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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빌리 그래함과 찰스 템플턴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8. 19. 02:00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2018)이라는 미국인 목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목사라기보다는 복음 전도자로 불렸다. 젊어서부터 세계를 돌며 복음을 전파했던 까닭이다. 그는 1952년 한국전쟁 때의 방문을 필두로 우리나라에도 네 차례나 방문해 부흥회를 열었는데,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의 집회는 1,100만 쯤 되는 어마어마한 군중들이 운집했다. 그 광장이 지금은 사라졌기에 문자 그대로 전공후절(前空後絶)의 집회로써 기록되겠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구름 청중은 없었다는 후문이다.



    부흥회가 무엇이가를 보여준 빌리 그래함의 여의도 대부흥회.(1973년 6월) 진짜 어마어마하다.(새삼 깜놀!)



    그와 같은 구름 청중이 모인 것은 당시가 한국 기독교의 전성기였는 데다 사실 선전도 어지간히 해댔고, 또 정부에서도 빌리 그래함의 이름값에 통행금지까지 일시 해제시키는 등 억지 도우미의 역할도 컸지만, 무엇보다 본인의 성가가 워낙에 높았던 까닭이다. 그의 장점은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는 중도 복음주의 사상으로서,(자신은 침례교 소속이었지만) 1954년의 런던에서 열린 그의 첫 해외 연설은 카톨릭, 성공회, 개신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명연설이라는 평가에 힙입어 12주 동안 200만 명의 청중을 불러모으는 대성공을 거두었던 바, 이후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954년 런던 부흥회 광경



    아울러 그는 평화 전도사의 역할도 수행하였으니 정치적 목적과는 무관하게 소련과 중국의 지도자, 심지어는 북한의 김일성과도 만나 평화를 역설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몰몬교)도 이단이 아니라며 포용한 탓에 미국 보수기독교계의 강력한 지탄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무튼 그는 살아생전 카톨릭의 교황 못지 않은 위세와 명성을 누렸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1992년과 1994년 두 차례 평양에 가 김일성 주석도 만났다.(새삼 깜놀!)


    세상에, 성서를 펼쳐보기까지..... 


    그런데 모든 세상 일이 그렇듯, 절대 혼자 잘나 되는 법은 없으니 그의 뒤에는 찰스 템플턴(Charles Templeton, 1915-2001)이라는 조력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년배로서 15살 때 만난 이후 뜻을 같이해 왔는데, 주로 기획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빌리 그래함에 못지않은 명연설가이기도 했으니 언젠가는 빌리를 능가할 것이라는 평가가 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는 대체로 연단에 오르지 않은 편이었고 자신이 세운 교회에서만 연설을 했는데, 그가 단상에 서는 날은 교회는 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여하튼 두 사람은 거의 함께 모든 나라를 돌았으니 그 나라들이 무려 185개 국이었다. 


     

    1954년 6월, 10만 청중이 운집한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 집회에서의 빌리 그래함과 찰스 템플턴(왼쪽)


    1994년 시카고 YFC 사무실에서 세계 선교를 기획하는 찰스 템플턴(왼쪽)과 빌리 그래함(오른쪽). 이 사진은 꽤 유명하다.


    이후 두 사람은 영원한 베프 파트너가 될 듯 보였지만.....




    그러던 어느 날 템플턴에게 갑자기 신앙의 회의가 찾아왔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템플턴이 받아 본 라이프(LIFE) 잡지 속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에는 비가 오지 않아 굶어 죽게 된 아기를 안은 어떤 아프리카 여인이 울고 있었다. 템플턴은 소리쳤다. "이럴 수가 있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 지경을 만들다니.....? 나는 비를 내리게 할 수 없다. 강우는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 아닌가?" 그가 처음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된 것이었다. 이후 그의 눈에 들어온 세상은 모두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현실과 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프리카의 눈물'. 이 사진은 수단 난민의 고통을 표현한 이미지 사진이지만 템플턴이 본 사진은 훨씬 리얼했으리라. 


    '아프리카에서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은 8억 8천 만 명이 넘는다. 새로운 UN 보고서, 팍팍한 현실 공개'


    '성서는 주님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전지전능하고 영원하며 모든 존재하는 것의 창조주입니다. 당신이 질투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찰스 템플턴-


    '세상은 몇 천 년 전에 며칠동안 창조되지 않았다. 세상은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했다.' -찰스 템플턴-

    ☞ 1650년 영국 성공회의 제임스 어셔 대주교는 성서 창세기의 기록을 역산해 하나님이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부터 일주일간 세상을 창조했다고 결론내렸고,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천지창조에 대한 믿음이 됐다. 


    존재냐 사유(思惟)냐의 지속적 싸움, 이것이 찰스 템플턴의 문제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적어도 그는 세상이 몇 천년 전에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빌리 그래함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찰스 템플턴은 기회를 버리고 존재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 또한 성공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51세 되던 1966년 기독교와 완전 결별해 무신론자가 된다. 이 책은 그가 펴낸 '하나님과의 작별'이라는 책으로, '내가 기독교 신앙과 결별한 이유'라는 부제를 붙였다.(국내에도 번역됐다)


    그는 자신을 괴롭혀온 기독교의 문제들에 대한 답을 얻었을까? 



    그가 기독교와 결별한 1966은 그래함이 48세, 템플턴이 51세 되던 해였다. 그래함은 이후로도 그에게 하나님 곁으로 돌아올 것을 간곡히 설득했지만 결국 돌아오지 않은 채 무신론자로 영면했다.(2001년) 사람들은 그가 가끔 'Missing Jesus'를 외친 것을 배교를 후회한다고 여겼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같이 해왔던 사람에 대한 간헐적인 그리움이나 혹은 예수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 못하고 간 것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적어도 나의 경험으로는 그러하다) 빌리 그래함은 작년에 99세로 영면했는데, 예수가 강도와 함께 낙원에 들었는지 알 수 없 듯,(☞ '말 한마디로 구원을?') 그가 친구 곁으로 갔는지 또한 알 수 없다. 



    빌리 그래함은 우리나라 나이로 꼭 100년을 살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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