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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상 가장 추운 곳에서 벌어진 싸움, 초신 전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11. 27. 19:02

     

    6.25 전쟁 중 일어난 장진호(長津湖) 전투는 2차세계대전 중의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3대 동계(冬季) 전투로 불린다. 혹한기에 벌어진 세계사의 대표적인 전투라는 얘기다. 로날드 D. 게르슈테의 <날씨가 만든 그날의 세계사(We Das Wetter Geschichte Macht)>에 따르면 독일과 소련의 전투가 한창이던 1941년 12월 초반 모스크바의 날씨는 며칠간 영하 35도를 기록했고, 12월 2일 밤은 영하 40도까지 떨어졌다. 이것이 상시 기온이라면 사람 살기 곤란할 터, 하지만 늘 이렇지는 않고 겨울 평균기온은 영하 10도 정도라고 한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이상 한파가 닥쳤다는 말이다.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의 2주간의 초신 전투,(Chosin Battle, 한국에서 정정 요구가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초신 전투라 부르는) 즉 장진호 전투가 벌어졌을 때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곳은 모스크바와 달리 평소에도 동장군이 상주하는 혹한의 지역이었는데,(아래 설명처럼) 게다가 11월 14일 몰아닥친 시베리아 한냉전선이 호수를 뒤덮음으로써 평균 기온 영하 30도, 밤에는 영하 40도 이하의 혹독한 추위가 지속됐다. 오늘 27일은 그 장진호 전투가 시작된 날이다. 미군이 기록한 그날의 기온은 영하 37도. 그에 비하면, 뚝 떨어져 추울 것이라는 영하 4도의 오늘 밤 예상 기온(서울)은 차라리 봄날이다. 

     

    ~ 지금도 우리나라의 겨울철 일기예보에서는 중강진(中江鎭)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중강진이 북한 지역임에도 방송을 타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알려졌기 때문인데, 실제적으로는 중강진보다 개마고원 일대인 삼지연, 장진, 풍산 지역이 -31~39ºC로 더 춥다 하며 깊은 산지로 가면 -40ºC 이하로도 떨어진다고 한다. 이상은 2016년 <북한기상연보>에 따른 것으로 당시 중강진 기온은 -30.5ºC였다. 참고적으로 말하면 중강진의 1월 평균기온은 -20.8ºC로 오히려 혜산진보다 높으나 1933년 1월 12일 기록한 -43.6ºC가 가장 추운 장소로 각인되게 만든 듯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초신 전투>의 포스터

     

    1. 왜 '초신'이며, 초신은 왜 추운가? 

     

    1930년 무렵, 한반도의 전력 공급에 고민하던 일제는 함경남도 장진강 상류에서 부전고원(赴戰高原)에 둘러싸인 발전소 건설에의 천혜의 입지를 발견한다. 이에 일제는 1932~1938년, 일대에 1~4호기의 유역변경식 장진강 발전소를 건설하였고 이로 인해 장진강의 물줄기가 갇힌 만수면적 64㎦의 장진호수가 만들어지게 된다.(1939년, 마찬가지로 방식으로 만들어진 화천발전소와 이로 인해 생겨난 파로호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 장진호수의 장진(長津)이 일본어로 쵸신(ちょうしん)인 바, 한국전쟁 때 일본이 만든 한반도 지도를 사용하던 미군에 의해 그 장소는 초신(Chosin)이 되었다.

     

    장진호수 주변에는 북수백산(北水白山 2,522m), 차일봉(遮日峰 2,506m), 두운봉(頭雲峰, 2,487m), 백산(白山 2,379m) 등 백두산에 맞먹는 고봉들이 즐비해 석남화전(石楠花田)의 빼어난 풍광을 연출하나 이 인공호수와 주변의 고원은 가뜩이나 추운 이곳을 더욱 혹한지대로 만들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장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1950년 11월 27부터 12월 13일까지 17일간의 잔혹한 겨울 전투가 벌어진 것인데 설상가상으로 시베리아 한냉전선까지 덮쳤던 것이다.

