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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사의 비극이 탄생한 예수탄생교회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10. 17. 03:03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전 세계 교회가 예외 없이 모두 복작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분주한 곳은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탄생교회(Church of the Nativity)일 것이다. 이유는 물어보나마나 그곳이 원래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곳에서 예수가 태어났는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동굴에 교회건물을 지은 후로 지금은 예수의 탄생지로 굳어진 마당이다. 이 교회에 대해서는 앞서 여러 챕터에서 소개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동굴 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화살표가 입구)



    이 교회는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헬레나가 세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이다. 339년 예수의 유적을 찾아 베들레헴에 왔던 헬레나가 현지의 전승을 좇아 세웠다. 하지만 이 건물은 529년 사마리아인의 반란으로 소실되고, 지금 건물은 531년 유스티니우스 황제(재위 527-565년) 때의 것으로서 이후 건물은 수차례의 전란에도 파괴되지 않은 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위에 보이는 건물이 일거에 건축된 것은 아니고 훗날 로마카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등에 의해 증축되었는데, 그와 같은 연고로 지금도 로마카톨릭 교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교회에 의해 구역이 분할돼 있다.



    예수 탄생지 입구

    본래는 문자 그대로 대문짝만한 문이 있었지만 이슬람인들이 말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십자군에 의해 좁은 문이 되었다.

     

    문을 들어가 이와 같은 홀을 지나


    동굴 계단을 내려가면


    예수 탄생지에 이르게 된다.



    꼭 전승을 믿지 않더라도 위 예수탄생교회의 구조는 언뜻 그럴듯해 예수가 이곳에서 태어났음을 믿어 의심치 않게 만든다. 하지만 성서의 내용을 적용하면 이곳은 오히려 예수의 탄생지하고는 거리가 멀어진다. 앞서 '예수는 언제 태어났는가 III'에서 설명한 대로 예수 탄생 스토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크게 다르지만,(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없음) 그 어느 쪽도 동굴은 언급되지 않는다. 확인을 하자면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태어난 곳이 '집'이고,(2장 11절) 누가복음에서는 '구유'이다.(2장 7절, 12절, 16절)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가 태어난 곳은 민가이거나, 최소한 마구간의 형태를 갖춘 집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은 분명 집으로 들어가 탄생한 아기를 목도한다. 누가복음에서는 그저 '구유'라 언급됐을 뿐 마구간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그곳이 마구간일 것이라는 상상은 어렵지 않다. 물론 지하동굴 속에 마구간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역사적으로 그런 예는 극히 희소했을 것이고 당시 생활습관하고도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시절 마구간은 어디에 존재했을까?



    재현된 1세기 이스라엘인의 집

    메사츄세스 케임브리지, 하바드 셈학(學, semitic) 박물관에 '야훼의 집'이란 이름으로 재현되었다.



    예수 시대, 유대 지방의 서민 집은 대개 위와 같은 형태로서 1층에는 마구간, 주방, 창고를, 2층에는 주거공간을 두었다.(예수 시대인 로마 시대뿐 아니라 중세기까지도 이러했다) 평수가 넓은 집에서는 2층에 따로 손님방(Karalyma)을 만들거나 다락방에 나그네들을 유숙시키기도 했는데, '첫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누가복음 2:7)는 내용인즉 2층에 빈 방이 없어 1층 마구간에서 출산을 하게 되었다는 해석이 적합할 듯하다.


    ~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의 가축은 민간의 중요한 재산이었으므로 외진 마구간에 두어 방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당시의 가축은 요즘의 팻(Pets) 개념으로, 그렇게 보면 마구간 탄생이 결코 비천하거나 비참한 것은 아니다.



    나자렛에 재현된 고대 이스라엘인의 집



    요셉 부부가 찾았던 집은 필시 이와 같았으리라.



    이상을 보자면 예수의 탄생지가 지하동굴이라는 가정은 더욱 멀어지게 되어 위 예수탄생교회는 별 의미 없는 장소가 돼버린다.(여기서 논할 것은 아니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안치됐었다는 예루살렘 성묘교회도 헬레나가 전승을 바탕으로 세운 것인데, 이 역시 예수의 무덤 자리일 리 만무하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보두앵 1세(Baldwin I, 830-879)가 이곳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110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로, 그가 이곳으로 장소를 정한 이유와 날짜를 택한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예루살렘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ur)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부활 전까지 안치됐다는 곳에 세워진 교회 건물이나 당시의 것은 아니고 십자군에 의해 건설되어진 것이다.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왕 고드푸르아와 2대 왕 보두앵 1세 등이 이곳에 묻혔다.



    1095년 11월, 서방 교회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교황 우르바누스는 클레르몽 페랑 대성당에 서유럽의 왕후장상을 불러놓고 일장 연설을 행했다.


    "예수 크리스트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성스러운 예루살렘이 저 야만의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했소. 우리 크리스트 제국의 국왕과 제후들은 봉기하여 성스러운 땅 예루살렘을 탈환해 주시오. 이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는 자는 과거의 죄는 물론이요, 앞으로의 살육의 죄까지를 모두 면죄 받게 될 것이오." (일전에도 말한 바 있는 역사상 가장 우매했던 연설이다)  

     

    이후 셀주크 투르크 제국에 점령당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200년 간의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는데, 앞서 여러 챕터에서 언급한대로 이때 출전한 1차 십자군은 군소 영주, 기사 및 농민들로 급조된 십자군 역사상 가장 비조직적인 집단이었으나 이슬람군 역시 대비가 없었던 바,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떠났던 관계로 식량을 비롯한 모든 것이 부족했으니 사람의 인육까지 처먹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슬람인, 유대인, 기독교도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살육을 감행했다.


