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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세기의 수수께끼 단어 '우리',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서 (II)
    성서와 UFO 2017. 10. 8. 17:18

     

      2. 새로운 이단 마케도니우스파의 등장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로서 아리우스파가 물러난 이후 교계는 잠시 잠잠하는 듯했으나, 4세기 중반 그리스 반도의 마케도니아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마케도니우스파가 나타나게 된다. 그 파의 주장은 성부와 성자의 동질성은 인정하겠으되 성령은 이에 종속된다는 것이었다. 즉 성령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로써 히브리서 1장 13-14절에서 언급된 천사와 같은 유형의 중간 존재이며, 그리스도의 시종으로서 권력과 능력면에서 그리스도 밑에 종속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터키 카파도키아 교회의 교부들에 의해 반박 당했던 바,(카이사에라의 바실리우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등) 이를 정리하기 위한 종교회의가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다. 여기서 마케도니아파의 주장은 최종적으로 이단으로 판결되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질이라는 이른바 삼위일체설의 기반이 마련되었는데, 사실 이는 종교적인 면보다는 정치적 색채가 두드러진 판결이었다. 


    왜냐하면 이 회의는 로마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후의 첫 공의회였고, 이 공의회가 내놓은 법령들 가운데는 '이제는 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로마이기에' 로마 주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주교들에 우선하는 명예를 콘스탄티노플 주교에게 부여한다 내용의 법령이 또한 중요하게 다뤄졌던 까닭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가 기타 지역의 주교들을 제압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회의였던 바, 마케도니우스파의 몰락은 어쩌면 예정된 결과일는지 모를 일이다.(실제로 이 공의회에는 약 150명의 동방교회 주교들만 참석하였으므로 그 결과는 회의 시작 전에 이미 판명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묘사한 그림.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의 중심'이라는 법령을 강조했다. 




    공의회가 열렸던 하기야 이레네 성당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지어지고 유스티니우스 1세 때 재건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슬람 사원으로 이용되지 않았고 이후 박물관으로 사용되어져 동로마 제국 초기의 건축 형태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


      

     3. 또 다른 이단자 네스토리우스


    네스토리우스(?-450?)는 페르시아 지방에서 태어나 터키 안티오크 교회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크 근방의 성 유프레피우스 수도원의 수도사로 있다가(그는 거기서 좋은 목소리를 바탕으로 한 빼어난 설교로 이름이 높았다 한다) 428년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공석중인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그 자리를 노리던 알렉산드리아 교파는 자연히 네스토리우스의 반대파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네스토리우스도 이를 의식한 듯 4월 10일의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일성을 토해냈다.


       https://2.bp.blogspot.com/-r5hUSuvqRwQ/VrDo6F3nc_I/AAAAAAAAALY/yzN9gpefPZA/s1600/Nestorius.jpg


      “황제시여. 당신이 이 땅에서 이단자들을 확실히 몰아내주신다면 나는 당신을 천국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그 은혜를 갚겠나이다.”


    오도시우스 황제 역시 이에 화답하여 다음 달인 5월 30일 이단자 척결의 칙령을 내렸던 바, 네스토리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대대적으로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하지만 숨죽이며 지내던 알렉산드리아파에게도 기회는 찾아왔으니,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에 올 때 데려온 전속사제 아나스타시우스가 그해 성탄절에 즈음해 한 크리스토코스(Christokos)에 관한 설교를 문제 삼았다.


    크리스토코스는 '크리스트를 잉태한 사람'이란 뜻의 라틴어로, 아나스타시우스는 설교에서 이를 주장하며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테오토코스(Theotokos: 신을 잉태란 사람)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피력했다. 지금으로서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때까지도 예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구분 짓고 있던 안티오크 교단에서는 매우 올바른 주장이었다. 즉 예수는 신성을 지닌 사람의 아들이라는 ‘크리스트 이성설(二性說)’을 신봉하던 안티오크 교회였던지라 마리아의 비성모설(非聖母說)은 당연한 주장일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하나님 크리스트 동질설이 이미 정립된 알렉산드리아파에서는 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주교 키릴루스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정정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고, 오히려 크리스트 이성설을 주장하는 가르침조의 답신만을 접해야 했다. 즈음하여, 자기에서 징계를 받은 성직자들이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쳐 네스토리우스 밑으로 들어갔다는 사실 또한 그를 격분케 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키릴루스는 마침내 칼을 빼들었다. 로마 총주교(교황)인 켈레스티누스에게 몰래 네스토리우스의 설교문과 편지를 보내 자신에 대한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켈레스티누스도 네스토리우스에게 감정이 있었던 바, 원죄와 구원에 관한 교리 문제로 로마에서 파문당한 펠라기우스*의 제자들을 네스토리우스가 받아주어 비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까닭이었다. 이에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네스토리우스 협공에의 합의를 볼 수 있었다.


