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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전래 시기와 구원의 문제에 관한 잡담(I)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7. 22. 03:30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정확히 언제 전래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기독교회사'(민경배 저/연세대학교 출판부)라는 책을 폈더니 머릿말 다음 장이 곧바로 신라 시대였다. 그때 전래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당나라를 통해 전래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에서부터 본문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가정은 한때 당나라에서 유행한 네스토리우스계(系) 기독교인 이른바 경교(景敎)가 양국간의 활발한 왕래에 따라 신라에 유입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당시 기독교가 한반도에 유입되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 중국에서 유행한 경교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포스팅했으므로 특별히 궁금하신 분은 「창세기의 수수께끼 단어 '우리',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서」의 등을 참고해 주시길 바라며, 여기서는 간단히 그 때의 사진 몇 장만을 올리도록 하겠다. 아래 사진 1, 2, 3은 북조(北朝) 발해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경교의 영향 가능성이 다분한 유물이지만, 사진 4는 신라에 기독교가 전래됐다는 것을 조작하기 위한 가짜 유물이다.

      

               

      연해주 아브리스크 성 터에서 발견된 동(東)시리아식 십자가.

      진흙으로 빚은 것으로 네스토리우스교의 십자가로 추정된다.

     
    http://cfs11.blog.daum.net/image/8/blog/2008/04/06/20/13/47f8b054ecf3c&filename=02116300012008040370_5[1].jpg

    발해 동경용원부 터에서 발견된 삼존불상. 주불과 협시불의 목에 걸린 십자가 문양이 뚜렷하다.


     

    신라시대 기독교 전래 증거로 활용되어지고 있는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의 가짜 돌 십자가(25.4x24x9cm)



    아울러 위 책에서는 당시 당나라 수도 장안에 세워졌던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 로마 경교의 당나라 포교 비문)'가 1917년 한국의 금강산 장안사에서도 발견되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실어 마치 네스토리우스 기독교가 신라에 들어온 것처럼 설명하려는 의도를 보였으나, 이 또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상식적으로도 한반도 땅에 경교 비문이 세워지려면 당연히 '대진경교유행신라비'였어야 됐다) 그래도 학자적 양심에서인지 주석을 달아 '일설에는 고든 여사가 비밀리에 세워 놓았다는 말도 있다'는 문장과 함께 일본에서 출간된 관련 서적을 언급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서안(西安=장안) 대진사(大秦寺)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세워진 781년은 통일신라 선덕왕 2년이라며 마치 그 즈음에 한반도에 기독교가 유입된 것처럼 언급된 글도 더러 있다. 하지만 이것은 참으로 사기성 짙은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와 같은 글을 보면 장안사 비석이 자칭 기독교동점사(基督敎東漸史)의 권위자 엘리자베스 고든(E. A. Gorden)이 조선 땅에 세운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복제비임을 언급하고 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다만 저자가 모르고 썼을 가능성은 있다)

     

    ~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장안사 복제비의 탁본이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데, 탁본자가 김양선 박사로 되어 있다. 위의 돌 십자가를 비롯한 가짜 기독교 유물을 수집해 전시한 분이다. 수상한 마음에 탁본을 살펴보았더니 역시 장안사 비석의 습탁본이 아니었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의 문제의 유물들

    위의 돌 십자가, 경교 성서, 마리아 상, 십자무늬장식, 장안사 모사비 탁본을 전시해놨으나 이중 믿을 수 있는 것은 영인본 경교성서 뿐이고 나머지는 저의가 의심스러운 가짜들이다.


    1625년 중국 서안에서 발견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

    현재 이 비는 비림(碑林)으로 옮겨졌고 이곳에는 모사비가 세워졌다. 

     

           

    1930년에 떴다는 숭실대박물관의 금강산 모사비 탁본/2006년 9월에 뜬 비림의 진본 탁본.

    두 탁본을 비교해 보면 숭실대박물관 탁본 오른쪽에 공기가 들어간 것 외에는 99.9% 일치함을 알 수 있다. 특히 탁본 하단의 글자는 시리아어인 에스트란게로 문자로 아래의 확대 사진을 보면 이것까지 완전 일치를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숭실대 탁본은 모사비에서 뜬 것이 아니라 진품의 탁본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http://ssu.ac/kr/web/museum) 측의 해명을 기대해본다. 


    비석에 새겨진 에스트란게로 문자. 경교 승려들의 이름을 쓰고, 일부 한 자 이름을 병기(倂記)했다


               

       

    서안 비림(碑林)에 옮겨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와 위키피아의 탁본 


     1930년 대의 장안사

    대가람 장안사는 한국전쟁 때의 폭격으로 전부 소실되고 지금은 풀만 무성하다 하니 그곳에 있었다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찾을 길은 더욱 요원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석물(石物)이었으니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리라 본다. 그런데 고든 여사는 왜 하필 이 심심산골에 비문을 만들었을까? 절 이름이 중국의 장안과 같아서였을까?



