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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수수께끼 단어 '우리',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서 (III)성서와 UFO 2017. 10. 17. 15:41
칼케돈 공의회와 ‘기독교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네스토리우스는 그렇게 정죄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력 자체가 몰락된 것은 아니었던 바, 그들은 나름대로의 살 길을 찾았다. 그리하여 흐트러진 세력을 규합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이후 다시 한판 붙은 것이 451년(10월 8일부터 11월 18일까지) 보스포러스 해협 인근 도시 칼케돈에서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였다.
네스토리우스파가 다시 공의(公議)를 요구하게 된 것은 앞서 개최된 에페소스 공의회의 결과가 다분히 정치적이었고 게다가 사감(私感)에 좌우된 결정이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그들은 여전히 논리적 이해를 요구하고 있었던 바, 그 이유는 아직도 동방교회가 다음 질문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질이라면, 즉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동시에 인간일 수 있는가' 답하라.
너희가 이성설(二性說)을 부정한다면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는가' 답하라.
너희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완전한 것인가, 아니면 부분적인 것인가? 부분적이라면 어느 정도 섞여 있는 것인가' 답하라.
네스토리우스파가 재심을 요구하게 된 데는 황제의 서거와도 관련이 있었다. 즉 판결에 사감이 개입됐던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죽었으니 새로운 황제께서 올바른 결정을 위한 공의회를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황제 마르키아누스도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고 그 또한 새로운 사람들이 모여 이 문제들을 정리해주길 바랬다. 이에 그는 다시 공의회를 열라는 칙령을 내렸고, 그 장소로는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지척인 칼케돈으로 정해졌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올 수 있는 범국민적인, 즉 에큐메니컬(Ecumenical)한 회의가 될 수 있는 입지성이 고려된 결정이었다.
로마 제국의 영토와 칼케돈의 위치
(그러나 이 공의회는 일편 네스토리우스파에게 불리한 집회였다. 마르키아누스 황제가 명을 내리긴 했으되 실제적으로 일을 주관한 사람은 그의 법적인 아내 풀케리아였으니, 바로 네스토리우스의 유배를 사주한 사람이었다. 마르키아누스 황제는 본래 오랜 기간 군대에 봉직했던 직업군인이었다. 그러다가 전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황위에 올랐는데, 이에 명분이 필요했던 바, 평생 독신을 선언한 황제의 누이 풀케리아와의 정략 결혼으로 법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사실상 풀케리아와 정권을 나눠 가진 상태가 된 것이었다)
451년 10월 황제는 동방교회의 명망 있는 주교와 사제 500여 명을 칼케돈으로 불러 모았다. 네스토리우스파가 요구하는 위 질문에 대한 대답, 즉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확한 답을 내놔 다시는 저들이 이 같은 일로 떠들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황제는 500명의 성직자 불러 모은 만큼(숫자는 학자들마다 다른데 그야 뭐 대수겠는가) 그들 중 이 논란을 매듭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라도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없었고 혹시라도 자신이 답변자로 지목될까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회의는 다음달 1일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역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던 바, 결국은 일방적 주장이 담긴 아래의 신조만을 추인시켰다. 앞서 에페수스에서 전개됐던 치열한 논쟁의 분위기가 실종된 전혀 회의답지 않은 회의였다.(대신 콘스탄티노플 대수도원장 에우디케스가 단성설을 들고 나와 좌충우돌했는데, 그의 주장은 나름 중요한 학설로서 살펴볼 가치가 있으나 여기서는 논조를 흐리므로 생략하기로 하겠다)
* 단성설(Monosyllabic) : 성부와 성자가 연합하기 전에는 두 본성이었으나 연합 후에는 한 본성이 되었다는 이론.
에우티케스의 주장의 요지는 '크리스트에게는 오직 신성만 있고 인성은 거기 흡수되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회의에서 추인한, 이른바 칼케돈 신조의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시며, 이 두 가지 본성이 조금도 섞이거나 그 특성이 사라지지 않은 채 그 안에 한 인격으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예수는 인간이면서도 신인 독특한 존재 방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분열되거나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편향적인 선언이 네스토리우스파에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인 네스토리우스파였던지라 결국은 험악한 분위기에 눌려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는 사회를 맡은 로마 교회 파시카시누스 주교의 역할도 한몫했다. 겉으로는 서방교회의 대표자로서 중립을 자처했으나 그는 반(反)네스토리우스파였던 로마교황 레오 1세의 특사였으므로 그로부터의 중립에의 의지는 처음부터 기대하기 힘든 것이었다.
위의 신조는 이렇게 추인되었는데, 그런 회의가 종교회의였다는 것이, 더욱이 훗날 '에큐메니컬 회의'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그러한 가운데서도 회의는 18일까지 이어지며 에우디케스의 이론과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토론했는데, 결국 에우디케스의 단성설은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하지만 에우디케스도 판결에 불복하였던 바, 553년과 680년, 두 차례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려 단성론자와 삼위일체론자 간의 2, 3 라운드가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최종 입장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후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회의 대부분이 이를 수용했고, 훗날의 개신교 역시 한 점의 수정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다만 당시의 일부 동방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꼽트교라 불리는 이집트와 에디오피아 정교회가 칼케돈 신조에 불복해 동방정교회를 탈퇴했다.