     

    십자군의 마라 학살 묘사도
    1차 십자군은 안티오크, 마라, 예루살렘 등지에서 이슬람인과 기독교도를 가리지 않는 대규모의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을 뿐 아니라 마라 전투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이슬람인의 인육까지 처먹는다. 위의 그림은 그것을 그렸다.



    그 절정은 1099년 6월 7일 벌어진 예루살렘 성 전투였다. 그날 오후 예루살렘 성벽을 넘은 십자군은 솔로몬 성전에 집결해 있던 이슬람군과의 최후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들은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이슬람군을 모두 처형하고 성 안의 유대인들 역시 학살 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자들의 후손이라는 것이 학살의 표면적 이유였지만 그들의 재산을 탐냈던 것이었다. 그날 예루살렘에는 4만 명의 시체가 곳곳에 산처럼 쌓였으니 이후 이와 같은 종교적 학살은 20세기 홀로코스트 이전까지 없었다.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인하고 방화하고 강간했던 바, 당시 종군했던 한 성직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예루살렘의 성전, 거리, 광장을 가리지 않고 적들의 잘라진 머리와 팔 다리가 쌓여 있어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들 지경이다. 그동안 이교도에 의해 더럽혀졌던 이 신성한 도시는 이제 이교도들의 피에 씻겨 깨끗해질 것이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7월 15일 예루살렘을 완전 평정한 십자군 기사들은 그곳에 주님의 왕국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지도자로 고드푸르아 드 부용을 뽑았다. 그는 프랑스 로트링겐의 영주였다는 것 외에 자세한 프로필은 없으나 침략과 학살의 선봉장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그는 영지였던 로트링겐의 땅을 팔고 십자군에 뛰어들었다고 하는 바, 한탕을 노린 야심가였음에 틀림없다) 고드프루아는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돌아가신 이곳에서 왕관을 쓸 수 없다'며 왕의 칭호만큼은 거절하고 대신 '성묘(聖墓)의 수호자'라는 이름만을 얻었다.(왕위를 사양한 것이 아니라 분위기상 못 오른 것임)



    1차 십자군의 세 사령관

    왼쪽부터 투르 백작 레몽, 로트링겐 공작 고드푸르아, 푸리아 공작 보에몽



    그런데 그때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 예루살렘 공탈의 소식을 들은 로마교황청이 그곳을 교황청의 영지로 헌납하라는 요구를 해온 것이었다.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세속군주가 통치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이것이 교황청의 이유였다. 고드프루아는 솟구치는 성질을 꾹 밟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예루살렘 공함(攻陷)에 모든 것을 걸었소. 따라서 이곳이 교황령이 되면 내가 갈 데가 없소. 이집트를 정벌해 거점이 생기면 그때 돌려주겠소."


    고드푸르아는 1100년 약속대로 이집트 원정에 나섰으나 도중에 급사했다.(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독살설부터 온갖 설이 난무한다) 고드프루아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왕국의 두 번째 왕이 된 사람은 그의 동생 보두앵 드 불로뉴(Baudouin de Boulogne)였다. 그는 형과 달리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갖고 왕위에 올라(보두앵 1세) 예루살렘 왕국의 수장임을 선포했으니, 애써 얻은 예루살렘을 돌려줄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보두앵은 안으로는 자신에 반대하는 귀족들 및 교황권과 싸우고 밖으로는 이슬람군과 싸웠다. 이슬람군과의 싸움에 있어서는 남쪽으로는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원정했고, 으로는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베이루트, 투로, 시돈을 빼앗아 영토를 넓혔다.(그가 싸우는 목적은 영토의 확장보다는 교황권에 대한 힘의 과시에 있었던 듯)



    레바논 시돈(지금의 Saida) 바닷가의 옛 십자군 성채

     


    (시작은 예루살렘 공탈전이었지만) 유럽 기독교도와 중동 이슬람교도 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 건 바로 이때부터였다. 예루살렘 왕국이라는 기독교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인의 피가 요구되었으며, 이슬람 역시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서는 기독교도의 피가 요구되었던 바, 2001년 저 유명한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학자들은 대부분 그 원인의 뿌리를 십자군 예루살렘 원정에서 찾았다. 두 문명 충돌의 시작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인데, 좀 더 들여다보자면 그 뿌리는 보두앵의 예수탄생교회 대관식에 있다.


    ~ 보두앵은 1118년 카이로를 점령한 후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하던 중 병사하였고, 예루살렘은 1187년 이집트의 살라딘에게 다시 빼앗긴 후 760년 간을 이슬람이 점령하였다. 지금은 하나님의 장난으로 또 사정이 바뀌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공화국이 실질 지배하고 있지만 무함마드가 승천한 바위돔 사원은 아직 굳건하다.(☞ '하나님이 장난친 도시 예루살렘 I, II' 참조)





    거짓말 같았던 9.11 테러

    이 광경을 놀라 지켜보던 게 어제 같은데 벌써 18년이 흘렀다.

     

    예수탄생교회 앞의 총을 든 팔레스타인 전사

    예수가 탄생한 날에는 매양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외치지만 이 땅에 아직 평화는 오지 않았다. 예수께서 긴 잠에서 깨어날 날은 그 언제일는지.....



    구스타프 도레가 그린 '보드앵 1세의 죽음'



    성스러운 땅, 베들레헴과 예루살렘
    위의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와 예루살렘 성묘교회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하는 두 곳이다. 예수탄생교회는 지금 팔레스타인의 영토 내에, 성묘교회는 이스라엘 내에 있다. 그래서 그 두 곳의 호텔들이 성지순례객을 유치하기 위해 박터지게 경쟁하고 있는데, 웃기는 건 두 나라 모두 기독교하고는 전혀 상관 없는 이교도의 나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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