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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세기의 수수께끼 단어 '우리',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서 (IV)
    성서와 UFO 2017. 10. 18. 22:43

       

     

    앞선 챕터에서 설명했듯 삼위일체론은 그 사상적 투쟁을 통해 이제는 신·구교의 확실한 신론(神論)으로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그 결론은 아직도 생각있는 많은 신학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데, 이유인즉 삼위일체론을 바탕으로 한 칼케돈 신조에는(뒤의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포함하여) 문장 그대로 3명의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부인 하나님이 있고,

      성자인 하나님이 있고, 

      영적인 하나님(성령)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론의 토대를 마련한 터툴리아누스나 이를 완성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은 결코 그렇지 않았으리니 그들은 분명 하나님은 한 분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아리우스의 일신론, 네스토리우스의 이성론(二性論), 에우디케스의 단성론(單性論) 등과 싸우는 과정에서 터툴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은 왜곡되어 3명의 하나님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칼 바르트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석학으로 평가받고 있는 위르겐 몰트만(1926-     )도 이와 같은 정체성의 혼란을 답답하게 여긴 듯, "이슬람 유일신관에서 보면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과 기독교회들은 삼신론(三神論)자이다."(이슬람교의 신 알라는 성자나 성령 같은 것이 없으므로)라는 말을 했고,  일본의 세계적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죠(內村鑑三, 1861-1930)는 "유니테리언(Unitarian)*과 화해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의미가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이성을 중요시 여기는 개신교의 일파, 혹은 그와 같은 사상을 토대로 한 일련의 종교운동을 말한다. 16세기 영국의 조셉 프리스틀리가 '신조 없는 믿음'을 모토로써 제창하였다.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몰트만의 대표 저서. 그는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우치무라 간죠의 대표 저서. 개화기 일본의  최고 신학자. 일본의 초기 기독교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조선의 기독교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성서조선 운동'의 김교신, '무교회주의'의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이와 같이 개방적인 신학자들이 간혹 있기는 하나 현대 신학의 대부분이 삼위일체설의 반석 위에 서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제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해 현학적 논리를 편다해도 삼위일체설을 부정하지 않는 한 앞에서 말한 3명의 하나님은 불변이다. 이에 토마스 제퍼슨은 칼뱅주의를 '세 신을 모시는 종교'라며 폄하하고 조롱한다.

     

    사실 그동안의 신학자들도 이에 대한 모순을 알고 있었기에 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바로 잡아 보려고, 말하자면 3=1이 될 수 있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으로, 중세에 있어서는 J. 칼뱅이 그러했으며 20세기에 들어서는 위르겐 몰트만과 칼 바르트(K. Barth), 그리고 칼 라너(K. rahner)라는 신·구교의 석학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 역시 3=1을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는 있었겠으나 하지 못했으리라. 그럴 경우 니케아 · 칼케돈 ·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부정해야 되고, 또 그럴 경우에는 신·구교의 토대가 무너져 신·구교 자체가 붕괴되는 지경을 맞이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리라. 나는 칼 바르트가 외친 '하나님의 자유로서의 초월성'을 이 고뇌의 출발점이자 마침표로 보고 있다. 하나님은 3=1이 아니라 1 자체도 초월한다 보았으나 그렇다고 차마 3을 부정할 수는 없었던..... 

     

     

     

    http://www.christianitytoday.com/images/67494.jpg?w=700

    스위스 출신. 기존의 정통신학에서 벗어난 새로운 계시관과 역사관을 제시한(이른바 신정통주의 신학) 20세기 최고의 개신교 신학자.  

     

    https://image.slidesharecdn.com/rahner-131025104722-phpapp01/95/karl-rahner-6-638.jpg?cb=1382698060

    독일 출신. 기존의 전통교리와 실존주의의 철학을 결합한 사고로써 카톨릭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20세기 최고의 카톨릭 신학자. 

     

     

    감히 그들과 견줄 수는 없겠지만, 나 역시 삼위일체에 관해 고민하였다. 그 시작점은 앞에서도 여러 번 강조한 대로 창세기 1장 26절에 느닷없이 등장한 '우리'라는 단어였다. 그 내용을 다시 되풀이 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즉 창세기 1장 3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그 모든 것에 만족한 하나님은 26절에 이르러서는 나아가 '우리가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어 지금까지 만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그 말을 혼자 중얼거렸을 리는 없었을 터, 의당 주변의 존재들에게 했을 것이다. 

