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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의 역사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10. 18. 23:44

    성공회(聖公會)라는 단어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한 공회'(거룩한 보편적 교회, The Holy Catholic Church)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나에게 이 성공회를 한마디로 설명하라 하면 '개신교도 아니고 천주교도 아닌 범 기독교계에 속하는 영국의 종교'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성공회 사람들은 성공회를 영국 기독교로 정의하거나 '영국국교회'로 지칭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 태생이 영국이라는 점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 성공회 사람들은 성공회는 세계적인 신앙공동체(Anglican Communion)이며 '영국국교회'는 그 가운데 하나인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있지만 성공회의  본부는 분명 영국 켄터베리에 있는 켄터베리 대성당이다.(아울러 켄터베리 대주교는 명목상이든 어떻든, 좌우지간 세계 성공회 공동체를 대표한다. 세계에서 성공회를 국교로 삼은 나라 역시 영국이 유일하다)



    성공회의 본산 켄터베리 대성당

    높이 100m에 이르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본당을 가진 초기 고딕양식 교회이다. 런던 남동쪽 85km 지점의 켄터베리 시에 위치한다.



    또한 성공회 사람들은 성공회가 영국 종교개혁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국왕 헨리 8세(1491-1547)와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의 산물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 이혼도 긴요긴급한 것이 아닌 헨리 8세의 바람끼에 편승한 부도덕한 행위였다. 본부인을 버리고 앤 볼레인이라는 새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로마교황청에 이혼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성질이 난 헨리 8세는 로마교황청과의 결별을 선언했고, 이어 영국 왕을 수장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든 것이 바로 성공회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 새로운 종교의 바탕은 물론 기독교였고, 당시 영국까지 불어닥친 종교개혁의 열풍은 때마침 좋은 불쏘시개가 돼 주었다.



    헨리 8세의 초상화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이 그린 그림으로 유럽미술사 최고의 초상화로 평가받는다. 앤 볼레인과의 결혼을 위해 차려입은 모습인데, 얼굴에서는 평소의 자신감과 똥고집이 덕지덕지 묻어난다.(클릭!)



    헨리 8세의 힘겨운 이혼 뒤에는 토마스 크롬웰, '유토피아'의 작가이자 정치가인 토마스 모어, '우신예찬'의 작가이자 신학자인 에라스무스 등의 유명인 후원자가 있었다.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의 주교가 된 토마스 크롬웰은 대주교의 자격으로 마침내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이혼을 선언했는데, 그러므로써 탄생하게 된 영국 국교회의 교리나 의식에 달리 특별한 것이 있을 리 없을 터, 그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절충적 성격을 띤 어중간한 것이었고,(의식은 카톨릭과 비슷하고 교리는 개신교와 유사하다) 이와 같은 불분명한 정체성은 이후 극심한 종교적 혼란을 불러온다.



    1969년 작, 영화 '천일의 앤'의 포스터

    궁중 시녀였던 엔 볼레인은 헨리 8세의 이혼을 성사시키고 결혼에 성공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했고 남편 헨리 8세의 바람끼도 도졌던 바, 이러저러한 구실로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감옥에 갇힌 그녀가 죽기 직전 왕비로서 호사했던 날을 헤아려보니 꼭 1,000일이었다. 이후로도 헨리 8세는 4명의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중 1명은 처형당했고 2명은 산후 후유증으로 죽었다.


    영화 '또 다른 앤 볼레인'

    이같은 재미난 소재가 단편으로 끝날 수는 없을 터, 이후 나탈리 포트만과 스칼렛 요한슨이 주연한 영화 등이 이어졌고 TV 시리즈로도 만들어졌다. 아무튼 헨리 8세는 세상의 왕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거리를 제공한 자임에 틀림없다.



    헨리 8세는 영국국교회의 수장으로 영국국교회, 즉 성공회를 반석 위에 올려 놓으려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힘을 통한 개종에의 종용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2년 후인 1549년, 토마스 크랜머 성공회 대주교는 민간 차원의 개혁을 착수하여 성공으로 이끌었던 바, 그간의 어려운 라틴어 기도문을 구어체의 영어 기도문으로 만들어 배포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이에 영국 내에서 자발적인 성공회 신자가 늘어갔으나 그것도 잠시, 헨리 8세의 뒤를 이었던 에드워드 6세(앤 볼레인을 죽이고 새로 결혼한 제인 시모어 사이에서 낳은 아들)가 16세의 어린 나이로 죽고 캐서린(헨리 8세의 첫 부인)의 딸 메리가 여왕으로 즉위하게 되자 사정이 급변하였다.



