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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템플기사단의 비참한 최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2. 15. 07:55

     

    프랑스 왕국은 유럽 제국 중에서 중앙집권적 체제가 가장 강했던 나라라는 소리를 듣는다. 한마디로 왕권이 가장 강했다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부르봉 왕조의 3대 왕 루이 14세(1638-1715)는 첫손가락에 꼽힌다. 그래서 일본 학자들은 그의 별명을 태양왕이라고 붙였다. 당대에 불려지던 Le Roi Soleil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입[口] 하나로 2만의 템플 기사단을 궤멸시킨 프랑스 카페 왕조의 필리프 4세(1268-1314) 역시 루이 14세에 못지않는 절대왕권을 자랑했다. 그의 별명은 단려왕(端麗王)이니 위키백과에도 '단려왕 필리프 4세'로 소개된다.

     

    이것이 무슨 소릴까 궁금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쓰지 않는 단어이니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저것 찾아보니 단려(端麗, たんれい)는 '단정하고 아름답다'는 의미로서 '단려왕'은 le Bel, Ederrae를 번역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잘 생긴 왕'이라는 뜻이다. 그랬었다. 필리프 4세는 잘 생겼을 뿐 아니라 헌칠했으며 또한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남자로 힘의 과시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툭하면 이웃 나라와 싸우기 일쑤였으니 몇 차례의 전쟁(Battle of the Golden Spurs. Battle of Mons-en-Pévèle. etc)을 치른 끝에 결국 주위의 가장 부유한 두 공작령인 플랑드르와 가스코뉴를 빼앗았다. 

     

     

    필리프 4세의 초상

     

    문제는 그와 같은 전쟁과 과도한 품위 유지비로 인해 나라의 재정이 늘 달린다는 것이었으니 이를 타개하기 위한 증세와 수차례의 화폐개혁*을 실시했으나 오히려 역효과만 불렀다. 이에 그는 더욱 고강도의 방도를 모색하였던 바, 일차로 프랑스 내의 큰손인 유대인들을 구금하거나 추방시켰다. 그들로부터의 채무를 무효화시키고 나아가 그들이 가진 재산까지 빼앗은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필리프 4세는 템플기사단에 빌린 돈과 그들이 가진 막대한 재산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처리하려 들었으니 앞서 말한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에 내린 프랑스 내 템플기사단에 대한 체포령과 재산 몰수령이 그것이었다.

     

    * 정확히 말하자면 화폐개주(貨幣改鑄)로, 주화에 들어가는 은(銀)의 순도를 조절하여 명목 가치와 실질 가치에 차이가 있게 만들었다. 필리프 4세는 이때 떼어먹은 은으로 왕실 재정을 충당하였는데, 빈번한 화폐개주는 결국 통화 가치 하락을 가져왔고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는 막무가내로 유대인들을 조져댈 때와 달리 템플기사단의 처리에는 여러 밑밥을 깔아 신중하게 처리했다. 돈만 가진 유대인들과 달리 템플기사단은 돈과 힘(군대)과 배경(교황청)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므로 잘못하면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는 공략 가능한 템플기사단의 약점을 찾았고, 결정적인 아킬레스 건에 주목했다. 바로 그들의 비도덕성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템플기사단의 기사들은 치솟는 인기와 그에 편승된 부(富)에, 1118년 처음 결성될 때 신 앞에서 맹세했던 초심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필리프 4세는 이제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되어버린 그들의 행실에 악행을 추가하여 더욱 나쁜 놈이 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상기하자면 템플기사단의 정식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Poor Knights of Christ and of the Temple of Solomon)이라는 소박하고 긴 이름이었다. 
     