    일본 다카노야마(高野山)의 모사비

    고든 여사는 경교와 일본 진언종(眞言宗)의 연관관계를 확신하고 1911년 진언종의 본산인 와카야마현 다카노야마원(院)에 모사비를 세웠다.(그녀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고든은 신라의 경교 전래도 연구했으나 금강산 장안사와 불국사 불상, 석굴암 등에서 약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1914년의 논문) 외에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금강산 장안사에 모사비를 세운 것은 일본과는 반대로 그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외려 경주에 세우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진품과 일본 모사비의 이수 비교

    충실히 모사한 노력은 엿보이나 글자에서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당시는 컴퓨터 수지를 뜰 수도 없는 시절이므로 만일 장안사 모사비가 있었다 해도 위의 것(숭실대 탁본)과 같은 99.9%의 싱크로율을 보이지 못했으리라.



    모사비 이수의 십자가

    들리는 말로 고든은 기독교의 한국 전래를 규명하겠다는 의도로(혹은 연구 기념으로) 장안사 모사비를 세웠다고 하나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다카노야마(혹은 중국 서안)의 모사비에 착안한 누군가의 픽션이 아닐까 한다. 이 사진은 그에 대한 방증으로, 이수의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일본 학자 가와구찌 가즈히꼬(川口一彦)다. 그는 아이치현의 교회 목사이기도 한데, 다카노야마 비문 등을 연구해 <경교라고 하는 도(道)> 등의 책을 출간했다.(우리나라에서도 발간됨)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연구는커녕 그 어떤 사람도 장안사 비문을 본 사람이 없다. 목격자는 오직 김양선 박사 한 사람 뿐이다.



    위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으나 다수가 신라의 기독교 전래 가능성으로서 드는 것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승려 혜통(惠通)에 관한 내용이다. 신문왕 때의 승려 혜통이 '마귀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라벌에서 멀리하게 했다(盡敎魔外遠京華)'는 것인데, 여기서 '외도'가 바로 네스토리우스계 기독교인 경교를 말한다는 것이다.(시기가 엇비슷한 데서 비롯된 착상, 혹은 착각인 듯하다)


    하지만 그 시기를 엄밀히 따지자면 대당유학생이었던 혜통이 귀국한 것은 665년으로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세워진 781년에 백년 이상을 앞선다. 오히려 시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물론 경교는 그보다 앞선 635년, 중국에 처음 전래되었지만 그것이 불과 30년 만에 경주 땅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삼국유사의 문장은 아무런 정황 증거도 되지 못한다는 말인데, 결국 신라에 경교가 들어왔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다음으로는 순서대로 고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대내외로 개방적이었던 고려시기야말로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다분한 때이다. 다 알다시피 고려가요 쌍화점에는 개성에 떡가게를 개업한 외국인이 떡 사러 온 고려 여인의 손목을 잡고 육체관계를 조르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 아랍 남자 회회(回回) 아비가 기독교계 시리아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노릇이다.(시리아는 서방의 기독교가 최초로 전래된 곳으로서 그곳의 에뎃사에는 역대 십자군의 본부가 있었다)

     

    하지만 책에서는 이런 소리는 안 나오고 당시의 대제국이었던 몽골의 수도에 파견된 교황 이노센트 4세 때의 선교사 루브르크(Guillaume de Rubruc)를 주목한다. 그 루브르크가 압록강까지 왔다 고려인을 만난 기록이 서방에 처음 알려진 고려(카울레, Caulej → Coree → Korea)였으며, '비록 기독교가 몽골에 와서 별다른 성과를 남긴 것이 없었으나 고려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 교회사와의 관련이 의미 깊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자기만족 조의 글이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곧장 1592년의 임진왜란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침략전쟁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휘하 병사들은 '거의 전부가 기독교인'으로, 고니시의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였다는 것과, '모골이 섬뜩하지만 임진왜란과 기독교는 어떤 형태로든 역사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참고로 일본의 기독교는 1549년, 가고시마에 상륙한 유럽의 동방선교교단 '예수회'로부터 전래됐다 ☞ '침묵하는 예수 그리스도') 하지만 그것에 어떤 의미는 두지 않았던 바, 다행스럽게도 '일본 침략군과 함께 스쳐간 기독교' 정도로 기술된다.

     

    내가 다행이라고 한 것은 과거 어느 넋빠진 개신교 목사가 '임진왜란은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하나님의 성전(聖戰)'이라고 떠들던 기억 때문인데,(지금은 지워졌지만 그 교회 홈페이지에는 고니시의 진로를 막은 이순신 장군을 사탄이라 칭했다) 요즘도 이와 같은 망동의 목회자는 심심찮다. 아무튼 그 책에서도 기독교의 한국 전래 시기는 일반적 시각과 다르지 않았으니, 천주교의 경우는 1784년 이승훈의 세례를, 개신교는 1884년 알렌의 제물포 상륙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한반도의 기독교 전래를 조금이라도 당겨보려는 부질없는 노력의 흔적들이 우리나라 곳곳에 남아 있다.


