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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지혜가 절실한 대중(對中)외교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10. 2. 20:39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며 외국과의 정식 외교관계가 시작됐다. 조선의 전권대사 판중추부사 신헌(申櫶)과 일본의 전권대사로 파견된 현역 육군 중장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었다.(☞ '강화도 조약의 수수께끼 I') 그리고 6년 후인 1882년 다시 신헌이 전권대사로 나서 미국 전권대사인 로버트 윌슨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을 맺음으로써 서구 열강과 외교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이어 조선은 영국(1883년), 독일(1883년), 이탈리아(1884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오스트리아(1892년), 벨기에(1901년), 덴마크(1902년) 등과 외교 조약을 맺는다.
영국공사관
1884년 정동 4번지에 식민지 조지안 양식으로 건립된 이래 지금껏 처음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일한 외국 공관 건물이다.
벨기에영사관
1901년 정동 16-1번지에 개설된 이래 2차례 이전되었다. 1905년 준공돼 회현동에 위치했던 식민지 르네상스 풍의 위 건물은 지금은 사당동으로 옮겨져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프랑스공사관
1888년 정동 28번지에 개설되었다. 위 건물은 1896년 착공돼 1899년 준공된 프랑스 르네상스식의 초현대식 외교관저였으나 1935년 철거되었다. 현재 창덕여중 교정에 그 표석이 있다.
전망탑만 남기고 사라진 러시아공사관
정동 15-1번지 가장 높은 곳에 1885년 10월 개설되었다. 아래 사진 꼭대기의 건물은 1890년 착공해 1892년 완공된 르네상스식 공사관으로 아관파천이 있었던 역사적 장소이나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파괴되었다.(사진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선교사 언드우드의 집이다)
그렇다면 중국과는 언제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을까? 전통적 군신관계의 조·청 관계가 관습적인 외교로 이어졌을까, 아니면 1883년 중국총판상무위원(中國總辦商務委員) 공서(公署)라는 우월적 이름의 공사관을 건립한 것이 시작이었을까?(중국은 자신의 종속국인 조선에 대해 타국과 동일한 '공사관'의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며 이와 같은 이름을 만들어 집무했다) 아니면 1882년 임오군란 후 청국과 맺은 명문화된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이 효시일까?(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에 대해서는 앞서 '오욕의 땅 이태원 - 임오군란과 경리단 길'에 쓴 내용을 옮기기로 하겠다)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후 '주차조선교섭통상의'로 임명되어 조선 땅에 주저앉은 25살 위안스카이(원세개)는 조규 내용 이상의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해 조선의 왕 고종을 제 발밑에 두는 행패를 부렸다. 하지만 놈은 청일전쟁 직전 눈치 빠르게 조선 땅에서 철수하였고 이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우리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외교관계는 사실상 단절되었다.
청나라와의 외교관계는 1899년 9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흠차의약전권대신 쉬서우펑(欽差議約全權大臣 徐壽明)이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하며 부활되는데, 아마도 이것이 근대 한중 외교관계의 효시일 듯싶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조약으로써 그간의 종주권 개념이 일소되고 호혜평등의 대등한 외교관계가 명실상부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니, 조약 이후 부임한 청국공사 역시 각국외교단의 일원일 뿐이었다.
다른 서구 열강과 달리 청국공사관(淸國公使館)은 일제 강점기 기간에도 내쫓기지 않고 유명무실하나마 중국총영사관으로 존속했다. 과거 위안스카이가 머물던 명동 2가 83번지 일대로, 그 껄끄러운 자리에 해방 후에는 중화민국대사관이 들어섰지만 당시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반공국가와 자본주의 자유국가로서의 긴밀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니,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수교한 첫번째 국가도 중화민국이었다. 이와 같은 두 나라의 관계는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개석 정권이 대만으로 쫓겨간 이후로도 변함없이 유지되었고, 분단 국가라는 동병상련 속해 더욱 돈독해졌다.
하지만 1971년 자유중국(대만)이 UN에서 (중국의 대표권을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빼앗기고) 축출된 이후로는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약소국인 한국으로서는 정치·경제· 안보상 대륙 중국과 통교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수교는 이후 20년간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하나의 중국'의 원칙을 들이대며 수교의 조건으로 대만과 단교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사실 중국 측이 이 조건을 한국에게만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1992년 한국은 결국 이와 같은 조건을 받아들여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며 자유중국(대만)과 단교하였다. 이때 대만의 배신감은 엄청났다. 사실 중화민국은 장개석 정권 시절 한국의 임시정부를 지원해 주었으며, 2차세계대전 막판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해준 은혜의 나라였음에도 일거에 표변해(대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대만도 한중 수교 가능성을 전혀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으니 한편으로서는 한국정부의 고육지책으로서의 수교를 이해하자는 분위기도 있었다.
