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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는 실재했을까?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6. 24. 08:09
예수가 살던 시대의 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라 불리는 성문이 실재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오랜 전부터 있어 왔다. 다른 성문보다 매우 작기에 '바늘 귀'라 불린 암문(혹은 개구멍)이 존재했으리라는 생각은 사실 그럴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진 말들도 그럴듯했으니, 그 문의 크기는 사람은 여하히 통과할 수 있지만 낙타의 경우는 짊어진 물건을 모두 내려놓고 알몸뚱이가 되어야만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정도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말은 앞에서 인용한 마태복음의 문장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그 문장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태복음 19: 23-25)*
* 이 문장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실려 있는데, 내용은 거의 같다.
이럴 경우 위 삽화와 같은 낙타의 고민도 사라진다. 그저 등의 짐만 내리면 되는 것이니 그림으로 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위 삽화의 낙타는 아라비아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쌍봉 낙타지만 그냥 애교로 넘어가주시길 ^^)
아울러 이렇게 보면 위 예수의 말은 매우 설득력 있는 주문이 된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기가 힘들니 그 욕심을 모두 내려놓으라는 말이 성립되기 때문이다.(부자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9원을 가진 자가 10원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자의 1원을 뺏는다는 인식은 동서가 비슷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이것은 어불성설이며 본말 또한 전도돼 있다. 위 그림처럼 할 경우 '바늘 귀'는 통과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욕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낙타의 통과 여부가 아니라 그 낙타에 실린 재물이었을 터, 하지만 그림에서 보다시피 부자는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 그저 짐을 잠시 내려놓았다 다시 싣는 수고가 뒤따랐을 뿐이다. 예수가 원한 것은 분명 이런 형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문의 통과 주체는 사람이지 낙타가 아니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는 게 중요하지 낙타 등 위의 수하물을 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를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밀어붙인 것인지 역대로 천국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벽에서 아래와 같은 '바늘 귀'들을 찾아냈다. 물론 역사적 근거는 없는 것들이다.(굳이 장소를 명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력이 무상하게 이상의 '바늘 귀'들은 그들의 생각과 부합되지 않는다. 낙타가 통과하기에는 너무 작거나 너무 여유롭기 때문이다.('바늘 귀'는 짐을 싣지 않은 낙타가 빠져나갈락 말락해야 한다) 따라서 이상의 것들은 '바늘 귀'가 될 수 없다. 위의 주장을 만족시키려면 아래 만화 정도의 크기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에 적합한 문은 못 찾은 듯하다.
이 아저씨는, 예전엔 '바늘 귀'가 이만큼 높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복원된 예루살렘 성벽
그래서 등장하게 된 것이 이른바 '쪽문 이론'이다. 특별한 경우 외에는 대문을 다 열지 않고 쪽문만 사용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늘 귀'도 그와 같은 쪽문일 것이라는 주장이다.(이 역시 그림으로 설명하면 쉬울 듯해 그림과 사진들을 몇 장 찾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