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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로 구원을?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8. 17. 01:49
* '기독교 전래 시기와 구원의 문제에 관한 잡담(II)'에서 이어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말을 잘 하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로서,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속담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이 '다음' 중국어 사전에는 三寸不烂之舌(삼촌불난지설)로 번역됐다. 뭔가 미심쩍어 주위에 물어보니 옳지 않은 번역이라 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세 치 혀는 썩을 줄 모른다'는 조금은 부정적인 의미로서, 말을 뻔질나게 잘 하는 사람, 말이 청산유수인 사람을 일컫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음'의 해석은 절대적으로 틀린 셈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속담에 깔려 있는 의미는 달변이나 능변이 아니라 말의 진정성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지상 과제, 구원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오류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예수가 직접 구원해준 십자가 위의 강도를 들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오류라고 하는 것은 이 내용이 수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생판 다른 데도 기인하지만, 그 구원의 과정이 별로 설득력 없는 데서도 비롯됐다. 우선 그 각각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처형'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1949년 작품으로 예수의 십자가형을 그린 그림 중 가장 유명하다.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태복음 27:33-44)
위의 마태복음의 내용을 보면 예수는 사형장인 골고다 언덕에서 강도 두 명과 함께 십가가에 매달려진다. 이때 예수는 가짜 신의 아들로 비난을 받는데, 이와 같은 희롱과 야유에 양 옆의 강도들도 동참하며 모욕을 준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내용은 크게 다르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3:33-43)
누가복음에서는 강도 한 사람은 예수를 비웃지만 다른 강도는 예수를 적극 두둔한다. 그래서 그는 구원받게 된다. 누가복음에는 그 얘기가 비교적 길게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얘기는 어느 쪽이 맞는 걸까? 말 싸움에서는 말을 많이 한 쪽이 대부분 이기고 주먹 싸움에서는 많이 때린 쪽이 대부분 이기 듯, 여기서도 길게 서술된 누가복음의 것이 맞는 걸까? 하지만 여기서는 그 같은 단순 평가가 곤란하다. 다름아닌 기독교의 지상과제, 구원을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용의 길고 짧고가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기독교가 구원의 종교라는 것은 앞서 '목사님이 천국 가는 법'에서 충분히 떠들었으므로 여기서는 따로 강조하지 않겠다)
냉정히 평가하자면 오히려 짧게 서술된 마태복음 쪽이 더 힘이 실린다. 그것이 훨씬 강도다워 설득력이 있는 까닭이다. 반면 누가복음의 (구원 받은) 강도는 너무 말이 많다. 비록 강도짓을 하고 돌아다녔을망정 그가 평소에 예수를 존경하고 흠모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쳐도 그는 서두에서 말한 삼촌불란지설의 소유자처럼 청산유수로 떠들어대는데, 그 내용이 전혀 강도답지 않다. 그의 발언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
(그가 예수를 비웃는 행악자를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한마디만 놓고 보면 그는 행악자가 아니라 오히려 성자(聖者)다. 그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며 죽음을 달갑게 받아들인다.(과연 이와 같은 행악자가 세상에 있을까만) 그러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를 지극히 올바른 자로 칭송해마지 않는다. 다시 냉정히 판단하자면 이것은 누가복음 저자의 예수에 대한 평가이지 행악자의 평가가 아닐 터이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복음의 저자는 한 술 더 떠 그 행악자를 구원하기까지 한다. 물론 예수의 권능을 통해서이니 그 대목을 다시 보자면 다음과 같다.
