기적처럼 짠!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닷길이 열리리라는 것이었다. 그가 남쪽으로 가는 동안 아이들은 더 불어났으니 마르세이유에 이르렀을 때는 거의 3만 명에 이르렀다.(이 애들이 다 어떻게 먹고 잤는지 정말 궁금하다)

     

    에디앵은 마르세이유 항에서 바닷길이 열리기를 한없이 기다렸지만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는 없을 터, 대신 그들 앞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마르세이유의 어떤 상인이 자신의 배로 팔레스타인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신에 버금가는 은총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비극은 아이들이 그 7척의 배에 나뉘어 올라 탐으로부터 시작됐다. 그 중 2척의 배가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섬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좌초되며 배에 탔던 어린이들이 모두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구스타프 도레가 그린 '소년 십자군의 출정'.



    비극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머지 5척에 승선한 어린이들은 팔레스타인이 아닌 아프리카 해안으로 갔고, 알렉산드리아의 노예상에게 팔려졌다. 이것이 배를 빌려준 상인의 본래 목적이다. 그렇게 팔려진 그들 소년 소녀들은 이후 이집트 등지에서 뼈저린 후회의 삶을 영위해야 했다. 그런데 비록 뉘늦기는 하였으나 바로 그 이집트에서 진짜 기적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7년 후, 이 어린아이들의 참상을 목격한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카밀이 이들을 노예로부터 해방시켰던 것이다.(1219년)

     

    이에 대해서 유럽의 교황, 혹은 프랑스 국왕과 체결한 평화 협정의 결과라고 쓴 글도 보았으나 그에 관한 근거는 찾기 힘들었고, 대다수의 사료는 이집트의 술탄이 그 어린 노예들을 불쌍히 여겨 해방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 어린이들은 이슬람 술탄의 인도적 배려로 인해 비로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이제는 성인이 되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돌아간 자의 숫자는 700명에 불과했는데, 아무튼 그때 그들을 마주한 카밀은 필시 이렇게 말했을 터이다. 

     

      "와따메. 이 철부지들아. 왜 사서 고생하는겨? 엄마 걱정허겄다. 싸게 집으로 돌아들가드라고."



    에디엥의 소년 십자군을 그린 삽화

    그들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환영하는 사제와 감사의 기도를 수녀를 그렸는데, 반면 왼쪽의 한 어머니는 아이를 껴안고 애통해 하고 있다. 십자가의 예수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스테인드글라스에 남은 소년 십자군

    사제와 수녀가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정말로 정신 나간 것들이다. 

     

    교황 이노센트 3세도 이들을 격려했다.

    "장하도다. 우리가 자고 있는 사이에 소년들이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려 나섰구나. 이 소년들의 용기 앞에 우리들은 정말로 부끄러워지도다."


     

    같은 소년 십자군이 독일에서도 있었다. 같은 해 에디앵의 소년 십자군에 자극받은 쾰른 시의 니콜라우스라는 10세 소년 역시 2만 명의 어린이 십자군을 결성해 라인 강변을 따라 남하했다. 그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갔고, 이후 몇 팀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그 중의 한 팀은 이탈리아 남부 브린디시 항구에 도착했는데, 다행히도 이들은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항구에서 거지 집단의 어린이들을 발견한 이름 모를 사제가 한 끼를 먹인 후 이들을 꾸짖어 귀향시켰기 때문이었다.

     

    당시 어린이들은 모두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그때 극도의 피로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들은 또 옷과 신발이 모조리 헤진 상태였으며 게다가 동상에 걸린 아이들도 부지기수였다. 평소에 입던 복장 그대로 알프스를 넘은 탓이었다.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그 이름 모를 사제는 아마도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 부디 이 시대의 광기를 용서하옵시고 잠재워 주소서. 그리고 저 아이들도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인즉 부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부모 품에 안길 수 있게 해주소서. 다만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구라를 치고 다닌 에디앵 소년만은 절대 용서치 말아 주시오소서. 아멘."

     

    하지만 나머지 어린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니 대부분 노예로 팔렸다. 프랑스 소년 십자군의 지도자 에디앵의 행방을 알 수 없 듯, 독일 소년들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갔던 니콜라우스의 행방 역시 알려지지 않았으나 마찬가지로 노예로 팔렸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니콜라우스의 소년 십자군을 묘사한 그림

    군데군데 보이는 노땅들은 이들을 호위했던 덜떨어진 어른들이다.



                                                        

                                                       


    소년 십자군들의 진로는 이와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저 대단하다는 말밖에.....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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