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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의 금욕철학과 전도여행(II) - 바울이 고린도에 오래 머문 이유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6. 30. 06:28


    앞서 1편에서 말한 견유학파(Cynic)의 아우타케이아(autarkeia)라는 용어는 디모데전서에도 나온다. 역시 앞서 말한대로 디모데전·후서는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가 쓴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이는 오히려 바울의 '자족(self-Sufficiency) 철학'이 당대 지식인들의 저변을 형성했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이 아우타케이아라는 용어는 디모데전서에서는 그대로 '자족(contentment)'으로 번역됐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5-8)


    바울은 또 견유학파와 스토아 학파에서 쓰던 엔클라테이아(enkrateia, '의와 절제')라는 말도 빌려 사용하였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이 엔클라테이아라는 용어의 구사에 바울을 신문하던 유대 총독 벨릭스가 오히려 위축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탐욕과 폭정, 수뢰와 여색(女色)으로 쌓은 죄가 다분하던 벨릭스인지라 '의와 절제'라는 말에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거듭 강조하거니와 바울은 이러한 말을 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자였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 하더라.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 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사도행전 24:24-27)



    유대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

    드루실라는 헤롯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파 1세의 막내 딸이자 전 총독 헤롯 아그립파 2세의 누이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미모와 재기발랄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그녀는 10대에 이미 시리아 소영주(테트라크)의 아내가 됐으나 그의 미모에 반한 벨릭스의 유혹에 남편과 이혼을 하고 유대총독 벨릭스와 재혼함으로써 그의 3번째 아내가 된다. 바울은 이 부부 앞에서 '의와 절제'를 강론했던 것이다.(※ 위 조각은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가 아닐 수도 있음)



    벨릭스는 낮은 출신 성분에도 불구하고 3명의 왕실 출신 아내들을 차례로 두었는데, 헤롯왕가의 자손으로 헤롯대제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이자 헤롯 아그립바 2세의 누이동생이었던 드루실라가 그 중의 한 명이었다(행24:24). 드루실라는 가문적 배경으로 인해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분쟁에 대해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남편 벨릭스에게도 이런 내용을 자세히 알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행24:22).

     

    당시의 상류사회에서 매혹적이고 발랄한 미모로 유명했던 드루실라는 수리아의 작은 왕국의 왕과 먼저 결혼하였다. 그러나 벨릭스는 드루실라에게 반하여 마술사 시몬을 보내어 그녀를 설득하게 하였다. 그녀는 유대교인이었으나, 율법을 어기고 남편과 이혼하고 벨릭스의 세번째 부인이 되었다.16세가 되던 해 벨릭스의 유혹으로 남편과 이혼 한 후 벨릭스와 재혼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사도 바울은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강론하였다(행24:25).



    출처: https://koinedata.tistory.com/386 [코이네자료실]

    벨릭스는 낮은 출신 성분에도 불구하고 3명의 왕실 출신 아내들을 차례로 두었는데, 헤롯왕가의 자손으로 헤롯대제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이자 헤롯 아그립바 2세의 누이동생이었던 드루실라가 그 중의 한 명이었다(행24:24). 드루실라는 가문적 배경으로 인해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분쟁에 대해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남편 벨릭스에게도 이런 내용을 자세히 알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행24:22).

     

    당시의 상류사회에서 매혹적이고 발랄한 미모로 유명했던 드루실라는 수리아의 작은 왕국의 왕과 먼저 결혼하였다. 그러나 벨릭스는 드루실라에게 반하여 마술사 시몬을 보내어 그녀를 설득하게 하였다. 그녀는 유대교인이었으나, 율법을 어기고 남편과 이혼하고 벨릭스의 세번째 부인이 되었다.16세가 되던 해 벨릭스의 유혹으로 남편과 이혼 한 후 벨릭스와 재혼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사도 바울은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강론하였다(행24:25).



    출처: https://koinedata.tistory.com/386 [코이네자료실]

    엔클라테이아라는 말은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에도 실렸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린도전서 7:27-28)