    * 영국 출신의 수도사(354-418?). 사제는 아니었으나 사상가로서, 영혼이 구원 받는 데 있어 신의 은총보다는 인간의 노력이 우선된다는 주장으로써 많은 지지를 얻었고,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부정하였다.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켈레스티누스 교황은 먼저 네스토리우스의 설교문을 당대의 유명한 신학자요 수도원 조직가인 카시아누스에게 보내어 분개시킨 후, 제 편들을 데리고 가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를 공박해줄 것을 요청했다. 카시아누스는 그 명을 받아들여 430년 8월 사제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신들만의 공의회를 열어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했다. 말하자면 정식 공의회의 예행연습 같은 것이었다. 키릴루스는 키릴루스 대로 공작을 꾸몄던 바, 알렉산드리아 교구 내에서 파면을 당했거나 자신에게 밉보인 교구장들을 불러들여,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를 공박하면 파면을 면케 해주겠다는 당근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이들보다 한 수 높았다. 첩보를 통해 이와 같은 움직임을 인지한 그는 황제를 움직여 이들보다 먼저 공의회 개최권을 따냈다. 그리고 자신의 대변자로서 안티오크의 주교 요한네스를 내세웠는데, 그는 신학자로서는 물론이요 변설가로서도 이름이 높던 명망있는 자였다. 네스토리우스의 용의주도함은 이렇듯 유명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으니, 일전 키릴루스에게 징계당해 자신에게 온 알렉산드리아 성직자들을 전방에 포진시켜 키릴루스에의 역공을 준비했다.  


    이렇듯 양 팀의 칼날이 팽팽히 대치한 가운데 431년 6월 7일 성령강림일에 운명의 에페수스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나름 방구 깨나 뀌던 주교와 사제 1,800명이 저 마다의 명운을 걸고 모인 대집회였다. 그러나 짙은 전운(戰雲)이 무색하게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날 네스토리우스 측의 변설자로 나설 예정이던 안티오크의 주교 요한네스가 참석하지 못한 것이었다.(발을 다쳤다는 설도 있고, 시리아 오론테스 강이 범람해 건너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당사자인 네스토리우스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궐석했던지라 당사자도 대리인도 없는 재판은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재판관 격인 황제측 인사들 역시 공의회의 연기를 양쪽에 권고했다.


    네스토리우스 측은 아쉬울 게 없었다. 키릴루스 역시 연기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로마 총주교 켈레스티누스가 보내준다던 교황청 사람들도 웬일인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측근인 에페소스의 주교 멤논이 공의회의 속개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네스토리우스 측의 변설자로 나설 요한네스의 입심을 익히 알고 있었던 바, 그가 없을 때 재판을 끝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에 약간의 말미를 준 22일, 드디어 공의회가 시작되었다.


    회의는 키릴루스 측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네스토리우스 측에서는 키릴루스와 멤논의 공격을 막아 낼 사람이 없는 까닭이었으니 이제 이 재판은 끝난 듯도 보였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드디어 네스토리우스의 유죄가 확정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안 올 것 같던 안티오크의 주교 요한네스가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비록 늦게 도착했어도 요한네스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는 화려한 연설로써 금새 좌중을 휘어잡는가 싶더니 주체측인 황제의 사람들을 움직여 따로 대립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지금까지의 결과를 뒤집는 새로운 판결을 이끌어냈다. 역으로 키릴루스와 멤논을 파문시킨 것이었다. 앞서 아무 힘도 못썼던 알렉산드리아의 변절자들도 갑자기 힘을 얻은 듯, 파문의 확정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판결의 확정을 하루 앞둔 7월 10일, 켈레스티누스가 보낸 3인의 로마 교황청 사람들이 당도한 것이었다.(카시아누스가 참석했는지의 여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회의는 다시 키릴루스 측에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하였으니, 마침내 원심대로 네스토리우스의 유죄를 이끌어내었다. 하지만 파문의 판결은 얻어내지 못하였다.(ㅜㅜ.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구인지 나도 헛갈린다. 그저 복잡한 암투가 있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양측은 모두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항소했고, 황제는 난감해졌다. 판결은 네스토리우스에게 불리하게 났으나 그렇다고 자신이 불러와 총주교에 임명한 그를 파문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그렇다고 판결이 이렇게 난 마당에 그를 두둔하여 자리에 계속 앉혀두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누이 풀케리아가 나타나 이런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주었다.


      "전에 네스토리우스 그 자식이 교리 문제로 나를 개쪽 준 적 있어. 그런 놈은 파문시켜 멀리 귀양 보내야 돼!"


    한때 하늘 끝에 닿을 듯했던 네스토리우스의 날개는 그렇게 꺾이었고 이제 것은 추락뿐이었다. 그날로 안티오크 근방의 수도원에 유폐된 그는 이후 시리아의 페트라에 유배되었고, 다시 아프리카 리비아 사막과 이집트의 시에네(지금의 아스완 댐 부근) 등지로 옮겨졌다. 그는 45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기 전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그 칙령이 도달하기 앞서 아프리카에서 사망했다.