     

    나는 위 문장의 내용을 당연히 이렇게 해석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충 설명을 히브리서 등의 내용에서 찾았는데, 우선 히브리서 1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도다.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이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히브리서1:4-6)

     

    내가 말하고자 함은 그 아들이라는 자가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라는 것이 아니고,(아들은 필시 예수를 지칭함이겠지만) 하나님의 주변에 이러한 말을 건넬 상대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상대가 있다는 것은 또 다음과 같은 상황과, 하나님 스스로의 육성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내가(선지자 미가야)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죄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열왕기상 22:19)

     

    내가(선지자 이사야)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이사야 6:1)

     

    내가(선지자 이사야)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이사야 6:8)

      

    그리고 시편(8:5)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만들었다는 내용 또한 찾을 수 있다. 이상을 보면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고자 할 때에 주변의 천사들에게 '우리가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어 지금까지 자신들이 만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제안하고, 그 사람의 능력을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만들었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계의 주장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우리'라는 복수 대명사가 쓰인 이유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라 나는 그동안 많은 신학자 및 목회자에게 이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역시 같았다. 잠시 여기서 여담 하나를 소개하자면 개중에는 다음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답변을 내놓은 사람도 있었다. 

      

      "우리가 그 형상과 모양이 다르듯(얼굴 생김새나 체형이 다르듯) 하나님께서도 여러 형상을 갖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우리 인간의 모습이 다른 것이며, 그리고 이 때문에 성서에 '우리'라고 하는 말이 쓰이게 된 것이다."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것이 ‘우리’라는 설명에는 부합됐을는지는 모르겠으되 하나님이 여러 형상을 갖고 있다는 전제는 크게 틀린 말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기로 신의 여러 형상은 오직 힌두교와 불교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니, 이를 테면 11면 관음보살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부처나 보살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경전이나 설화의 이해가 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여러 형태를 갖고 계신다는 것은 전혀 얼토당토않는 설명이었다.

     

    그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니, 할 수 없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삼위일체설 자체를 모르고 있는 목회자였다.(아니, 어쩌면 너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교리에 가장 충실한 대답을 내놓은지도 모르겠다. 설마 삼위일체설도 모르는 목사가 있을라고....? 하지만 어찌됐든 기타의 것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무지하고 무식했다) 

     

    그의 무지는 그날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했던 1시간 가량의 설교에서 더욱 두드려졌는데, 그중의 압권은 그가 설교에서 인용한 구약성서 '열왕기'였다. 그는 본문을 인용하며 '열왕기는 구약 시대의 열 명의 왕에 관해 쓴 책이다, 그래서 열왕기다'라는 사족을 덧붙였다. 列王記(Kings)에 대한 심각한 오독이었다. 살다 보니 세상에는 그런 목회자도 있었다. 

     

    그 목회자는 삼위일체설을 모르는 아주 드문 예(例)였지만, 그 외 언제나 삼위일체는 전래돼 오는 보검처럼 위급할 때에 광휘를 발휘하며 쓰인다. 하지만 한편으론 너무 남용되는 경우도 있으니 필자가 득의(得意)로서 주장한 ‘수면 위를 운행한 하나님의 신’(* 성서 속 최초의 UFO 참조)마저도 다음과 같은 삼위일체로 에둘러진다. ‘하나님이[=성부] 말씀으로[=성자]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때 하나님의 신[=성령]이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것이다.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다. <김성환 著 '평신도를 위한 칼빈주의 해설'>

     

    그런데 그 삼위일체라는 것이 성서에는 있는 말일까? 말한 바 대로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둘러지는 삼위일체지만, 놀랍게도 성서에서는 그 전거(典據)를 찾기 힘들다. 굳이 찾자면 다음의 내용뿐이다. 그 첫째는 부활한 예수가 제자에게 한 말로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태복음 28:19)

     

    라는 내용과,

     

    사도 바울이 코린트 교회에 보낸 네번 째 편지에서 그에 관한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린도 후서 13:13)

     

     

    그 코린트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  

     

     

    https://i.pinimg.com/originals/d1/82/26/d18226a01c3a3b1c6cb78ad4356a0cad.jpg

     

    코린트(고린도)의 위치 

     

    「korinth」の画像検索結果

    고대 코린트 시의 유적

    사도 바울은 AD 50년 가을부터 52년 봄까지 18개월 동안 이곳 코린트에 머물렀다. 

