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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교회(The Orthodox Church)의 역사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10. 20. 06:00

     

    정교회(正敎會)라는 단어는 'The Orthodox Church', 즉 정통교회라는 뜻을 가진 문장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여기서 '정통'이라 함은 당연히 서방교회(카톨릭)를 겨냥한 말로, 까닭에 정교회는 대개 동방정교회로 불리운다.* 솔까 카톨릭과 정교회가 크게 다른 것은 없다. 아울러 정교회가 작년 2018년을 기점으로 1천년 만에 러시아 정교회와 콘스탄티노플 총대빵교회로 분리되었다고 해서 세계 언론이 한바탕 떠들석했지만,(우리나라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그들은 더더욱 다를 게 없다. 


    * 하지만 정교회 사람들은 동방정교회라는 명칭을 반기지 않는다. 자신들의 정교회가 동방에 국한된 종교라는 뉘앙스가 싫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정통'의 또 다른 뜻은 개신교, 천주교(카톨릭), 정교회의 3대 그리스도 종파 중의 으뜸이라 는 것이나 정교회 신자가 드문 우리나라에서는 역시 생소하게 들린다. 


    그럼에도 그들이 독립과 분리를 지향하는 것은 어찌보면 국가의 독립과 분리와도 유사하다. 즉 지역적 언어와 문화의 차이, 그리고 정치적 이해가 맞물려 있는 것이다.(의외로 사상적인 면은 개입이 적다) 이것은 동·서 교회라는 말 자체가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열의 역사는 AD 1세기까지, 즉 예수가 죽고 기독교가 탄생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또한 기독교의 지역 헤게모니가 원인이었다. 일단은 그것을 조금 살펴보자.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포교의 자유를 얻은 기독교는 이후 날개를 달고 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국교화 선언으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명실상부한 간판 종교가 되었지만,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고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제국의 영역을 반띵함으로써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분리되게 되었고, 이에 기독교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뉘게 된 것이었다.



    동·서 로마와 기독교 5대 교구



    물론 당시까지는 기독교 5대 교구가 모두 세력을 나눠 가지던 시절이라 그 갈등이 첨예하지 않았다. 지도에서 보다시피 오히려 교인의 쪽수는 동방이 더 많았던 듯 그쪽에 더 많은 교구가 설치됐다. 그러나 7세기 사라센 제국의 세력이 강해지며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크 지역을 빼앗겼고, 이와 같은 이슬람의 발호에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을 위시한 서유럽 나라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었던 바,(십자군 원정이 대표적) 동방교회도 자연히 로마교회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물론 앞서 말한 사상적 갈등, 즉 예수의 정체에 대한 해석도 한몫을 했다.(☞ '삼위일체의 진실 II - 황제가 만든 신 예수') 즉 예수가 신의 아들이냐, 신성을 가진 사람의 아들이냐를 놓고 벌인 한 바탕 싸움은 결국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 즉 예수를 하나님과 동질로 여기는 삼위일체설로 결론이 났지만(☞ '창세기의 수수께끼 단어 '우리',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서 II') 당시 일부 동방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니, 이에 관한 앙금은 8세기 성상숭배금지령*과 9세기 포티우스 분쟁으로 불거져 나온다.


    *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는 출애급기 십계명에 의거, 예수나 성인들의 모습을 새긴 성상(聖像)의 사용을 우상 숭배라 하여 금지시켰다. 하지만 서로마 교회에서는 게르만족과 같은 이민족에 대한 포교에 유리하다는 이유 등을 내세워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후 성상숭배 문제는 지금까지 동·서교회의 분란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서로마교회 교황청의 자부심은 사도 전승, 즉 자신들이 사도 베드로의 후예라는 것으로, 그와 같은 정통성을 가진 자신들이 동로마 황제의 명령을 들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반면 동방정교회에서는 지금껏 성상은 우상숭배라는 생각을 견지하며 성화만을 기독교 예술의 장르로 삼고 있다)


    855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 오른 포티우스는 필리오케(Filioque, '성자로부터')라는 단어의 사용을 두고 교황과 크게 충돌했다. 필리오케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모두 발현한다는 의미로서, 로마교황 니콜라오는 불가리아 지역에 포교를 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고, 이에 포티우스는 이러한 교리가 이단이라며 교황의 폐위를 벼른다. 그들의 교리 논쟁은 설명해봤자 사실 그게 그거고, 동방교회의 관할권에 내에 있는 불가리아 지역에 로마교황이 침을 바르자 이를 꼬투리를 삼아 반발했다고 보면 이해가 쉽겠다. 그런데 포티우스가 로마교황과 틀어진 것은 기실 그전부터의 감정 때문으로 그 과정이 헨리 8세의 막장드라마를 뺨친다.(☞ '성공회의 역사')


