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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시대의 기독교, 그리고 신사참배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8. 14. 08:43


    엊그제 식당에서 우연히 뉴스를 보니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 행각이 다시 도마 위에 올라 있었다. 민감한 시절에 오른 민감한 뉴스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종업원을 불러 식사 주문을 했다. 안익태의 친일 행각은 음악가로서 세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선택의 문제일 수 없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해왔던 까닭이다.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음악은 발표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고(동요처럼 암암리에 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극히 제한적이라)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 특질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러함에도 그에게서는 홍난파나 현재명 같은 직접적인 부역의 증거를 찾기 힘들다)


    특히 안익태의 친일 행각은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는 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그의 창씨(에키타이 안, Eki-tai, Ahn)는 당시 나라가 없던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고,(그의 활동 무대는 미국과 유럽이었다) 그가 작곡한 '만주환상곡'이 '애국가' 코러스가 실려 있는 '한국환상곡'과 비슷하다는 것도 억측이다. 알아보니 그가 친일인사로 취급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스승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나찌 독일에 부역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찌 독일과 동맹관계에 있던 일제도 슈트라우스에게 작곡을 의뢰했으며(일본축전곡) 슈트라우스의 애제자였던 안익태도 때로는 이 곡을 지휘해야만 했을 터, 이것은 그가 친일파로 낙인찍히는 계기가 됐다.


    당시 그는 명지휘자로서의 이름을 얻어 유럽 여러 교향악단으로부터의 초청을 받았는데, 1942년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회장에서 베를린 방송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지휘해 자신이 작곡한 '만주환상곡'과 '만주축전곡'을 연주한 것은 그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스승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가 변수로 작용했을 터이다.(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음악회이다) 그는 1946년 스페인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있을 때 미국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나 슈트라우스의 수제자라는 이유로 비자의 발급을 거절당했을 정도로 슈트라우스의 그림자는 컸다.(하지만 그 2년 뒤 결국 필라델피아아 무대에 선다) -이만 줄임-




    마찬가지로 만주국 창립 음악회에서의 안익태


    애국가가 들어 있는 한국 환상곡의 LP 쟈켓(우리로서는 헛갈릴 수밖에 없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제 시대의 음악가가 아니라 그 당시 목회자들의 행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알고 있는 인물들 중에서 일제에 항거한 사람은 주기철 목사 외 두 세 명 뿐이다.(어쩌면 그들이 전부일는지 모른다) 음악가, 혹은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과 달리 목회자들의 부역은 성서적으로 절대 존립힐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표방하는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은 신이 된 일왕을 위한 싸움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반자이 도츠케키'(만세, 돌격)를 외쳤으며, 죽을 때도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 즉 일왕은 자신들의 살아 있는 신이었다. 다만 당시의 일왕 쇼와는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일제는 일왕가의 직계 조상신 '아마데라스 오미카미'(천조대신)와 '메이지 덴노'(명치 천황)을 모신 신사를 만들어 참배토록 했다.


    그런 신을 위해 조선의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가장 먼저 참배를 결의한 총회는 교회의 성세(盛世)로 인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도 불린 평양시에서 개최됐다.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 모인 조선과 간도의 목회자 193명은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므로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애국적 국가의식이므로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솔선수범하고 국민들을 계몽시킴으로써 비상시국 하의 황국신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그리고 곧바로 대표자들이 평양 금수산의 신사를 참배하고 돌아와 자질구레한 안건의 회의를 이었다. 이날 회의장인 서문밖 교회에는 평안도 치안 총책인 평남경찰부장 이하 간부들이 긴 칼을 차고 배석했고, 그 안팎을 수십 명의 경찰과 무술경관들이 둘러싼 살벌한 분위기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조금은 핑계거리가 될는지.....


    다만 이날이 그저 평안했던 것은 아니니 평양 노회 소속 선교사 방위량(邦緯良, William N. Blair)은 가결의 반대 의사를 표했고, 그의 사위이자 만주 봉천 노회 소속 선교사인 한부선(韓富善, Bruce F. Hunt)은 결의가 불법임을 외쳤다. 이에 조선인 30여 명이 호응해 가결 반대와 불법 결의를 소리쳤지만, 두 외국인 선교사가 끌려나간 후로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조선 야소교 장로회 총회 제27회 회의록'

    신사참배의 결의 내용과 참석자 198명의 면면이 자세히 수록돼 있다.


    조선 장로교회 임원들의 신사참배 모습

    1938년 9월 12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으로 총회 참석자들은 이곳에서 절을 하고 손뼉을 치는 참배 의식을 행했다.