     

    「korinth」の画像検索結果

    코린트에 있는 아폴론 신전

     

    「korinth」の画像検索結果

    바울이 AD 52년에 세운 코린트 교회는 이곳 페이레네 샘 부근에 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바울의 재판 장소인 베마(Bema) 유적

     

     

    이처럼 성서의 전권(全卷)을 통해서도 그 전거를 찾기 힘든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득불 ‘우리’의 해석에 꿰맞춘 것이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삼위일체론이 아니고는 성서의 많은 부분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위에 언급된 ‘우리’를 나와 비슷한 관점으로 본 신학자들이 있었다. 

     

    초기 교회의 필로(알렉산드리아의 필로)나 마이모니데스 같은 학자들인데, 그들은 성서에 ‘우리’라는 복수 의미의 단어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주위의 천사들과 상의한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곧 아우구스티누스에 반박당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구절이 강조되었겠냐는 것으로, 하나님이 천사들의 형상대로가 아닌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은 것에는 보다 영적인 뜻이 숨어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었다. 지금껏(창세기 1:2-25) 세상의 모든 것을 말씀 한 마디로 혼자 창조했는데, 그저 미천한 사람 하나를 지음에 있어 주변의 천사들과 상의를 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와 같은 무리수를 두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그의 주장은 삼위일체론으로 정립된 ‘우리’와는 달리 후대 교회의 완전한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필로나 마이모니데스의 주장을 따랐으면 간단했을 것을 하나님의 영성(靈性)을 강조한 탓에 그 해석이 오히려 복잡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이 ‘형상(image)’에다 ‘모양(likeness)’까지 결부되어 더욱 난해해졌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직까지도 이렇다 결론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매우 간단한 문제가 매우 어렵게 만들어진 것이니, 이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해석에 있어서는 이레네우스,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우스, 펠라기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 초기 교회의 이름난 교부와 학자들의 의견이 달랐고, 중세에 있어서는 루터와 캘빈의 견해가 또한 달랐다. 예를 들면 캘빈이 주장하는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해석은 이렇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아담이 부여받은 완전성을 지칭하는바 명료한 지성, 이성에 복종하는 지성, 적절히 통제된 감정, 창조주가 부여한 모든 탁월하고 찬탄할 만한 재능들을 가리킨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는 정신과 마음, 혼과 그 능력이지만, 육체의 모든 부분 가운데 다소라도 영광의 빛이 비춰지지 않은 부분은 있을 수 없다.” <R. 벌코프 著 ‘조직신학’>

     

     

    나는 이와 같은 캘빈의 주장을 이해해보려 몇 번이고 들여다봤지만 끝내 그 뜻이 모호했고, 그것은 루터의 주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말한 바와 같이 이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해석은 지금까지도 정설이 없으니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이 다르고, 개신교 여러 교파의 견해 또한 분분할뿐더러 심지어는 내가 만나 본 동일 교단에 속한 교회 목사님들의 견해마저 각양각색이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인간’. 수세기 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이에 대한 정확한 메시지를 찾고자 노력했음에도 지금껏 그 의미조차 파악치 못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분명하게 주장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어진 하나님을 닮은 인간'은 '우리'라고 하는 여호와 자신을 포함한 외계인의 창조물이며, 그 최초의 인간을 만들기 위한 시료로써 여호와 하나님(정확히 말하자면 지구 식민화 프로젝트의 최고 책임자)의 체세포가 제공되어졌다고.

     * '창조주 여호와를 거역하는 뱀 족속-그 거대한 반란의 서막'/'아브라함이 만난 UFO와 가나안 이주의 진실 (III)' 참조

     

    따라서 그 창조된 인간의 모양과 형상은 당연히 하나님을 닮았을 수밖에 없을 터, 그밖의 무슨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아울러 그 최초의 인간을 만든 '우리'에 있어 삼위일체 어쩌고하는 그 다난한 종교회의의 결과물 또한 그에 대한 설명문으로서 적합치 않을 것 같다.(한마디로 말해, 후대에 만들어진 삼위일체론을 '우리'에 해석에 억지로 꿰맞췄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을 만든 '우리'는 성서에 써 있는 내용 그대로 그저 '우리'일 뿐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드는 과정 또한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터, 그저 아래 몇 장의 사진으로도 충분한 갈음이 되리라 본다. 

     

     

     

    https://4.bp.blogspot.com/-tdG1tN88xyI/Vl9r_oUipbI/AAAAAAAAHyg/HgahEejl2uY/s640/clnagem.jpg

     

     

    영화 '아일랜드'에서 캡처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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