    템플기사단에게 씌워진 죄는 입단시에 행해지는 밀교 의식(악마 숭배 의식같은), 회합에서의 최음제 흡입과 집단 성행위, 기사들 간의 동성애 등 차마 입에 올리기도 죄스러운 죄목의 것들이었는데, 이와 같은 죄목들은 민중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사실 여부에 앞서 우선은 수군대기 적당한 메뉴들이었던 바, '너만 알라'는 은밀한 주문에 어울리지 않게 신속하고 공공연하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와 같은 소문이 날개를 달게 된 데는 템플기사단의 잘못도 있던 바, 자신들 창고에 재물을 쟁이는 데 급급해 천국의 창고는 소홀히 한 죄였다. 이러한 이기심이 결국은 민중의 무분별한 분노심을 불러온 것이었다.

     

    필리프 4세교황 클레멘스 5세(재위 1305-1314)에게도 압력을 넣어 프랑스 밖에 있는 템플기사단에의 체포와 재산 몰수령도 내리게 했다. 죄목은 전과 같았다. 이미 아나니(Anagni) 사건*을 통해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게 눌려 있던 클레멘스 5세는 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 전쟁 수행비용이 달리던 필리프 4세는 교황령(令)으로 면세의 특권을 누리던 교회와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하고 반대하는 성직자를 반역죄로 구금시켰다. 이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프랑스 국왕에 대한 파문을 결정하자 필리프 4세는 1302년 4월 10일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삼부회를 개최해 국민의 지지를 얻어낸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우당탕쿵탕 일을 해치우니 군대를 로마 교외 아나니로 보내 교황을 체포한 후 싸대기를 때리고 참수하려 들었다.

     

    죄목은 이단과 전임 교황 암살죄였다. 참수까지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교황은 이때 충격으로 한 달 만에 사망하고, 후임으로 (횡사한 베네딕토 11세에 이어) 클레멘스 5세가 교황에 오른다.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클레멘스 5세는 아예 프랑스로 이거(移居)해 교황직을 수행하게 되니 이후 약 70년(1309년부터 1377년까지)  동안 모두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교황의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 사건이다. 

     

     

    아비뇽 유수가 있었던 아비뇽 교황궁

     

    필리프 4세 1307년 프랑스 내의 템플기사단 3,000여 명을 체포해 고문하였다. 그리고 이중 54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죄목은 신성모독, 우상숭배, 동성애 등의 다섯 가지였다. 이런 가운데  1312년 11월 22일, 프랑스 국왕의 명령에 굴복한 교황은 기사단 해산령을 내렸고 유럽 내의 템플기사단에 대한 체포령과 재산 몰수령을 내렸다. 이에 유럽 전역에서 체포의 광풍이 부는 가운데 1314년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이던 자크 드 몰레가 붙잡혀 왔다.

     

    몰레에게도 당연히 심한 고문이 가해졌는데, 그가 자백을 강요받은 죄는 신성모독 외에 126가지였다. 몰레 역시 가혹한 고문이 거듭되자 다른 기사들처럼 결국 없는 죄를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교황이 주심을 맡은 재판정에서는 다시 자신의 죄를 모두 부인하고 무고를 호소했지만 판결이 바뀌지는 않았다. 노르망디 지부장이었던 죠프루아 드 샤르니 역시 자백을 번복하고 무죄를 주장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두 사람은 1314년 3월 18일 노트르담 사원이 보이는 세느강의 섬에서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  

     

     

    고뇌하는 자크 드 몰레의 일러스트 컷

     

    재판정에서의 자크 드 몰레(오른쪽 서 있는 사람)

     

    형장의 자크 드 몰레

     

    자크 드 몰레가 죽은 곳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전한다. 죽음 직전 몰레는 "나는 비록 지금 죽으나 교황과 프랑스 왕은 조만간 하나님 앞에 소환되어 그 죄를 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누가 죄를 지은 지 아실 것인즉, 나는 너희와 그때 하나님 앞에서 다시 죄를 다툴 것이다"라고 외쳤다는 것인데, 또 다른 야사에 실려 있는 "Dieu sait qui a tort et a péché. Il va bientot arriver malheur à ceux qui nous ont condamnés à mort"의 경우가 더욱 직설적이고 리얼하다.