    당시의 동로마 황제는 바르다스였다. 그는 자신의 며느리와 눈이 맞아 본부인을 버리고 며느리와 결혼하려 했으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이그니티우스는 그들의 이혼을 불허했을 뿐 아니라 크게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열이 받은 바르다스는 이그니티우스를 해임하고 자신의 측근인 포티우스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 임명했다.(포티우스는 성직자 출신도 아니었음에도) 그러나 이그니티우스는 퇴임을 거부하며 버텼고, 이에 좌불안석의 포티우스는 로마교황청에 뇌물을 보낸 후 이그니티우스의 퇴임을 종용하도록 로비했다. 하지만 교황 니콜라오는 돈만 받아먹고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고, 포티우스가 재촉하자 오히려 파문시키겠다 을러대는 양아치 전법을 구사했다. 


    로마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역사상 최초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교황 니콜라오는 이곳 집무실에서 포티우스의 뇌물을 전달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총대주교 자리에 오른 포티우스는 불가리아에 침을 바르는 교황에 또 다시 열받는다. 그리하여 그는 이탈리아 황제 루트비히를 사주해 교황 니콜라오를 몰아내지만 포티우스 역시 자국의 변란에 휩쓸려 실각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877년 두 번째로 총대주교의 자리를 꿰차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로마교황 요한 8세의 지지를 등에 업고 나타난다. 하지만 877년 또다시 내란죄로 유폐되어 아르메니아 벽지의 수도원에서 숨을 거둔다.(이상 포티우스의 박쥐와 같은 일련의 행동들은 동·서 교회의 알력과 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음에도 그는 사후 동방정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되었던 바, 2월 6일이 그의 축일이라고 전해진다)


    본격적으로 동·서 교회가 분열하게 된 것은 1204년에 일어난 십자군의 4차 원정이었다. 앞서 소년 십자군을 다루면서 언급했지만 4차 십자군은 1차 십자군과 더불어 십자군 원정 사상 가장 개같은 경우였다. 그들은 베네치아의 장사꾼에게 이용당해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는데, 뿐만 아니라 정교회 성당의 제단 장식물과 십자가, 심지어 성인들의 관을 열어 그 유골을 훼손하고 부장품들을 싹쓸이했다. 나아가 그들은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라틴제국(1204년부터 1261년까지 존속)이라는 신생국을 건국,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그 뒷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 날벼락을 맞은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4세는 남쪽의 니케아로 피신해 망명 국가를 세우나 곧 죽고, 그 반 세기 후, 후예인 미카엘 8세가 이슬람 용병의 도움을 얻어 콘스탄티노플에 입성, 동로마제국을 회복시킨다.(1261년)  도움을 주겠다고 온 기독교 군대들은 오히려 동로마제국을 멸망시켰고, 철천지 원수인 이슬람인은 고토 회복에 도움을 주었던 바,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이와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보면 정말로 기독교에 대해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로마교황청이 이 불법적인 라틴제국 추인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04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당시 십자군이 저지른 만행과 제국의 승인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했으나 동방정교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라틴제국(Latin Empire)과 니케아 제국(동로마 제국의 망명 정부)

    라틴제국 주변 나라들도 동로마제국의 왕족들이 세운 망명 국가다. 


    라틴제국의 화폐

    라틴제국은 무분별하게 통화를 발행했던 관계로 짧은 존속기간에도 불구, 많은 화폐가 남아 있다.



    라틴제국의 휘장



    이와 같은 만행은 이후 동방교회에 반(反) 로마교회 감정을 야기시켰고, 15세기 피렌체 공의회에서의 유화 제스처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역사는 전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으니,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황제 메흐메트(메메트) 2세에 의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며 동로마제국은 1,100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드라큘라 백작의 억울한 누명 II') 이리하여 동방교회의 영역이 전부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영구적으로 동·서 교회가 나뉘게 된다.


    이때 동방교회의 명백을 유지시킨 나라는 러시아였다.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 선교사들이 러시아에 전파한 기독교는 988년 블라드미르 대공이 다스리는 키예프 공국의 국교가 되어 성장하였던 바, 러시아정교회는 거의 동방정교회의 대명사처럼 불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 러시아정교회는 주변 군소 국가 정교회에 우선하는 총대빵교회로 군림하였으나, 1721년 이후 개혁군주 표트르 대제의 탄압을 받았고 1918년 이후로는 공산소비에트 정부의 대대적인 압제에 시달리게 된다. 이후 주변의 군소 교회들은 러시아 중앙교구와 접촉할 수 없게 되었던 바,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하여 그리스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라는 이름으로 뭉치게 되었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조지 교회

    동방정교회의 중심교회로서, 이곳에 있는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는 세계 정교회를 대표하여 세계 총 대주교라 불리나 명예상의 직분일 뿐 치리(治理) 권한은 없다.