    평양 금수산 신사

    능라도와 을밀대가 바라다보이는 풍광 빼어난 이곳에 광복 후 김일성의 별장이 들어섰다.



    같은 해 5월 목포양동교회에서 개최된 전남 노회에서 벌어진 신사참배 결의는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으며, 평양 서문밖 교회와 비슷한 내용의 결의안이 작성되었다. 이상은 결의문이 온전히 남아 수치(羞恥)를 온전히 증명하고 있는 곳이지만 나머지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모두가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신사참배가 결의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결의가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은 사실 아무런 핑계거리가 못 될 터, 그들은 우선 하나님과의 약속인 십계명의 첫째 조항, 즉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가장 중요한 약속을 위반했다. 이어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못하며', '그 앞에서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는 둘째 조항과 셋째 조항도 모두 어겼다.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이 상실된 것이며 신앙의 정절이 상실된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쯤되면 신앙 자체가 존립할 수 없을 터, 그런데 그들은 대체 무얼 바라 거짓 증언을 이어가며 목사짓을 지속해 나갔을까?


    목적은 당연히 돈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비하해 부르는 말도 엽전이었다.(이것이 목회자들의 행태에서 나왔다는 말도 있는데, 해방 이후로도 한동안 한국인의 비칭으로 불려진 이 말이 지금은 사라진 듯해 참으로 다행히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조선인 목사들은 그야말로 돈을 개 같이 벌어 정승처럼 썼으니 조선 장로교회는 15만 317원 50전을 국방 헌금으로 헌납했다. 전투기 1대와 기관총 78정을 마련할 수 있는 거금으로서 일제는 실제로 이 돈으로 전투기를 만들었으니 이름하여 '조선 장로호'였다.



    '조선 장로호' 전투기

    1942년 9월 20일, 일제는 경성운동장에 80명의 장로교 대표를 불러모아 전투기와 기관총의 헌정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전투기에 '조선 장로호'라는 이름을 붙여줬다.(목사님들이 얼마나 감격했는지가 이를 보도한 '기독교신문'에 전투기 사진과 더불어 실렸다)



    감리교가 이에 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투기 3대를 마련할 수 있는 21만원을 헌납했던 바, 전투기의 이름은 당연히 '조선 감리호'였다. 돈은 신도들의 헌금 및 교단 소속 교회를 병합한 자금으로서, 그들은 군소 교회를 병합하고 그 폐지된 교회의 부동산을 처분하는 방법으로 자금을 충당하였다. 단기간에 거금을 마련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었다.(웬지 짠혀! )


    그들 기독교 목사들은 당연히 일제에 의해 정승 대접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박희도와 정춘수는 놀랍게도 3.1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중의 일원으로 기독교를 대표했던 사람이었다. 박희도가 주로 글로써 친일을 한 반면(친일 잡지 동양지광을 창간) 정춘수는 몸으로 보여준 케이스이니 교인 50명을 이끌고 부여 신궁 조영 자원봉사를 다녀오고, 교회의 종과 철문까지 뜯어 헌납하는 등, 이른바 보국성전(報國聖戰)에 모범을 보였다. 아울러 그는 전투기 대금을 마련해 일제에 전달한 장본인이기도 했는데, 이 비행기들은 실제로 가미가제 특공대들에 의해 사용돼졌다는 후문이다.


    그의 행위 중 가장 경악스런 일은 신도들과 함께 일장기 머리띠를 두르고 단체로 뛰어 가 남산에 있는 조선 신궁을 참배한 일로서, 이를 본 사람은 일본인조차 혀를 내둘룰 지경이었다고.....(광복 후 설 땅이 없어진 그는 같은 부역자인 명동성당 노기남 대주교를 통해 천주교로 개종한 후 숨어 살았다 하는데, 굳이 천주교로 개종한 이유가 궁금하다. 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은 진실한 신자? )



    일제의 조선 신궁

    1912년 일제는 남산의 국사당과 한양도성 성벽을 허물고 대규모 신사를 조영했는데,


    당시의 계단 흔적을 최근까지 찾을 수 있었다.


    조선 신궁 입구의 도리이

    신사 건물과 도리이를 비롯한 모든 건축물들은 광복과 더불어 모두 철거되고 불태워졌지만,


    그 잔재는 지금도 남아 있다. 광복 후 신사 부근에는 엉뚱하게도 이승만 대통령의 대형 동상이 세워졌다가 4.19 의거 때 철거되고 지금은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정춘수의 동상이 청주 3.1공원에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세워졌었는데 다행히 최근 철거됐다. 공원에는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충북 출신 3.1운동 민족대표 6인의 동상이 세워졌으나 그중 정춘수의 것이 빠지게 된 것이다.



