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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도행전과 금강삼매경론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7. 26. 23:51


    사도행전(Acts)은 신약성서의 5번째 책으로서 예수 승천 후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의 전도행각을 서술한 글이다. 이 사도행전은 흔히 신약성서의 유일한 역사서로 분류된다. 나 역시 앞서 '솔로몬의 성전과 UFO'의 챕터에서 열왕기(King's)와 사도행전을 신구약의 가장 재미있는 역사서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율법서로의 가치도 느껴진다. 거기에서 보여주는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의 올곧은 행위는 곧 율법의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인데, 순교한 스테판의 경우는 그 올곧음이 지나쳐 무섭기까지 하다.(솔직히 좋게 보이지는 않음)


    이를 불경에 비유하면 율(律)에 해당된다. 참고로 말하자면 불교의 경전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즉, 고타마 싯타르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열반에 들기까지 45년 동안의 가르침을 모은 경(經), 그를 스승으로 받든 제자들의 승가의 계율인 율, 불교의 전파와 함께 각지에서 역동적으로 펼친 불교교학의 이론인 논(論)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신라 원효대사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제법 뿌듯하다.(학교 다닐 때 배운 원효의 저작 '금강삼매경론'과 '대승기신론소' 기억나시죠? )                                            


    그런데 사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논이 아니라 소(疏)다. 즉 금강삼매경론을 나름대로 해석한 '금강삼매경론소'라는 주석서인 것이다. 원래 금강삼매경론은 중국 남북조시대부터 당나라 초까지 유행했던 여러 이론들을 모아 엮은 경전이었으나 막상 중국에서는 그 가치를 모르고 있었다. 그와 같은 책에 원효가 처음으로 주석을 붙이고 이것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알려지게 되었던 바, 논으로 추앙되어 불려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논의 칭호를 얻은 것은 단지 최초의 주석서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의 학승(學僧)들은 그 해석의 유장함에 놀라 마명(馬鳴, 아슈바고샤)이나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에게서나 얻을 수 있는 경지의 해석이라 극찬해 마지않았으므로 자연히 논의 대접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 요지는 만법귀일(萬法歸一), 혹은 만법귀진(萬法歸眞)의 사상이다. 삼라만상은 하나로서 결국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가 바로 대승(大乘)의 불성(佛性)이니 아둥바둥 살지 말고 불성을 깨달으라는 것이었다.



    분황사 보광전과 강당지(왼쪽)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절로 원효는 이곳 강당에서 금강삼매경론을 설법했다.(운 나쁘게 보광전 일대가 공사중이어서 한화 리조트 마이트립플래너의 사진을 빌렸다)

     

    경내의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 받침돌

    원효가 자신의 저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화쟁(和諍) 사상을 주장한 까닭에 고려 숙종 때 그를 '대성(大聖) 화쟁국사'로 추존하여 그가 주지로 있던 분황사에 화쟁국사비를 세웠다.


    화쟁이란 백가쟁명의 다툼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화합의 이론으로, 비석에는 그에 관한 글이 새겨져 있었을 듯하나, 비는 망실되고 받침돌은 팽개쳐진 것을 추사 김정희가 찾아내 고증했다.


    추사는 대좌를 찾아내 '차화쟁국사지비석 추사 김정희'(此和諍國師之碑石 秋史 金正喜)의 글자를 새겼다.<사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출처: 법보신문>


    '대동금석서'에 전하는 화쟁국사비의 비문 일부

    <사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경내의 모전삼층석탑(국보 30호)

    신라 최초의 석탑으로 중국의 전탑(塼塔)을 모방해 만들었다. 그래서 모전(模塼) 석탑인데, 돌을 다듬어 벽돌처럼 만들었다는 게 더 대단해 보인다. 본래 9층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다. 4면의 인왕상 역시 신라 최초의 인왕상이다.


    경내의 돌우물


    절 밖에 있는 당간지주

    심국사기에 의하면 분황사도 황룡사 못지않은 대찰이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유물이라고는 위의 것이 전부이고, 절 밖 60m에 있는 당간지주만이 화려했던 과거를 증언한다.



    원효가 말하는 대승의 불성을 쉬 이해하기 어렵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승적 차원으로 어쩌구 저쩌구....'하는 그 대승을 생각해도 무방하다. 다음(Daum) 국어사전은 대승을 '사사로운 이익이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라 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말처럼 쉽지는 않을 터, 오죽하면 원효는 대승의 불성을 열반에 비유했으랴?


    아무튼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의 설법을 통해 신라사회를 교화시키고 올바르게 이끌어나가려 했던 것이니 동시대의 선덕여왕은 그 설법을 경청해 나라를 올바로 이끌었으리라 생각된다.(분황사·芬皇寺는 '여황제의 분 향기가 나는 절'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초기부터 자주 왕림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절도 월성에서 가깝다)



    그렇다면 미실은.....?

    드라마는 재미있었지만 미실은 역사적 인물이 아니다. 미실은 1989년 한학자 박창화가 일본 왕실도서관의 것을 베껴썼다는 '화랑세기'(통일신라 김대문의 저작) 필사본에 나오는 화랑 출신의 왕족 여인으로 소설가 김별아가 소설 '미실'에서 권력욕의 화신으로 승화시켰는데, 이를 MBC 드라마국이 더욱 '센 언니'로 재탄생시켰다. 박창화의 화랑세기 필사본은 결국 위서(僞書)로 판명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소설과 드라마 명작 두 편이 나왔다.