    러시아는 스탈린의 종교 유화정책 이후 차츰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예전 만큼의 장악력을 갖지 못하고 콘스탄티노플 그리스정교회로 예속되게 되었다.(러시아인의 완전한 종교의 자유는 1990년 10월 고르바초프 정부 하에서 주어졌다) 하지만 러시아정교회는 작년 10월 15일 회의를 갖고 스탄티노플 총 대주교청과의 결별을 선언했는데, 그 배경에는 2014년에 일어난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이 있다. 우크라이나 교회는 원래 러시아정교회의 예하에 있었으나 러시아에 크림반도를 강탈당하자 러시아정교회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이에 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교회 독립을 승인함으로써 결국 러시아의 감정을 사게 된 것이었다.


    이로써 개신교와 카톨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교세가 큰 동방정교회는(약 3억 명) 스탄티노플 그리스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로 나뉘게 되었는데, 러시아 정교회 신도 수는 2,500~5,000만 정도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는 1987년 주한 러시아공사였던 볼랴노프스키가 본국에 사제 요청을 하여  1900년 초대 교선사 세헵콥스키가 서울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고, 한국정교회란 이름으로 불린다. 현재 전국에 7개의 성당과 2개의 수도원을 두고 있으며 스탄티노플 총 대주교청에 속해 있는 대교구이다.


    ~ 본당은 마포에 있는 한국정교회 대성당으로, 1968년 설립됐다고 한다. 그 인근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녀 예전에도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당시는 건물 색깔도 짙은 초록색으로 우중충했고 분위기도 우중충했다.(흡사 유령의 집처럼) 그러나 요즘은 러시아인들이 많이 입국하며 상당히 활기를 띠는 듯 보였으니 분위기도, 건물색도 매우 밝아졌다. 발상을 비약하자면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우리나라 정교회 인구는 개신교를 능가했을는지 모른다.


    ~ 지난 주말, 내가 한심한 발상이라고 개탄했던(☞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 '고종의 길'이 결국 복원됐다 하여 가 봤는데, 러시아 공사관까지 간 김에 애오개에 있는 한국정교회 대성당을 다녀왔다.(덕분에 사진이 어둡다. 사람 좋게 생긴 연로하신 러시아 신부님이 내일 세계 음식축제를 한다며 점심 먹으러 오라고 했는데, 결국 가지 못했다. ^^ 그 신부님이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로 한국정교회의 대빵이라고 한다) 



    예전 기사




    고종이 야반도주한 길


    안내문


    고종이 빠져나간 문. 

    고종은 궁녀의 옷으로 변복하고 이 이름 모를 문을 빠져나와 아관(俄館,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이 문을 나서면 곧 아관과 만난다.


    고종이 도착한 러시아 공사관

    공사관 건물은 6.25 전쟁 중 불타고 지금은 전망탑 하나만 남았는데, 1903년 고종으로부터 대지를 하사받아 지어진 정동 니콜라스 성당도 이 근방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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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정교회 본당 외관

    1968년 건립된 108평의 비잔틴 양식 교회당으로, 이 건물 역시 성 니콜라스 성당으로 명명됐다.


    서울경제신문 DB 사진 


    알렉산드리아 정교회 건물과 닮은 꼴


    열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와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정했다고 러시아 언론들이 보도했다. 러시아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불법적 결정이 시행되는 한 우리는 분열을 초래한 교회와 교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866023.html#csidx3dcf4f1a033c89fa6a196b61f6fcca9

    모스크바 '구세주 크리스트 대성당'
    러시아 정교회의 본당으로 러시아 혁명 중 파괴된 것을 최근 복원했다.

    성 바실리 대성당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당은 본당보다 붉은 광장 내에 있는 성 바실리 대성당이 유명하다.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 이반 4세의 명령으로 1555년 착공되어 1560년 완공됐다. 바실리카와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외양을 지니고 있는데, 건물이 완공된 후 다시는 이같은 아름다운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건축가의 눈알을 뽑아버렸다는 살벌한 전설이 전해진다. 지금 이 건물은 박물관으로 쓰인다.


    한국정교회 암브로시오스 대주교(크리스턴 투데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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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