    창원시 세스페데스 공원

    일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소속의 스페인 신부 그레오시오 세스페데스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에 의해 1594년 12월, 종군신부 자격으로 곰내(웅천)에 상륙한다.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오른쪽이 세스페데스, 왼쪽은 동행했던 일본인 후칸이다.


    공원 안 세스페데스 기념비

    위의 내용과 왜병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 공원을 개장할 때 전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인사가 대거 참석했는데, 과연 기념할 만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웅천 왜성 천수각 지

    세스페데스는 이곳 웅천성에서 일본 예수교 교구장 고메즈에게 2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속에 조선인 선교에 대한 착상이라는가 조선인의 비참한 실상 등에 대한 내용은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그의 편지는 포르투칼 아주타 고서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웅천 왜성 오르는 길

    웅천 왜성은 고니시가 수축한 성으로, 정상부근에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미사가 집전된 성지입니다'라는 천주교 마산교구 성당에서 세운 안내팻말이 세워져 있다. 왜군들은 낮에는 죄없는 조선인들을 학살하고 밤에는 이곳에서 세스페데스 신부의 집전으로 미사를 드렸다는 것인데, 과연 어떤 내용이었을 지 궁금하다.(그런데 그런 팻말을 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적어도 성지는 아니지 않은가)




    한국 최초 성서 전래지 마량진 포구
    1816년 9월 영국 해군 마리 멕스웰 대령이 이끄는 함선 2대가 이곳에 정박했다가 마량진 첨사 조대복에게 성서를 전해주고 간 곳이다.(이 배는 조선 해안에 나타난 기록상의 최초의 이앙선이다) 인근에 공원을 조성해 영국 함선과 조선 판옥선을 복원 전시해 놓았으며 2016년 전래 기념관이 건립됐다.(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라는 말도 있다. - -;;)


    전시품인 킹 제임스 성서(KJV)의 원본

    당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KJV의 초판 원본(1611년 판)을 서천군에서 3억 원에 구입해 전시해놨다. 당시의 성서 전래 사실은 그들이 돌아가 작성한 '한국 서해안 항해기'(1818년)에 실려 있는데, 그 성서에 관한 내용이 정약용의 '다산 시문집'에 나온다. "그 책을 이품 이상의 재상들이 돌려보았으나 알 수 없었던 바, 몇 장을 뜯어 아랫사람들에게 알아보게 했다." 이후 그 책에 관해 알려진 것은 없다.


     

    문제의 도마분처상(썰렁한 농담이거나 작정한 사기거나)

    1987년 8월 한 기독교인에 의해 경북 영주에서 발견된 이 목 없는 불상은 예수의 제자 도마의 상이라 해서 지금껏 설왕설래되고 있다. 도마가 이곳까지 왔던 흔적이라는 것으로, 그 증거로 드는 것이 오른쪽의 '도마'라는 히브리어와 이 상의 아래 쪽에 있다는,(하지만 찾기 어려운)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라는 각자이다.


    '도마'라는 히브리어?

    그렇다고 해도 이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도마는 당대의 국제어인 헬라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건 그 당시에 쓰여지지 않은 현대 히브리어 형태라고 하는데, 만일 이것이 정말 현대 히브리어 '도마'라면 이것을 새긴 놈은 광신자 이전에 무식한 사기꾼으로 비난받아야 될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도마(תומס)로 보이지는 않는다. 감실(龕室) 부처를 새기려 했다는 주장이 맞을 듯싶다.


    ~ 글자를 찾지 못했지만 '야소화왕인도자'라는 말은 그야말로 무식한 사기꾼의 행태를 보여준다. 제 딴에는 이 석물을 야소(耶蘇), 즉 예수의 제자로 만들어보이고 싶었겠지만, 야소라는 말은 명나라 중기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 땅에 들어오면서 만들어졌다는 게 일반적 이론이다. 위의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 나오는 예수의 명칭은 미시가(彌施訶, 메시아)였으나 그것까지는 미처 몰랐던 것 같다.



    샌들과 발가락?

    이 석상을 감정한 중동문화 전문가 정수일 박사도 석상의 복장이나 수인(手印, 손모양)을 돈황석굴의 경교(景敎) 인물상에 연결시키려 애쓰는 것 같으나, 나의 시각으로는 한국의 다른 불상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형태들이다. 특히 석상의 발가락 노출을 "불상에는 드무나 기독교 인물상에서 표현되는 보편적 기법"이라고 주목했는데, 아래 백제와 신라의 대표적인 두 불상을 보면 매우 어처구니 없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서산 마애불상

    3구 불상 모두 발가락이 노출돼 있다. 오른쪽 탁본은 조동원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1968년에 한 것이다.(출처:교수신문)



    경주남산 삼화령석조삼존불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박물관 관람객들이 귀엽다며 발가락을 하도 만져 새까매졌다고 언급된 바로 그 삼화령 애기부처다.(국립경주박물관)


    도마분처상 바위

    바위 이름이 분처바위로, 본시 부처 바위였지 않았나 싶다. 여기에 왜 도마가 끼어들었는지 황당할 따름이다.(성역화를 추진 중이라는 말도 있다. - -;;)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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