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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정말로 어려울까? - '말 전달 게임'의 오류 혹은 변개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6. 23. 05:3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태복음 19: 23-25)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님에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울까?'하는 생각을 종종 해본다. 비유고 뭐고 간에 예수가 언급한 이 말은 '부자의 천국 입성은 불가하다'고 대못을 박은 것이나 다름없다.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천국과 지옥, 즉 사후 세계를 믿지 않으며 더구나 부자가 아니기에 이 문제는 사실 도무지 걱정할 일이 못된다. 하지만 부자라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사후 세계를 믿는 이에게는 정말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심각한 문제를 목사님들은 전혀 괘념치 않는다. 그들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면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은 말을 쏟아내니, 우선적으로 이에 앞서 있었던 사건을 지적한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뺴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마가복음 10:17-22)


    즉, 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하면 부자도 너끈히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 대목을 들먹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가복음 10:27-30)


    다시 말해, 집과 형제 자매 및 부모, 자식과 전 재산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따른다면 누구라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기 재산을 자선단체에 몽땅 기부하고 맨 몸으로 하나님을 따른다면 그에 대해서는 분명 천국에 가지 못한다 말하리라.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재산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았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늘 돈을 필요로 하는지 그에 대한 설명은 해주지 않는다. 


    여기서 길게 다룰 성질의 것은 아니겠으나 성서 내용의 변개(變改), 즉 '제멋대로 고쳐지는 일'은 과거에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이는 필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오류와 오기도 있었겠지만, 자의적 변개도 빈번했던 바, 3세기의 유명한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개한다.(이하 바트 어만의 '성경 외곡의 역사-누가, 왜 성경을 왜곡했는가'를 참고했음)


    사본들이 지나치게 많은 차이가 난다. 이것은 일부 필사자들의 부주의와 일부 필사자들의 그릇된 뻔뻔함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베낀 것을 한 번 더 검토하는 데 소홀하거나, 아니면 점검하는 과정에서 자기 마음대로 말을 덧붙이거나 삭제해버렸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성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성서를 베끼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말 전달 놀이'처럼 끝이 처음과 같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여기서 심각한 것은 자의적으로 말을 바꾼 경우이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사람은 오리게네스만이 아니었다. 오리게네스의 적대자였던 이교도 켈수스도 오리게네스보다 70년 정도 앞서 똑같은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켈수수는 기독교와 기독교 문서들을 논박하면서 기독교 필사자들을 비방했으며, 이들의 문서 필사 관행이 해도 해도 너무하다고 말한다.


    마치 술잔치를 벌이다 온 것 같은 어떤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모순에 빠져 복음서의 본문을 바꿔버린다. 세 번, 네 번, 그 이상 말이다. 그러다가는 급기야 복음서의 특징마저 달라지게 만들어버렸다. 비판을 받으면 그 비판을 면하기 위해 자꾸 복음서를 변경시켰던 것이다. (<켈수스 논박>2, 27)


    더 가관인 것은 마르키온의 경우였다. 그에 있어서는 예수만이 최고인지라 아예 구약성서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은 독선적 성직자였는데, 신약의 여러 책 중에서도 구약적인 것은 모조리 빼버렸다. 그래서 복음서 중에서도 누가복음만을 받아들였고(다른 복음서와 달리 구약의 인용문이 없어서인데, 그나마 예수 탄생 기사와 세례 요한의 기사, 그리고 예수의 족보는 제외시켰다) 바울의 편지도 제멋대로 고쳐 썼다. 이레니우스가 주장하는 마르키온의 잘못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바울의 편지들을 조각조각 해체시켜버렸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바울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취지로 말한 모든 내용을 삭제했으며, 바울이 구약성서의 예언서를 인용한 대목 역시 삭제했다. 사실 사도 바울이 구역성서를 인용한 것은, 예수가 오시기 전에 이미 구약 말씀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었다.(<이단 논박> 1, 27, 2)