     

      "하나님은 누가 틀리고 누가 죄를 지었는지 아신다. 우리에게 죽음을 언도한 자들에게 곧 참화가 닥치리라"  

     

     

    저주하는 자크 드 몰레

     

    그 저주가 정말로 통했던 것일까? 클레멘스 교황은 그후 한 달 만에 죽었고 필리프 왕도 사냥을 갔다 뇌일혈이 발병해 그해 사망했다. 필리프 4세는 3명의 아들과 3명의 며느리가 있었는데, 그 며느리들은 모두 한결같이 궁정 기사와 바람을 피웠고, 이에 기사 2명은 능지처참됐으며 며느리 중 2명은 유폐되었다. 필리프 4세 사후 13년간 그 아들들은 차례로 왕위에 올랐으나 모두 단명하였고 또한 한결같이 후사가 없었다. 이에 카페 왕조는 단절되고 방계인 발루아 가문이 발루아 왕조를 열게 된다.

     

    그런데 이 비감한(?) 스토리가 영감을 주었던 것일까? 템플기사단은 이렇듯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으니 대표적으로는 <인디아나 존스> <내셔널 트레저>와 같은 영화, <나이트 폴>과 같은 드라마, 어느덧 고전의 반열에 오른 <푸코의 진자>, <다빈치 코드>를 비롯한 댄 브라운의 일련의 소설, 그리고 조안 롤랭의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주요 테마로 자리하고 있다.

     

     

    700년간 성배를 지켜온 템플기사단의 마지막 기사
    마지막 기사와 조우한 인디아나 존스

     

      살아 남은 템플기사단이 숨긴 보물을 찾는 트레저 헌터

     

    1편은 참 재미있었는데 갈수록.....

     

    나아가 위 영화나 소설 속의 스토리들이 뒤범벅된 음모론 같은 것이 사실인 양 위장되어 횡횡하니, 이를테면 위의 횡액을 견디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템플기사단의 후예들을 모태로 하는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트 같은 조직이 그것이다. 벨기에 부뤼셀에 본부를 두고 세계를 지휘하는(혹은 하려고 하는) 보이지 않는 손..... 그리고 그 조직 중의 일부는 한반도 접수의 밀명을 받고 구한말 선교사로서 이 땅에 왔는데 그들의 흔적을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 양화진의 프리메이슨 표식 선교사 무덤들

     

    하하. 그저 웃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예전 신학대학 다닐 때, 어떤 외래 강사가 와서 이에 대한 특강까지 했다. 프리메이슨이 어떻고, 666이 어떻고, 베리칩이 어떻고 하며..... 그 허상을 앞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오벨리스크'에서 언급한 바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오벨리스크

    앞서 말한 로마의 많은 오벨리스크 중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오벨리스크는 특히 문제가 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카톨릭을 대표하는 교황좌가 있는 성당이며 바티칸의 상징과 같은 곳임에도

    kibaek.tistory.com

     

    이런 류의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은 1달러 지폐의 all seeing eye

     

    끝으로 한마디를 덧붙이자면 오늘날의 템플기사단에 대한 분위기와는 달리 당시에는 그들의 죽음이 그리 동정적이지 못했다. 앞서 말한 대로 초심이 사라진 그들의 이기심이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던 것인데, 그것은 작금의 코로나 사태의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지금 교회가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음은 밀집·밀접을 조장하는 예배를 강행해 확진자를 양산해 내는 것이 직접적인 이유겠지만, 그 이전,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국민들로부터 동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평소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고 주변에 대한 이타심은 부족했던 데서도 기인하리라.

     

    지금 교회에 대한 차가운 시선은, 말로는 사랑은 외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사랑에 인색했다는 반증이다.(자신들끼리는 사랑을 베풀었는지 그건 모르겠다) 사람이란 무릇 어려울 때 평소의 가치가 표출되는 법이니 우리는 흔히 그것을 '평소의 인덕'이라 부른다. 그 외도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듣는 이가 없을 것 같아 줄인다. 

     

    * 4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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