    그는 유폐 기간에도 나름대로의 권토중래를 도모했던 것으로 보이는 바, 안티오크에서는 '비극(Tragedy)'이라는 책을 써 자신을 변론했고, 이후 회심의 역작 '다마스쿠스의 헤라클리데스가 쓴 책'라는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이 책은 자신의 사상을 변론서요 자서전 같은 것이었는데, 출간을 위해 가명까지 사용한 것을 보면 그 자신의 책에 대한 기대를 엿볼 수 있으나, 이미 해가 기운 뒤였다. 1895년 시리아어 역본이 발견되었다) 그는 자신에 책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이단이 아니며, 따라서 죽을 때까지 정통 크리스크교의 노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귀를 막고, 심지어는 정통 기독교들마저 입을 닫는 세상이기에 더욱 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었다. 




    http://www.ephesus.ws/assets/99671/2drbyyiskk.jpg   페수스의 위치



    여기까지 온 김에 잠시 에페수스로의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켈수스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과 더불어 로마의 3대 대서관이었으며 12,000권의 책(양피지 두루마리)이 소장돼 있었다 한다.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이곳에서 테이트를 즐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페수스 대 원형극장

    로마 시대에는 에페수스항 가까이 있었으나 이후 토사가 유입되며 바다에서 멀어졌다. 3단 각 22층의 구조로 약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끌려간 곳이 여기인지 아래 오데온인지 분명치 않다.(사도행전 19:29)


    소 원형극장 오데온(Odeon)

    14,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으며 나무로 된 지붕이 있었다고 한다. 주로 음악 공연이나 연극 공연이 이루어졌고, 때로는 지역 회의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오늘날의 오디오(Audio)의 어원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으뜸이라 일컫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상상도

    사도 바울은 이곳 에페수스에 머물 때(AD 52-54) 우상숭배를 반대하였다. 이에 사도 행전(19:23-40)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모형이 팔리지 않는다며 분노한 상인들이 바울 일행을 위의 원형극장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 나오나, 이때는 이미 신전이 무너졌을 때 같다. 


    https://magical-steps.com/images/icerik/mod_blog/artemistemple1024_800_8hk.jpg

    신전이 있던 자리에는 그저 이것뿐..... 

    18m 127개의 신전 기둥이 있었다는데 겨우 달랑 1개만 남았다. 상전벽해, 인상무상..... (뭐 이런 말로도 부족하다)


    셀축 페수스 박물관의 아르테미스 상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이자 다산과 풍요의 여신이며 사냥의 여신이다. 이에 가슴은 출산을 상징하고 머리와 다리 등의 동물들은 사냥감과 풍요를 상징한다. 데메드리오(사도행전 19:24) 등이 만들어 판 모형도 아마 이러했으리라.  


    또 다른 형태의  아르테미스 상

    1956년 에페수스 관청 유적지에서 위 2개의 아르미테스 상이 발견됐다.


    http://eeparchy.com/wp-content/uploads/2011/10/Seventh_ecumenical_council_Icon.jpg

    페수스 공의회를 묘사한 그림

    운집한 사람들과 비잔틴 양식의 에페수스 성당이 그려졌다.



    그 위용이 지금은..... 

    페수스 공의회 장소로 추측되는 사도 요한 대성당은 지진으로 무너지고 폐허만 남았다. 전에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을 것 같은데, 현재는 아래 성 요한 무덤과 몇 개의 문 정도만 재건된 상태다.

    「ephesus st. john」の画像検索結果

    에페수스 유적지 부근에 위치한 대성당의 유구 関連画像

    성당의 중앙 문은 현재 요한 성당의 상징이 됐다.


    성당 입구에 세워진 '박해의 문'

    원형극장에서 순교한 크리스트인들을 기리기 위해 그곳에서 옮겨온 대리석으로 문의 상부를 꾸몄다고 한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 시절, 에페수스는 로마제국 4대 도시의 하나로서 번성했으나 항구에 토사가 쌓이면서 쇠락했다. 



    에페수스 공의회 장소로 추측되는 또 다른 장소. 


    http://ancientephesus.com/images/double-church-of-mary/double-church-06.jpg



    http://ancientephesus.com/wp-content/uploads/2015/02/double-church-01.jpg

    성모 마리아 성당 유구

    페수스 유적지로부터 약 7.2km 거리에 위치한다. 여기도 페수스 공의회 장소로 추측되고 있는데, 어느 곳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http://ephesusfoundationusa.org/images/modal/81.jpg

     성모 마리아 성당지의 부감


    * '창세기의 수수께끼 단어 '우리',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서 (III)' 으로 이어짐.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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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apan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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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