    마르키온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레니우스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고린도의 '정통' 감독이었던 디오니시우스(☞ '예수는 언제 태어났는가 I')는, 거짓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글을 파렴치하게 변개시켰으며, 거룩한 본문인 성서에도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같은 기독교인들이 편지를 써서 보내달라고 나에게 요청했을 때, 나는 그렇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 사탄의 사도들은 내 편지들을 온갖 나쁜 것들로 가득 채웠다. 없는 내용을 만들어 덧붙이거나 있는 내용마저 삭제하는 일을 일삼았다. 이런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마저 함부로 바꾸려 드는 사람들이라, 나 같은 사람이 쓴 별 볼 일 없는 작품을 훼손하려고 작당하는 것은 아주 우습게 저지른다.


    그외에도 성서의 변개에 관한 내용은 끝도 없는데, 그것은 비단 초기교회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1611년 KJV(킹 제임스 성서)'가 나온 이후에도 생겨났다. 즉 KJV의 권위를 시기한 로마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른바 '수정본문'이란 것을 만들어 KJV의 내용을 변개시켰는데, 성서학자 사무엘 깁(Samel C. Gipp)의 지적에 따르면 '수정 본문'에서는 총 5,604 군데가 수정되었으며(1,952 곳 삭제, 467 곳 추가, 3,185 곳 변개) 변개된 단어만도 9,970에 달했다.


    사정은 이렇듯 개판이었으니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과연 '원시 성경'과 어느 정도 근접하는가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바트 어만은 제 나름대로 변개된 내용을 바로 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그래서 나는 바트 어만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가 찾아낸 수많은 변개된 부분 중에서도 마가복음서의 '첨가된 마지막 열두 절'은 정말로 대단한 업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즉 예수의 부활 이후, 예수가 친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고,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말하지만 믿지 않았다는 대목부터가 훗날 추가된 내용인데, 그 중에서도 다음의 두 절을 어처구니없어 한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6:17-18)


    이 두 절은 후대의 필사가가 임의로 덧붙인 내용 중의 하나임에도, 방언하기를 좋아하는 오순절 계통의 목사들이 좋아하는 단락이 됐고, '뱀을 다루는 애팔래치아 사람들'이 언급하며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폐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맹독성 뱀을 집어올리더라도 해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내 생각에는 이러다가 간 애팔래치아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 같다.



    내가 갑자기 성서의 '변개'에 관해 긴 이야기를 늘인 이유는 당연히 위 '바늘 귀'에 대한 변개의 흔적을 찾자는 것이지만 바트 어만이 열거한 많은 목록 중에 이에 관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위 내용이 변개되었으라 확신하고 있으며 그 범인(?)으로서 짐작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 자들은 다름아닌 부자들의 돈을 필요로 했던 초기교회의 설립자들로서, 성서의 본문을 변개시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강조하거니와 그 대목은 '돈'이 걸린 대목이다) 내가 말한 돈은 강조돼 있지 않지만 이에 관한 바트 어만의 지적은 들을 만하다.


    고대 사회에서는 필사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문서의 본문을 얼마든지 변경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문서를 잘 보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실질적인 위험이었다. 위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위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인쇄기, 출판사, 저작권도 없었다. 그런 시대적 배경 아래, 기독교 세계의 초기 필사자들이 문서를 베껴 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고대 사회의 저자들은, 책을 써서 회람시킬 때 자기가  쓴 책의 본문이 변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까? 요약하면, 당시의 저자들은 변개를 방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저주가 전부였다. 자기 허락 없이 본문을 변개시킨 필사자들을 저주한 이유가 여기 있다. 신약성서에 포함된 초기 기독교 문서 가운데 하나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런 종류의 저주가 나온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작품의 끝 부분에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경고를 덧붙였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요한계시록 22:18-19)


    종종 이 구절은, 독자가 이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받아들이거나 믿어야 한다는 위협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이 책을 베끼는 필사자들에게 던지는 전형적인 위협이었다. 이 책에 어떤 말을 덧붙이거나 빼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 2편 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는 실재했을까?로 이어짐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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