    ~ 어디서 번역이 엇나간지 모르지만 한역성서는 물론 영역성서에도 엔클라테이아의 단어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위 문장의 '육신의 고난'은 영역성서의 'worldly troubles'(세속적 고난)이나 'many trouble in this life'(생활고)에 비해 전달력이 약하다. 위 문장에서 보면 바울은 확실히 결혼을 말리는 분위기다. 그로 인해 '의와 절제'가 상실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의역된 '세속적 고난'이나 '생활고'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포괄적으로는 이해될지 모르겠으나 한역성서의 '결혼을 해서 육신에 고난이 있다'는 말은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위의 편지글은 바울이 그리스 고린도(코린토스)에서 18개월 동안(AD 50년 가을부터 52년 봄까지) 머물며 경험한 교회 내의 분쟁, 성적 문란, 바울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 예수 부활에 대한 이단 등을 계고하여 쓴 글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로, 바울의 두 번째 목회서신에 해당된다. 이 편지를 쓴 때는 AD 54~55년이고 쓴 곳은 에베소(에페수스)인데,(16:8) 흥미로운 것은 이 편지글에서는 고린도 교회의 동성애(男色)도 꾸짖고 있다는 점이다.(6:9)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바울이 결혼을 말리고자 하는 상대는 일반인이 아니라 교회 성직자들이다. 앞서 '목사님이 천국 가는 법'에서 충분히 설명했지만, 목사가 금전적으로 타락하는 이유는 대처(帶妻)라는 구조적 문제가 개인적 물욕에 앞선다. 말했다시피 목사도 한 인간이요, 결혼을 하면 가장인즉, 처자식을 호강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어찌 남에 뒤지겠는가? 이 때문에 교회의 축재, 목사의 축재는 어쩌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 역시 그것을 몰랐을 리 없을 터, 오죽하면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으랴.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고린도전서 7:9)


    작금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성직자의 성적 타락 역시 바울의 고민이었다.(고린도전서에는 '음행'이라는 단어가 수도 없이 나온다) 이것은 교회도 교회지만, 그보다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결과로 보여진다. 당시의 고린도는 인구 65만의 항구 도시로 세계 각지의 사람들인 모이는 국제적인 상업도시였다. 또한 행정도시이기도 했으니 아가야로 불린 그리스 속주의 캐피탈이 바로 이곳이었다. 따라서 여러모로 복잡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고린도의 위치

    당시 이곳은 '모든 배가 고린도로 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은성한 항구도시였는데, 따라서 교회 역시 복잡하고 말이 많았다.(사람 많은 곳은 다 그렇듯.....)


    고린도 운하의 항공사진

    당시의 고린도는 위 아드리아해 쪽의 레가이온과 아래 에게해 쪽의 겐그리아, 두 항구를 가진 거대 상업도시였다.(고린도 운하는 그리스 본토와 펠레폰네소스 사이를 가로질러 배들이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돌아야 하는 수고를 없애 주었지만 바울 당대에는 이 운하가 없었다) 


    고린도의 주요 도시 시설


    고린도 시가 유적

    옛 고린도는 1858년의 강진으로 완전히 파괴됐다. 중앙 레가이온 대로 곁의 건물 유적들은 상점이었다고 한다.


    아폴론 신전 유적

    지금은 7개만 남았으나 총 38개의 기둥이 있던 대규모 신전이었다. 뒤에 보이는 산이 시지프스의 신화가 어린 아크로코린트 산으로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으며, 그외에도 고린도에는 10개의 신전이 있었다. 이곳에는 미소년들을 어린 신관으로 채용하였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참배를 핑계로 온 여자 및 남자들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는 일이었다. 


    아크로코린트 산의 성채

    이곳 아크로코린스 산에 있던 아프로디테(비너스) 신전의 1000여 명 매춘부들이 도시의 타락을 이끌었다고 하는데, 막상 이곳의 성채를 보니 그 실체가 좀 의심스러워진다. 이 성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BC 7~6세기였고 이후 BC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확장시켜 군을 주둔시켰다는데, 그렇다면 매춘부와 군인들이 이곳에 공존했다는 얘긴가....? 그게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성은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우스 황제가 슬라브족을 방비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길이는 약 2km에 이른다)


    고린도의 수원지 페이레네 샘

    글라우케 샘과 더불어 코린도의 가장 큰 수원지였다. 바울이 AD 52년에 세운 고린도 교회는 이곳 페이레네 샘 부근에 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바울의 재판 장소인 베마(Bema) 유적 

    심판대로 번역되는 베마는 헬라어이며 라틴어로는 로스트라(rostra)이다. 유대인의 고소로 끌려온 바울은 이곳에서 아가야 총독 갈리오에게 재판을 받았다.(사도행전 18:12-22) 이 근처에서 발견된 라틴어 비문에서의 '그가(신원불명) 로스트라를 만들었고 제작 비용도 직접 직불하였다'는 내용으로 볼 때 이곳 베마에도 아래 로마의 로스트라와 같은 장식 기둥이 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의 로스트라 유적

     


    로스트라 복원도

    바울이 이곳 로스트라에서 심판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로마에서 순교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로마서'에 대해 쓰게 된다면 그의 불분명한 죽음의 과정에 대해서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상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반씩이나 머문 것이 언뜻 고린도 교회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함인 듯 보이나 실상은 그와 전혀 상관이 없다. 바울이 고린도에 머문 이유는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함이었으니, 실제로 이곳에 온 이듬 해 봄(AD 51년) 갈고리로 긁어 소쿠리에 담을 만큼의 돈을 벌었다. 그해 봄 포세이돈 신전 곁의 스터디움에서 개최된 이스트미아 경기에 천막을 공급해 큰 돈을 벌었던 것이었다.(또한 군대에도 천막이 필수인 만큼 군납도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뭐니뭐니해도 그의 가장 큰 거래처는 고린도 항의 선주들이었을 것이다. 배의 돛은 모두 천막의 천으로 제작되므로.....)


