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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엑소더스,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II)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9. 16. 23:43

    * '엑소더스,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I'에서 이어짐.


    3. 히브리인들을 쫓은 왕은 과연 누구인가?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출애급기 14:7-9)


    위 출애급기의 내용에는 탈출한 히브리인들을 쫓으려는 파라오의 강한 의지가 실려 있다. 그래서 그는 전차 600승(乘)을 선발대로 보내고 나머지 이집트의 모든 전차를 동원해 히브리인들을 쫓는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추격대의 전차 숫자까지 자세히 적었음에도, 또 지명까지 자세히 명시했음에도 그것을 동원한 파라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해괴함..... 이런 것들이 내용을 불신하게 만들어 결국은 출애급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파라오를 찾아나설 수밖에 없다.


    먼저 앞에서 말한 투트모세 3세를 다시 올려보자. 말했다시피 그는 성서에 기록된 출애급의 해인 기원전 1445년,(열왕기상 6:1)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서 미탄니 왕국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것은 앞서 소개한 두 공적비에 함께 기록돼 있으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혹 출애급이 기원전 1446년에 있었다 해도 투트모세 3세는 히브리인들을 쫓은 왕이 될 수 없다. 이어진 출애급기의 내용에서는 전차와 기병들이 모두 바닷물에 덮어져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바, 1년 사이에 대전투를 치를 병거와 기병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출애급기 14:26-28)




    영화 '엑소더스'에서 바닷물에 수장되는 이집트군



    게다가 투트모세 3세는 바다에 수장된 것이 아니라 룩소르 '왕가의 계곡'에 묻혔으며(1894년 프랑스인 빅토르 토레가 발견) 그의 미라도 카이로 박물관에 버젓이 전시돼 있는 바, 투트모세 3세를 출애급 당시의 왕으로 비정하는 것은 더 이상 옳지 않을 듯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기원전 1400년 설이다. 그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은 사사기인데, 우선 그 내용부터 한번 살펴보자.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마을들과 아르논 강 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주한 지 삼백 년 이거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사사기 11:26-27)


    이는 길르앗의 용사 입다(☞ '사사기 바로보기- 입다의 딸은 어떻게 됐을까?')가 암몬 왕에게 한 말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암몬 땅에 거주한지가 300년이나 됐음을 강조함으로써 그곳의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입다가 살던 시기가 기원전 1100년 경이므로 기원전 1400년 쯤에 출애급이 이루어졌거나 가나안 입경(入境)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즈음의 이집트 왕은 누구일까? 공교롭게도 기원전 1400년을 기점으로 두 명의 왕이 겹치는데, 투트모세 3세의 아들 아멘호테프 2세(재위 BC 1426-1400)와 그의 아들 투트모세 4세(재위 BC 1400-1390)이다.



    암몬의 위치: ★

    지금 요르단의 수도가 암만인데, 그 위치가 암몬 왕국이 있었던 곳과 거의 같다.(암만=암몬?)



    하지만 그들은 모두 미라가 있고, 그들이 남긴 공적비에서는 미탄니 왕국과의 관계는 강조돼 있으되 히브리인들의 이야기는 전혀 실려 있지 않다. 앞서 말했듯 성서에 기록된 탈주한 히브리들의 수는 무려 240만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멘호테프 2세나 투트모세 4세가 설사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하더라도 관계된 최소한의 기록은 남아 있어야 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그들을 쫓는 데는 선발대 600승의 전차를 포함한 이집트의 모든 전차가 동원되었던 바, 이와 같은 대규모 작전의 기록이 존재하지 아니할 수는 없다*


    * 차후 람세스 2세(재위 BC 1279-1213)는 힛타이트와의 카데시 전투에서 패해 북진이 좌절되었음에도 승전의 전과를 기록했는데,(☞ '람세스 2세의 파리 공항 열병식') 이 카데시 전투에 동원된 이집트의 병력은 전차 2,500승에 보병 2만 명, 힛타이트군은 전차 3,000승에 보병 2만 5천 명이었다는 게 통설이다