    이상 변절 목사들의 배교 행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으니 1940년 10월 2일 감리교회는 다음과 같은 '개혁안'을 채택해 공표한다.(중요한 내용만 발췌함)

     

    - 대동아공영권과 내선일체의 원칙을 철저히 인식시킨다.

    - 기독교의 형제애 사상은 팔굉일우(八紘一宇)[각주:1]에서 실현됨을 철저히 인식시킨다.

    - 충성과 애국심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정신과 하나임을 철저히 인식시킨다.

    -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학교육의 기초로 삼되, 서구화 과정에서 혼입된 유태인 사상이나 이교적인 사상과 관례를 제거하고 동양 성현의 전통과 사상에 따라 복음을 해석한다.

    - 교인은 될수록 보국대에 지원하거나 지원병에 나선다.

    - 방첩활동에 교회가 앞장선다.

    - 조선감리회와 일본감리회의 병합을 실현한다.


    당연히 장로교회도 빠지지 않았으니 1941년 다음과 같은 '전시체제 실천성명서'를 공표한다.


    - 황도(皇道) 정신의 체득

    - 내선일체(內鮮一體) 완수

    - 난국타개 극복신념의 강화

    - 당국 지도 절대신뢰

    - 전시생활 실천

    - 시국 경제체제의 실천

    - 애국미 헌납

    - 금속물 공출

    - 일본적 기독교 건설

    - 구미 의존 구태 잔영의 공제(외 다수)


    아울러 이를 적극 실천하였으니, 1942년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열린 제 31회 총회의 회의록에서는 신도 전원의 신사참배, 전승(戰勝)기원 예배, 후까이(深井) 고등경찰과장 청빙 시국강연, 조선군 보도부장 구라시게(倉茂) 청빙 시국강연,(제목: '일본인의 군인') 무라시기(村岸淸彦) 청빙 강연(제목: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자세') 후 국방헌금 등을 결의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이 보고서에서는 교회 종 1,540개, 유기 2,165점을 모아 만든 12만여 원을 헌납했다는 내용도 실렸다.(으~ 갈수록 가관임 )


    천주교는 일찌감치 배교하였으니,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를 파문시키는 재빠른 행보를 보여 일제의 환심을 샀다.[각주:2] 이후 노기남 천주교 대주교는 바티칸의 허락에 힘입어[각주:3]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매월 1일 신도들을 이끌어 조선 신궁에 참배했고, 매주 황군 무운장구의 미사를 드렸으며, 매일 부상자와 전사자를 위해 기도했다. 아울러 신도들에게는 생활 절약을 통한 국방헌금을 강요하였던 바, 마침내 전투기 1대 값을 헌납할 수 있었다. 


    또 이들 기독교 단체들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자신들의 교회나 성당, 혹은 전국 각지를 돌며 징용을 독려했다. 그리하여 조선의 많은 젊은이들이 말 잘하는 그들의 꾐에 빠져 전선으로 갔으니, 이중에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 자도 부지기수였다.(확실한 연관성을 밝히기는 힘들지만 중국 신서전선에서 지원병 최초로 전사한 이인석, 그리고 가미가제 출격 1주일 전 일제가 항복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한영재도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가미가제의 출격

    특공대원의 처음이자 마지막 출격을 여학생들이 사쿠라를 흔들어 배웅하고 있다. '산화(散花)한다'는 뜻은 사쿠라 꽃이 진다는 의미이다.


    자살 폭격에 피해를 입은 미 항모 렉싱톤 호

    가미가제는 공격 전 대부분 요격돼 실제적으로 미군함에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지만 가끔 이와 같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자살 특공대 중에는 조선인 젊은이도 있었다. 