    이스트미아 경기는 전 그리스인들이 모이는 도시대항전 형식의 체육대회로서 올림피아 경기와 똑같이 육상, 포환, 원반, 투창, 레슬링, 복싱, 전차 경기 같은 게임이 벌어졌다. 이스트미아가 올림피아와 다른 것은 그 장소가 펠레폰네소스 서쪽의 올림피아 시가 아닌 고린도 근방의 이스트미아라는 것과, 4년 마다 열리는 올림피아와 달리 2년에 한 번씩 열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축제의 기간이 2~3개월씩 이어진다는 점은 같았다. 따라서 경기장을 비롯한 각 축제장소에서는 천막의 수요가 어마어마했을 터, 그도 따라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스트미아 스타디움과 포세이돈 신전의 유적.

    올림피아드 경기가 제우스에게 봉헌된 축제라면 이스트미아는 포세이돈을 위한 축제였다. 포세이돈 신전은 BC 7세기 건립된 이래 파괴와 재건이 거듭되었으며 지금은 거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수니온 곶 포세이돈 신전의 일몰과 일출


    고대 그리스인이 그린 포세이돈 상



    그런데 바울은 왜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었을까? 이와 같은 특수를 노려 부자가 되려 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1편 '바울의 전도여행 - 안디옥에서 빌립보까지'에서 이미 말했다. '그는 오랜 전도 여행에 있어서도 교인들의 돈에 의지하지 않고 제 스스로 경비를 충당한 듯 보이니, 그 바탕은 자족의 철학이요, 수단은 그가 배운 천막 만드는 기술이었다'고 말이다. 그는 그 기술을 십분 활용해 손바닥이 발바닥이 될 만큼 열심히 일했다.


    당연히 그는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교회는 물론, 다른 어떤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위해 권면했다.(사도행전 18:4) 전에도 말했지만 그는 일주일에 단 한번 이빨까고 성도들 수입의 10분의 1을 앗아가는 철면피 목사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세금 한 푼 내지 않지만,(전에 말한대로 자발적으로 내는 목사를 본 적은 있다) 바울은 낼 건 다 냈던 바, 1편에서 말한 빌립보의 감옥에서도 떳떳히 큰소리를 칠수가 있었고, 이후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당당하게 외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 했으니 권리 또한 당당히 챙기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로마시민권자로서의 요구가 아니라 정당한 납세자로서의 요구였던 것이다. 성직자를 위한 성서 주석서인 'Life Application Bible Commentary' 시리즈(책임편집 그랜트 오스본)의 '사도행전' 편에서는 바울이 악착같이 돈을 번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울은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 자력으로 생활하기 위해 일하기로 했다. 고린도에는 종교를 전파하는 선동가들이 너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가르침을 주는 그런 교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다음 회에서 자세히 말하겠지만, 바울이 천막 만드는 기술을 익힌 것은 오로지 생계를 꾸리기 위함이었다.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나 이제는 부자도 관원도 아니므로 먹고 살 길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전에도 말했거니와 목사님들도 어서 기술을 배우거나, 아니면 다른 막일을 해서라도 제 밥벌이를 해야 한다.(설마하니 그 많은 교인들이 일자리 하나 안 봐줄라구) 설교 준비는 일과 후에 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다.(게다가 요즘은 주당 근로시간이 52 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해보면 생각보다 여유가 있음을 느낄 것이다)


    물론 힘들고, 때로는 잠이 부족해 코피를 쏟는 경우가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목회자의 길일는지 모른다.(이것이 대단한 일 같지만 1주일에 한번 봉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봉사활동을 매일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설마하니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통에 비기겠는가? 그리고 또 설마하니 그가 십일조라는 편한 방법을 몰라 그리 했겠는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린도후서 11:23-28)


    * 3편으로 이어짐





    고린도 운하는 그리스 동쪽 에게해와 서쪽 아드리아해를 연결시켜주는 길이 6.2km, 폭 25m의 통로이다. 이미 로마시대에 굴착의 시도가 있어 AD 67년 네로 황제가 죄수 수천 명을 동원해 뚫어보려 했으나 실패했고 1893년 프랑스 기술진이 완성했다.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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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