(예수를 비웃은 행악자를 꾸짖은 뒤 그가 예수에게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나는 3년 전 본 블로그를 만들었을 때, 첫 포스팅에서도 이 누가복음에서의 구원의 문제를 언급했었는데, 상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놀랍게도 막가파 두목 최정수는 20년이 지난 지금껏 살아 있었다. 나를 더욱 주목하게 만든 것은 지금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그가 담담히 죄를 회개하며 두꺼운 성경에 얼굴을 묻는 광경이었다. 꽁지머리로써 나름대로 멋을 부린 그의 얼굴 역시 몹시 편안해 보였던 바, 예전의 번뜩이던 광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무튼 그는 지금 이 시각에도 최장기 사형수로서의 기록을 이어가며, '나의 감방을 찾아오신 주님' 어쩌구 하는 따위의 간증도 감방 밖으로 내보내고 있다.
그 프로그램의 취지는 막가파 사건의 재조명이 아니라 사형제 폐지에 관한 논란이었지만, 사형제에 대한 찬반을 떠나 프로그램을 시청한 후의 나의 생각은 복잡했다.
사형수 최정수, 그 얼굴의 편안함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것이 종교의 힘인가?
사람은 회개하면 다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성서를 보면, 십자가의 예수를 인정한 다른 십자가의 강도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죄를 사함 받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여기서 논할 성격의 것은 아니지만, 사실 예수의 사형판결 자체는 부당함이 짙다. 그러기에 판결권자인 유대 총독 빌라도는 몇번이나 소명의 기회를 주었으나 예수는 묵묵부답했고, 반면 유대의 성직자들은 그의 사형을 강력히 요구하였던 바, 결국 극형인 십자가형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예수는 빌라도가 준 구명의 기회를 저버리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니, 이것이 기독교에서 흔히 말하는 인간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른바 '거룩한 대속'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함께 십자가형이 집행됐던 강도 사형수의 경우는 다르다. 언필칭 법의 나라인 로마에서 극형을 받을 정도라면 그 강도는 살인이나 그에 준하는 중범죄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의 존재를 인정한 말 한마디로서 천국에 가게 된다.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그곳을......
이와 같은 생각은 지금도 변함 없다. 다만 지금은 한 발자국을 더 나가 누가복음의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저자의 창작이 아닐까 여기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 그것이 훨씬 개연성 있는 까닭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과거 부흥회에서 만난 어떤 부흥회 목사에의 기억 때문이다. 살인 미수의 강도를 저지른 그는 형기를 마치고 나와 부흥회 목사가 되었고, 거기서 달변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울부짖게 만들었다.(나로서는 가히 놀랄만한 재주로서, 그야말로 '삼촌불란지설'에 어울리는 혀였다)
형기를 마친 마당이니 그의 전력을 문제 삼을 생각일랑 그때나 지금이나 추호도 없고, 정식 목사가 아닌 떠돌이 부흥회 목사라고 해서 격하시킬 생각도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나는 그의 달변을 부러워 하는 사람이다. 다만 한가지, 자신이 하나님께 구원받았다고 하는 발언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못마땅하다.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이유인즉 자신이 회개하고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오로지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울러 그것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도 생각해볼 일이다.
나아가서는 이렇듯 중요한 구원의 대목에 각기 다른 이야기가 써 있는 성서를 과연 신뢰할 수 있는가도 생각해볼 문제이며, 마지막으로는 부흥회 같은 데서 위와 같은 목사가 단체 할인해주는 천국행 티켓으로 과연 천국 열차의 탑승이 가능한지도 생각해볼 일이다.(나는 이것이 모호한 성서의 내용 탓이라 여기고 있다) 좌우지간 그는 부흥회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 천국으로 이끌었다. 돌이켜 보니 그 세월이 참으로 징한데, 문득 낯선 교회의 부흥회 현수막에서 낯익은 이의 얼굴을 본다.
예수를 면박준 오른쪽의 행악자는 지옥에 갔겠지만,(이하 영화 '나자렛 예수'의 스틸컷)
왼쪽의 행악자는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았다.
예수 역시 말 한마디로 그를 구원해 천당으로 이끈다. 이 장면은 사실 복음서나 영화에서 거의 클라이막스에 해당된다. 아울러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한대로 픽션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