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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이 천국 가는 법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6. 28. 06:23
기독교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구원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보편성을 위해 위키백과를 찾았더니 기독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을 본받아 따르며, 그를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로 인식하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아브라함을 같은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유대교와 기독교가 별개의 종교로 양립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구원론의 차이이니,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여기지만 유대교에서는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따라서 유대교에서는 지금도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연히 신학대에서도 '구원론'은 중요 과목으로, 대개 원로 교수가 가르친다.(따라서 대개 따분하다) 그리고 구원론은 또 대개 I, II로 나뉘고, 각론으로 들어가면 '칭의론적 구원론', '성화론적 구원론', 칼뱅의 구원론, 루터의 구원론..... 어쩌구하며 복잡하지만 결론은 딱 한가지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안 믿으면 못 받는다는 것이니, 우리가 흔히 듣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바로 구원론의 요체라 해도 전혀 틀림이 없다.
소위 노상 전도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인데,
노상 방뇨의 장면을 목격한 듯 불쾌하다.
교회에 가면 목사님들이 내 떠드는 것도 결국 이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기독교에서 구원만큼 중요한 건 없기 때문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그중의 열혈 사도들은 길에서도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를 외친다. 하지만 앞선 챕터인 '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는 실재했을까?'에 전재한 만화의 내용대로 막상 천국에서 목사님을 만나가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 이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누구도 그럴 것으로 여겨진다. 요즘 뉴스의 단골 손님인 비리 목사님을 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드는데, 내가 얼마전 그 비리를 실명 비판해, 그래서 명예훼손으로 신고를 당해 블로그의 글까지 삭제돼버린 그 성폭행과 횡령 혐의의 목사님은 항소심에서도 중형이 선고됐다.
축재(蓄財) 혐의의 목사님들을 굳이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들의 축재는 일견(一見) 구조적 문제라고도 여겨진다. 조계종이나 천주교의 성직자와 달리 개신교 목사들은 혼인을 하므로 대부분 처자식을 거느린다. 그리고 처자식을 호강시키고 싶은 마음이야 어느 가장이나 다 똑 같을 터, 축재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들 또한 사람이니, 얼마 전 성폭행 혐의로 구속된 젊은 신부의 변명도 딴은 이해가 간다.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 몸이 저도 몰래....."(방송에서 이 멘트를 듣다 폭소를 터뜨리긴 했지만 ^^)
일전에도 말한대로 성서에는 사형대에 오른 중죄인도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써 있다.(누가복음 23:43) 따라서 위와 같은 죄를 지은 성직자들도 일반인의 생각과는 달리 쉽게 천국에 갈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위와 같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초기 기독교회의 한 신학자의 노력이 너무 가엾고 무의미하다. 오늘 말하려는 그 사람의 이름은 오리게네스로, AD 185년부터 254년까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활동했던 신학자이다.
오리게네스
당대의 기독교 서적들을 살펴보면 그들 권징(discriplina)*의 표준은 매우 높고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말로만 떠드는 것들이었으니 헤르메스가 자신의 책 <목자>에서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진 몫을 탐하는 성직자들'과, '그것을 다투는 사람들'을 공박한 것을 보면** 당시 성직자들의 타락상도 요즘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짐작케 해준다.(앞에서 말한 가난한 자의 1원을 뺏아 10원을 채우려는 심리가 여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 교회의 윤리와 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을 처벌하는 일.
** 로마의 빈민구호 정책은 BC 56년 이후 제도적으로 정착됐다. 이와 별개로 교회 자체의 구호활동도 있었던 듯하니, 디모데전서(5:3-15)에서 바울은 가난한 자라도 교회의 구호품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개중에는 이마저 횡령해 착복하는 놈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또 헤르메스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 및 '부유한 사람들과 대규모 사업에 종사하는 기독교인들의 위선'에 충격을 받고 그들을 공박한다.(<목자> '비유'Similitude 9, 20쪽) 다시 말해, 헤르메스 주장의 요지는 '죄사함의 세례를 받은 후에도 계속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교회의 공통적인 고민이기도 했다. 기독교라는 뉴 웨이브에 사회적 정화가 이루어질 듯 기대되었지만 실상은 별반 개선됨이 없었던 것이었다.
~ 이것을 보면 당시의 기독교 사회도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그래도 고민이 있는 것을 보면 지금보다는 훨씬 순수하고 미래 지향적이었던 것 같다. 요즘 기독교 성직자들의 지역 모임인 소위 '노회'라는 데를 가보면 이와 같은 고민을 하는 목회자는 정말이지 단 한 사람이 없다. 그저 교세(敎勢) 자랑, 돈 자랑이 화제의 전부로서, 이들에게 작금의 교회 문제, 즉 신도에 대한 성추행, 부동산 투기와 같은 부도덕한 축재, 과도한 헌금과 횡령, 교회 세습 등을 얘기하면 필시 제 발로 집에 돌아오기는 힘들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이와 같은 세상에서 어둠 속의 한 줄기 빛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AD 185년 경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으며 일찌기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클레멘스 밑에서 수학했다. 이후 그의 자리를 승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