    1700년 판 성공회 기도서성공회 기도서

    성공회 기도서 'The Book of the Common Prayer'는 오늘날까지 성공회 신앙생활의 기본 학습서로 상용된다.



    메리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오직 카톨릭 신앙에 의지해 버텨 온 사람이었다. 까닭에 왕좌에 앉아서는 배타적 신앙심과 아버지 헨리 8세에 대한 원망 등이 엉켜 표출되었던 바, 영국을 카톨릭으로 회귀시킨다. 그리하여 휴 레티머,(성공회 주교로 최초의 순교자가 됨) 니콜라스 리들리, 토마스 크랜머 등 성공회 우두머리들을 모두 처형하고, 카톨릭으로의 개종을 거부한 성공회 성직자 및 개신교 성직자 300명을 처형했으며 일반 신도들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까닭에 그녀는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얻었는데, 나아가 마르틴 루터, 존 칼뱅, 에라스무스, 틴틀의 저서까지 모두 반입을 금지하고 폐기하였으며 성공회 기도서 또한 외우지 못하게 하였던 바, 그야말로 영국판 분서갱유에 다름 아니었다.



    내가 누군지 아니?

    공포 정치의 대명사 '블러디 메리(Bloody Mary)' 메리 1세 여왕으로 안토니스 모르가 그린 초상화 작품이다. 생긴 것도 무섭다.



    그렇지만 그녀는 정책적으로 선택했던 11살 연하의 스페인 왕자 필리페와의 결혼 생활이 무난하지 못했고, 스페인·프랑스 전쟁에 쓸데없이 끼어들어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을 지원했다가 프랑스의 반격으로 대륙에 남은 마지막 영토 칼레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다 암까지 걸린 그녀는 1588년 11월 난소암이 깊어져 결국 원하던 자식을 얻지 못한 채 후사 없이 죽게 되는데, 그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해가 지지 않는 국가' 대영제국의 서막을 연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여왕으로, 비운의 왕비 엔 볼레인이 낳은 유일한 자식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

    참으로 묘하게도 이번에는 헨리 8세와 엔 볼레인 사이에서 낳은 엘리자베스가 왕이 되었다. 


    2017년 영화 '엘리자베스 1세' 속의 엘리자베스 여왕

    "쉿! 짐은 국가와 결혼했노라. 따라서 짐은 국민과 국가만을 위해 일하다 갈 것이니 결혼 같은 개소리는 집어치거라."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는 성공회였지만 그렇다고 다른 다른 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그녀는 메리 여왕의 공포정치를 몸서리치며 지켜보았던 바, 국민에게 어떠한 강압적 종교정책도 취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유럽의 후진국 영국을 발전시키는 데 진력하였으니 중상주의 영국의 해외 진출과 더불어 성공회 역시 신대륙과 오세아니아 지역으로의 무리없는 포교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2019년 현재 성공회는 165개국에 독자적인 교구가 설립돼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1890년 9월 29일, 조선 초대주교로 서품을 받은 영국인 존 코프(한국명 고요한) 신부가 제물포 항에 도착한 것이 효시였다.

     




    대한성공회 강화 성당(성 베드로 & 바우로 성당)과 안내문 


    내부 구조

    바실리카 교회 양식과 한옥 중층 구조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대한성공회 정동 성당(성 메리 & 니콜라스 성당)과 안내문 

     

    초기 예배당과 사제관
    1912년 경운궁 양이재(養怡齊) 건물을 임대해 쓰다가 1920년에 사입해 지금의 자리(성공회 성당 뒤)로 옮겼다. 차 뒤로 보이는 건물이 사제관이다.


    건물은 십자가형으로 설계되었으나 1916년 축성 당시 자금 부족으로 완공하지 못했는데 1996년 본래 설계도가 신비롭게 발견되어 뒷부분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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