    이상의 신사참배에 앞장 서고,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몬 자들 가운데는 광복 후 이 땅의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가 된 사람들도 다수 있다. 그중 한 사람은 말년에 그 사실을 고백하고 참회해 광명을 찾았지만,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와 대립했던 한 친일목사는 죽기 전까지 끝내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 보수신학의 태두로 우뚝하다.(다시 귀찮아지는 게 싫어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들이 누구인가는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라 본다)


    솔직히 말해, 내가 알고 있는 주기철 목사를 포함한 4명의 목회자 외에는 모두 자신의 신 하나님을 저버린 배교자들로 태양 아래 얼굴을 들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광복 후 다시 민족의 지도자 어쩌구하며 버젓히 세인들 앞에 섰으니 기독교 세력을 지지하는 미군정과 이승만 독재 정권의 덕분이었다.(그 버러지 같은 자들의 이름을 일일히 열거할 가치도 없거니와 이미 양심은 팔아먹은 자들이니 양심을 논할 필요는 더더욱 없을 듯 )


    그들이 배교한 이유 역시 돈 때문으로, 그 돈에 대한 집착은 광복 후 미군정에 빌붙어 일본의 적산 재산들을 얻어내는 재주를 부렸다. Y교회, K교회 등 해방 후의 대형 교회들은 모두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후 다른 자들이 박정희 독재에 빌붙어 부동산을 얻어냈다.(이를테면 C 목사가 69년 3선 개헌을 지지한 댓가로 여의도 땅을 얻어낸 것이나, 미국에서 본 조찬기도회를 한국에 도입, 66년부터 국가조찬기도회를 이끌었던 K 목사가 10월 유신을 지지한 댓가로 얻어낸 정동의 구 러시아 대사관 자리 등이 그것이다) S교회와 C교회는 강남 개발 정보를 입수해 발 빠른 행보로써 한몫을 잡은 케이스였다. 


    5.18의 피가 채 씻기지도 않은 어느 날, 전두환 국보위 위원장은 22명의 유명 목사들을 호텔로 불러들여 조찬기도회를 가졌다. 이것은 '전두환 국보위 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라는 제목으로 TV 중계까지 됐는데, 이들은 사망 165명, 실종 300여 명과 3,140명의 부상자들 만들어낸 희대의 악마를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영도한 여호수아에 비유하며 축복기도를 올렸다.(따지고 보면 그건 옳다. 여호수아도 못지 않은 애꿎은 살상을 저질렀으니.... )



    1980년 8월 22명의 저명한 목사들이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에 참석, 악마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5.18이 일어난지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지금까지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잘못을 뉘우친 사람이 없다. 



    이와 같은 비양심 목사들이 요즘 다시 일본을 찬양하며 설친다. 작년 그 난리를 친 뒤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작년 10월 광화문 광장에 새카맣게 모인 사람들은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다름아닌 시위대의 질서정연함에 놀란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시위 모임이 아니라 교회의 신사참배 80년을 기해 이를 반성하는 기도회 자리였다. 잠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니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지만 단상에 앉은 자들은 대부분 늙고 몸집이 비대한 남자 목회자들이었다. 당시 그들이 둔중한 몸으로 힘겹게 십자가를 메는 퍼포먼스를 보며 문득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참, 괜한 고생들 하는구나. 때가 되면 또 예외 없이 부역할 것들이....."

    나의 생각에 근거는 없다. 하지만 이제껏 해온 꼴을 보면 나의 생각은 필시 맞을 것이며, 지금 그 꼴을 보고 있기도 하다. 그 친일목사, 막말목사들에 분노하며 부역의 한국 기독교사를 되짚어 보았다.

     



    그저 되풀이되는 일과성 행사라는 생각밖에.....


    동방요배 광경

    일제시대 조선인들은 일왕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해야만 했다. 예장 총회는 이 동방요배로부터 시작됐으며 기미가요와 황국신민서사도 제창했다.(이해가 안됩니다.대체 왜 그랬냐구요? 차라리 낙향해 사시지.....)


     

    1943년 4월 조선기독교 대표들은 일본 나라현의 가시하라 신궁까지 가 신사참배를 했다. 구색을 맞춰 군복까지 갖춰 입고서.....


    전쟁 위안부들은 전장으로 가기 전 신사참배부터 해야 했다. 1943년 나고야 신궁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왼쪽으로 '해협을 건너온 소녀들. 조선 여자 근로정신대'라는 글씨가 보인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그 수가 엄청남을 알 수 있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이제껏 이들 전쟁 위안부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1. 전 세계가 한 지붕 아래 있다는 뜻으로, 일제가 표방한 대동아공영권을 상징한다. [본문으로]
    2. 안중근은 개화의 차원으로 19세 때 천주교에 입교,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나 이토 히로부미 처형 후 조선천주교 책임신부였던 프랑스 뮈텔 주교에 의해 살인자로 파문당한다. [본문으로]
    3. 왜놈들의 로비에 당한 로마교황청은 1936년 신사참배를 이단에서 배제하는 선언을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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