    그런데 내가 정작 말하려고 하는 것은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이 아니고 그의 또 다른 저서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이다. 금강삼매경론은 이 대승기신론소의 바탕 위에서 저작된 것이므로 대승기신론을 이해하지 않고는 금강삼매경론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疏)라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주석서를 말함이니 이 책은 대승기신론의 주석서가 되겠는데, 원저자는 인도의 마명보살이다.(AD 2세기) 비록 주석서이긴 하지만 원효의 소는 그 해석의 유장함에 중국에서도 따로 해동소(海東疏)라는 이름으로 차용했으며 당나라 법장의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수나라 혜원의 '대승의장'(大乘義章)과 함께 3대소(三大疏)로 불린다.



    세계 최고(最古)의 대승기신론소(?)

    2015년 1월 3일, 중앙일보는 중국 투르판에서 현존 최고본인 돈황본에 200년 이상 앞서는 원효의 대승기신론소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보도했는데, 사진을 미처 확보하지 못한 듯 조선 초(1457년)에 금속활자 갑인자로 인쇄한 보물 1713호 대승기신론소의 사진을 실었다.


    돈황의 얼굴 막고굴(莫高窟)


    돈황 천불동 계곡

    영국의 고고학자 오럴 스테인(1862-1945)은 세 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탐험하며 막고굴과 천불동 등의 불교유물을 쓸어갔는데, 그 가운데 원효의 대승기신론소가 포함돼 있었다. 원효의 사상이 이곳 중앙아시아까지 미쳤다는 방증이다.



    런던에서 발견된 대승기신론소 필사본 조각

    2010년 중국의 딩위엔(定源) 스님이 런던 브리티시 도서관의 돈황문서(스타인 문서)에서 발견한 이 필사본 조각은 지금까지 대승기신론소의 가장 오래된 저본이었던 일본의 겐로쿠 9년 본에 최소 700년 이상 앞선다.


      대승기신론소 해인사본

     


    마명의 대승기신론은 워낙에 이름이 높던 책이라 당대에도 주석서가 1,000권이 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원효의 주석서가 인기가 특히 많았던 것은 그의 사상이 편벽고루함이 없이 화쟁(和諍)과 회통(會通)의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세계와 인간이 한마음, 즉 일심(一心)에서 비롯되었다 보았고, 그 한마음으로부터 나타나는 진심여(眞心如)[각주:1]와 심생멸(心生滅)[각주:2]이 또한 하나로써 존재한다고 보았다. 다만 현실 세계인 심생멸이 생멸(生滅)의 결과로써 무수한 개별적 존재가 나타나게 되고 그것이 기저(基底)의 한마음을 알지 못함으로써 분열·대립하게 되는 것이었다.(여기까지는 좀 어렵다


    원효의 '기신론'은 이와 같은 분열과 대립을 해소하고 본래의 진심여를 회복하는 방편이었다. 원효는 중생과 불보살(부처와 보살)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시 일심이므로 중생도 번뇌와 무명(無明)[각주:3]의 심생멸을 지우고 진심여의 불성과 여래장(如來藏)[각주:4]을 되찾으면 누구든 부처(깨달음을 얻은 자)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항상 진심여를 지향하는 수행을 해 보리(菩提)[각주:5]를 깨닫게 되면 번뇌에서 벗어나고, 나아가 성불할 수도 있지만, 늘 지지고 볶고 하는 심생멸의 끈[각주:6]을 놓지 못하면 생로병사가 되풀이되는 무상(無常)의 세계에서 끝없이 머물게 된다는 것이었다.(이건 좀 쉽죠? 방법을 가르쳐드렸으니 한번 따라 해보세요. 성불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는 듣게 됩니다 )


    간단하나마 원효의 대승기신론을 풀어봤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아는 불교 상식은 모두 원효의 사상에서 비롯된 듯하다. 학자들은 원효의 사상을 하이데거나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비교하기도 하는데,(그에 관한 책도 꽤 나와 있다) 비슷한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분명한 건 우리 역사상 세계사적으로 그만한 족적을 남긴 사상가가 없다는 것이니, 우리나라에서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는 절대 과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면 뭐하랴? 꿰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으니 아래와 같은 인간 말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 또한 수행하며 살련다.(바울의 행적을 쫓다 길을 잘못 들어 600년 후의 신라 땅으로 왔다. 그렇지만 나름 의미 있는 시간 여행이었음)


          

       


                                           

     

                                                              

    서울 효창공원에는 이 위대한 사상가를 가리는 동상이 서 있다.(서울 원효로와 원효대교도 그의 법명을 딴 것이다) 이 동상의 뒷면에는 1969년 대한항공 회장 조중훈이 바쳤다는 돌판이 붙어 있다. 바쳤다는 것은 아마도 돈이겠지만 그의 진여(眞如)와 화쟁(和諍) 정신을 기리는 마음도 포함되었으리라 본다. 그런데 그의 며느리와 손녀들은 대한민국 국민의 공적(公賊)이 되어 연신 고개 숙이기에 바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지 않으면 무용(無用)하듯 사표(師表)가 있어도 따르지 않으면 무익하기 한량없다.                                              

    1. 본래의 참된 모습 [본문으로]
    2. 온갖 생각이 나타나고 없어짐 [본문으로]
    3. 무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는 무지의 상태 [본문으로]
    4. 범부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태와 태아에 비유하여 하는 말 [본문으로]
    5. 1.불교 최고의 이상인 불타 정각의 지혜 2.불타 정각의 지혜를 얻기 위해 닦는 도 [본문으로]
    6. 탐욕, 시기, 과시, 출세, 부귀영화 등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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