     

     

    장진호 전경
    장진강 제 1 발전소 / 장진호의 물을 24km의 터널로 끌어들여 성천강 지류 흑림강(黑林江)에 낙하시킴으로써 407m의 유효낙차를 얻게 된다.

    한국전쟁 중 촬영된 장진호 전경
    인공위성이 본 장진호

     

    2. 왜 장진호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졌나?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개시한 김일성의 북한군은 기세 좋게 남진하여 낙동강까지 쉽게 진격했으나, 1950년 9월 15일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전세가 역전되어 도망가기 바쁜 신세가 된다. 급기야 10월 12일 수도 평양까지 함락되자 김일성은 오지인 개마고원 강계로 도망가 그곳을 임시 수도로 삼고 소련과 중국에 도움을 청한다. 이런 김일성을 잡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의 선봉이었던 막강 미 해병 1사단이 북상했으니 이곳 장진호에서 낭림산맥을 통과하게 되면 강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었다.

     

    ~ 여기서 내가 '막강'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미 해병대에 대한 미화가 아니라 태평양전쟁 중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전쟁의 전기(轉機)를 마련하였고 이후로도 전장의 선봉에서 일본의 목줄을 죈 역전(歷戰)의 부대이기 때문이다. 과달카날 전투가 얼마나 신역(身役)이었는지는 해병 1사단의 마크에 새겨진 '과달카날(GUADALCANAL)'의 명문(銘文)이 증명한다.

     

     

    미 해병 1사단 마크

     

    하지만 김일성을 잡아 북한을 괴멸시키겠다는 해병 1사단의 의지는 실현되지 못했다. 아니 실현은커녕 소속부대 일부는 몰살을 당한 채 함흥까지 철수해야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되니 소리소문 없이 참전한 대규모 중공군의 공격에 의해서였다. 강계를 80Km 남긴 지점에서 맞닥뜨린 뜻하지 않은 적이었다.

     

     

    3. 대략의 전황(戰況)

     

    1950년 11월,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7사단은 함흥에서 장진군을 거쳐 강계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진격했다. 그리하여 11월 11일에는 황초령을 넘어 장진면 고토리에 이르렀고, 11월 15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 도착했는데 그때까지는 전혀 전투가 없었다. 북한군에서 그들을 공격할 여력이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유담리에 이른 11월 27일, 전혀 예기치 못했던 중공군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이후 이틀간 지속된 중공 9병단(兵團) 예하 3개 군단 12만 명의 공격으로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를 잇는 도로가 차단되면서 미군은 완전 고립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후진(後陣)이었던 미 육군 7사단은 후퇴에 성공하나 해병 1사단과 영국군 특공대는 중공군에게 포위된 채 악전고투를 벌이게 되는데, 그들에게 정작 무서웠던 적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중공군보다도 위에서 말한 살인적 추위였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전투에서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만들었으니, 미 해병 1사단은 전투에서 700여 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실종자, 3500여 명의 부상자를 냈으며, 이보다 많은 6200여 명의 비(非)전투 부상자가 동상(凍傷)으로 인해 발생했다. 물론 중공군 9병단의 피해는 더 컸으니 2만5000여 명의 전사자와 1만300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사실상 와해됐다.

     

     