     

    아멘호테프 2세의 공적비와 미라

       

     

    투트모세 4세의 공적비와 미라



    4. 후기 연대설의 신빙성


    이른바 후기연대설은 출애급이 기원전 1250년 경, 저 유명한 람세스 2세의 재위 시절(BC 1279-1213) 일어났다는 학설이다. 이 후기연대설의 근거는 건축광(狂) 세티 1세(재위 BC 1290-1279)가 지은 여러 신전과 궁전 건설에 히브리 노예들의 노역이 따랐을 것이라는 추측과, 나일 델타의 신도시 라메세움(Rameseum)을 성서의 라암셋으로 보는 것이었다. 라메세움의 장제전은 그가 아버지 람세스 1세를 위해 세운 건물이 되는 셈이었다. 따라서 출애급 당시의 왕은 세티 1세의 아들인 람세스 2세로 귀결되어졌다.


     

     

    왕가의 계곡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세티 1세의 무덤 방(입구)


    라메세움의 장제전



    그 유명한 아비도스 신전


    더 유명한 아비도스 신전 상인방 부조



    이 후기연대설의 대표주자는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로, 나름대로의 역사적 근거와 올브라이트의 이름값이 뒷받침돼 한 세대 이상 정설로 받아들여졌다.(영화 '10계'의 등장인물도 그의 학설을 근거로 설정되었다) 하지만 철옹성같았던 후기연대설은 1896년 테베에서 발견된 메르넵타(Merneptah, 재위 BC 1213-1204)의 공적비가 해독되면서 위기에 몰렸다.(☞ '외계인이 지어준 국호 이스라엘')

     

    메르넵타는 람세스 2세의 13번째 아들로서, 아버지가 장수를 한 덕분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위의 형들이 먼저 죽었으므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복군주를 자처하였던 바, 서쪽의 리비아, 남쪽의 누비아를 정벌하고 북쪽으로는 팔레스타인을 정복하였다. 그의 공적비에는 이와 같은 내용들이 기록돼 있는데, 이 석비가 훗날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함께 기록된 다음과 같은 문장 때문이었다.


    이제 아홉 오랑캐 중 고개를 드는 자는 아무도 없다. 리비아는 폐허가 되었고 힛타이트는 평정되었으며 가나안은 약탈당했다. 아쉬켈론은 정복되었고 게제르는 사로잡혔으며 야노암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고 그 후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읺는다. 후루(팔레스타인)여인은 이집트로 인해 모두 과부가 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관심을 끈 단어는 단연 '이스라엘'이었다. 석비에는 이스라엘이라는 국호가 무려 3천년 전으로 거슬러올라 언급돼 있었던 것이다. 즉 메르넵타의 시대인 기원전 1210년,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 자리하고 있었음이다. 이후 후기연대설은 급격히 힘을 잃었고, 아울러 메르넵타의 미이라가 발견됨으로써 수면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한때 메르넵타의 미라가 발견되지 않은 까닭에 그가 출애급 당시의 왕으로써 홍해 바다에 수장되었다는 주장도 실제로 있었다)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올브라이트


    성서 고고학의 고전 올브라이트의 '팔레스타인 고고학과 바이블'


    문제의 메르넵타 석비

    맨 아래 노란색 부분이 '이스라엘'이란 글자다.


    메르넵타의 미라



    이상 살펴보았듯 역사에는 엑소더스라는 대사건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거의 없다. 핀켈스타인의 주장처럼, 혹은 이스라엘 고고학계의 공식 입장처럼 출애급은 허구임이 입증된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니 그렇다면 출애급기 곳곳에 등장하는 UFO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숙제가 남는다. 그저 출애급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의 성서 내용까지도 모두 지배하는 그것을 말이다. 끝으로 그 일례인 출애급기의 마지막 문장을 빌려본다.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출애급기 40: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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