칼케돈 공의회를 묘사한 그림. 자신의 이론을 피력하는 다혈질의 에우디케스를 강조했다.
성 에우페미아 성당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열린 성당으로 추정되는 곳이라고 설명하면 좋겠으나, 그러기가 힘든 것이 이 건물이 세워진 때가 7세기 이후이기 때문이다. 이 성당은 이곳 칼케돈에서 순교한, 그리하여 훗날 성녀가 된 에우페미아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는데, 원래는 황제의 별궁이 있던 자리였다. 이에 초기 기독교 건축물에서 궁전 건축 양식이 반영된 최초의 사례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현재의 건물은 1736년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고 그나마 1951년 일부가 무너져 다시 지어졌다.(이곳에서 칼케돈 공의회가 열렸다는 증거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이 자리는 계속 칼케돈 공의회가 열린 곳으로 추정되어지고 있는 바, 아마도 공의회는 마르키아누스 황제의 별궁에서 개최되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사진은 결혼식에 모인 하객들)
에우페미아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 시절 순교했는데, 이후 여러 전설로 인해 마을, 특히 여성의 수호신 같이 여겨지게 되었던 바, 이곳 성당에서의 결혼식이 선호된다고 한다. 무슬림이 99% 이상인 터키에서 현재 사용 중인 많지 않은 정교회 건물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 정교회의 인구는 약 0.6%이다.
위 사진은 이곳에 황제의 별궁이 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드물게나마 남아 있는 주변의 로마 유적
성당 주변 땅 속에서 발견된 4세기 로마 유물
이제 남은 것은 네스토리우스파의 처신이었다. 이에 불복해 싸우느냐, 승복하느냐의 문제였겠으나, 실제적으로 싸움은 끝난 셈이어서 이제 남은 것은 항복하느냐, 떠나느냐의 양자택일뿐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세상에서 로마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 그곳은 페르시아 제국과 저 먼 중국 땅밖에 없었다. 이에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지지하는 시리아 동 · 서부 교회 사람들과 함께 국경을 넘었다. 이후 457년 경에는 페르시아의 니비시스에 네스토리우스교의 교회가 세워졌고, 새로운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일파는 아라비아와 인도와 중국으로 진출하였던 바, 635년에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도착하였고 이후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약 150년 간 당 황실의 비호 속에 성장하였다. 그들이 중국까지 오게 된 사연이 아래의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자세히 적혀 있는데, 781년 서역인으로서 당나라 관리로 중용된 이자드부지드(중국명 李斯)라는 사람이 거금을 출자해 경교 사찰인 대진사(大秦寺)에 세운 비석이었다. 한자 외에 시리아어로 경교 승려 70인의 이름을 적었다.
서안 비림(碑林)박물관의 대진경교중국유행비
'대진'은 로마, '경교'는 기독교를 의미하는 바, '로마 기독교가 당나라에서 유행한 사실을 적은 비문'쯤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일본 다카노야마의 복제비
한 일본인이 비석 이수의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다. 아래 이수 글자 부분의 탁본에서 뚜렷한 십자가 문양을 확인할 수 있다. 탁본은 1625년 예수회(제수잇 재단) 선교사에 의해 비석이 발견되었을 때 진품에서 습탁한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에스트란게로(시리아어) 문자. 경교 승려들의 이름을 쓰고 그 뒤에 한문 이름을 병기(倂記)했다.
말한 바와 같이 이후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위치는 칼케돈 신조 대로 정리되었고, 즈음하여 성령 또한 동격의 대우를 받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몸이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설이 정립되게 되었다. 그 이후의 종교개혁으로써 카톨릭에서 분리해 나간 프로테스탄트와, 다시 여기서 분리해 나간 여러 개신교 교파들에게도 역시 위의 신조는 여전히 금과옥조로 받들어지고 있다.
왜 그럴까? 언뜻 봐도 이해가 어렵고, 깊이 들여다봐도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이 말은 왜 그들 종교의 여전한 금과옥조일까? 하지만 이쯤에서 각설하고 삼위일체설에 대해서는 차후 다시 설명을 잇기로 하겠다. 아무튼 본인이 이렇듯 긴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앞서 거론한 ‘우리’에대한 해석 때문이다. 교계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그 ‘우리’에의 해석을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의 삼위일체 하나님’인 까닭에 ‘우리’라고 한다는데, 나 또한 아직도 여전히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아니, 무슨 뜻인지조차 이해 못하고 있다. 창세기의 그 '우리'와 삼위일체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인지....?
위 네스토리우스파와의 긴 싸움에서, 그리고 향후 펼쳐진 단성론자들과의 긴 싸움에서 승자가 된 쪽은 삼위일체론자이다. 그래서 지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몸으로 여기게 됐는데, 거듭 말하지만 삼위일체설과 성서의 '우리'의 해석과는 그 상관성을 찾아 보기 매우 힘들다. 아니 전무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해석돼지고 있는 바, '승자의 논리가 역사의 논리'라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된다면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 '창세기의 수수께끼 단어 '우리',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서 (IV)'로 이어짐.
-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 국내도서
- 저자 : 김기백
-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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