    공격하는 중공군
    이동하는 중공군
    붙잡힌 중공군 포로들
    하갈우리의 미군 M4A3 전차 / 전차들은 이후 모두 얼어붙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중공군을 방어하는 미 해병대
    눈 속의 미 해병대 / 미군은 한국의 추위에 대비해 미네소타와 위스콘신 등 추운 지방 출신의 군사들을 징발하였으나 영하 40도의 추위에는 그들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추위에 떠는 미해병대 /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지프, 탱크 등은 물론 라디오도 얼어붙어 기능하지 못했고 총기의 윤활유마저 젤리처럼 변해 총을 쏘기조차 어려웠다.
    쓰러지기 시작하는 해병대원
    동사한 해병대원
    매장되기 전의 시신들 / 장진호 주변 고토리 등에 미 해병대와 영국 특공대의 무덤이 마련되었다.
    초신 전투 조형물 / 미국 워싱턴 D.C.의 한국전참전 기념공원에 장진호 전투에 참여한 미 제1해병사단 장병들의 모습을 조형했다.
    그 조형물 앞에는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귀와
    "잘 알지도 못하고,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켜달라는 부름에 응한 미국의 아들, 딸들을 기리며"라고 새겨진 기념비가 서 있다.
    70년 만의 귀환 /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가 트럼프 정부 시절까지 미국에 인도되었는데 그 중 한국군으로 판명된 전사자의 유해 147구가 올 6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소식을 들은 유가족들은 오열했으며 일부는 '보이스피싱'으로 오인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재조명된 장진호 전투 /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가 중공군의 남진을 일정기간 붙들어 맨 결과로 흥남철수가 무사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흥남철수 때 내려온 피난민의 아들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도 소개되었다.

     

    4. 이 전투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는?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1사단이 중공군 7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한 작전으로 그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중공군을 살상시키는 전과를 거둬 UN군의 북한 철수와 흥남철수 작전을 이루어내게 하였다. 중공군은 UN군을 북한 동북부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이 과정에서 중공군 9 병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하였던 바, 9병단의 중동부 전선으로의 남하가 저지될 수 있었다.

     

    당시 서부전선의 UN군과 국군은 수풍댐을 목표로 북진했으나 운산 지역에서 중공군 13병단을 맞이하게 되었고(☞ '한국전쟁, 중공군 개입의 진상') 이후 패배를 거듭하여 휴전선 이남까지 밀렸다. 그리하여 이듬해 1월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오산-제천-원주로 이어지는 북위 37도선까지 후퇴했던 바, 만일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에서 중공군 9병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면, 중공군 9병단은 서부전선의 13병단과 합류해 휴전선 이남을 심하게 압박했을 것이며, 더 나아가 UN군의 한반도 철수도 불러왔을는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장진호 전투는 가히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전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뉴스위크>는 미군의 막대한 희생을 빚은 장진호 전투를 진주만 이래 최악의 패배라고 불렀지만, 해병 제1사단의 감투정신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전투는
    이후 재평가되어 역사학자 에드윈 호이트(Edwin P. Hoyt)는 "군사상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 중 하나"라고 했고, 군사전문가 마틴 러스(Martin F. Russ)는 "유엔군의 전략적 패배 속에서 이루어 낸 전술적 승리"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미군의 공중 화력지원, 야전 지휘관의 탁월한 전술적 운용 등도 장진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요인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흥남부두에 몰려든 피란민들 / 후퇴하던 유엔군 10만 명은 흥남에 고립됐고 미군사령부는 이들을 배로 철수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중공군을 피해 내려왔던 많은 사람들이 흥남부두에 몰려들었다. 미군은 배에 실린 무기를 버리고 한 명 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노력했는데 뒤에 보이는 큰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로 가장 많은 피란민을 승선시켰다.

    미군 배에 올라탄 피난민들 이렇게 탈출한 사람이 10만 명이나 승선을 못해 항구에 남겨진 피난민 또한 그 정도가 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세계 최고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중공군을 폭격하는 미공군
    추위로 기능을 상실한 전차
    후퇴하는 미해병대 / 17일간의 사투 끝에 해병 1사단은 중공군 9병단 예하 사단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흥남에 도착했고, 이들이 중공군의 진출을 지연시킨 덕분에 유엔군 10만 명과 피란민 10만 명이 안전하게 흥남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중공군이 자랑하는 장진호 전투 / 하지만 장진호 전투 결과 중공군 제9병단은 3만8000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상자가 와해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 이에 1951년 3월까지 전선에 투입되지 못했고, 덕분에 유엔군과 국군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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