문제는 단교에 있어서의 매끄럽지 못한 처리과정이었다. 대만은 그간의 정리(情理)를 내세워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가 결정되면 그 과정을 미리 알려주어 최소한 자신들의 명동 대사관을 처리할 시간만이라도 할애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수도 서울 노른자 땅에 있는 5,146평의 엄청나게 비싼 땅을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알량하고 비굴하고 배짱없던 정부는 수교가 정식으로 맺어지기 일주일 전인 1992년 8월 15일, 한국주재 대만 대사를 은밀히 불러 비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수교 사실, 대만과의 단교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21일, 공식적으로 대만 대사관에 단교문서를 전달하며 중국과 수교를 맺는 24일 전까지 국기와 현판을 내리고 철수해줄 것을 요구했다. 주어진 시간은 채 72시간도 되지 않았던 바, 대만 대사관은 6시간만에 국기하강식을 갖고 극비 문서를 정리했다. 그리고 이틀 후 대사관의 열쇠를 한국 외교부에 넘기고 한국을 떠났으니 1992년 9월 23일의 일이었다. 즈음하여 대사관을 건물 앞에는 '은혜와 의리를 저버린다'는 뜻의 '망은부의'(忘恩負義)라고 쓴 피켓이 등장했는데, 보지는 않았지만 필시 그 자리에는 피눈물도 뿌려졌을 것이다.
사실 80년대 후반 한국이 북방정책을 추진할 때부터 한중 수교 가능성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고, 중국이 관철동 현대사옥에 중국무역대표부라는 이름의 사무실에서 비자 발급업무를 개시했을 때부터 사실상의 수교는 이루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중국대사관 문제를 그렇게 처리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어쩌면 조선조 이성계 때부터 이어져 온 사대관계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을지도 몰랐다.(☞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I')
자유중국 대사관이 있던 그 자리에는 2009~2012년 중국대사관이 신축됐는데, 노동자는 물론이고 모래 한 알까지도 중국에서 건너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건축법을 위반하는 불법도 저질렀으니, 완공되지 않아 서울시로부터 '사용승인'이 떨어지지 않은 신축대사관 건물을 사용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그 지적에 대한 반응은 "그래, 위반했다. 어쩔래?" 였다는 후문이다. 그때부터 조짐이 있었던 것인데, 그 중뿔난 대국주의의 그릇된 버릇을 키운 건 대한민국 정부다.(☞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
중국대사관의 어제와 오늘
대만은 혹여 한국에서 철수하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대사관 건물은 자신들의 소유라 주장했지만, 중국이 내세운 조건에는 대만과의 단교 외에도 '한국 내에 존재하는 대만의 재산은 모두 중국으로 종속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본래 청나라의 공사관이었고, 일제강점기 때에도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쓰이던 곳이었기에 소유권은 중화민국을 계승한 자유중국(대만)에 있었다.
중국대사관
중화인민공화국은 건네받은 그 땅에 멋대가리 없는 초고층 대사관 건물을 세웠다. 세계에서 2번 째로 큰 외국 공관 건물이다.
한달 전인 9월 21일,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솔로몬제도가 중국과 외교관계를 체결한 1주년을 기념해 (중국이) 정식으로 대사관을 개설하였다는 기사를 보았다. 물론 수교의 조건은 대만과의 단교였고 솔로몬제도는 경제적 이득을 보았을 것이다.(이에 대해 미국의 분노가 상당했다는 후속 보도도 있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어떤 신문 데스크가 '솔로몬제도의 지혜롭지 못한 선택'이라는 제목의 컬럼을 썼다. 읽어보니 경제적 기대에 의존한 중국과의 수교는 위험하다는 비판이었는데, 그 옳고 그름을 떠나 한국이 솔로몬제도를 탓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솔로몬제도의 위치
최근 한중관계에 관한 글을 읽으며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알았다. 1992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중화민국의 후계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UN은 1971년 이래 중화인민공화국을 중화민국의 후계국가로 인정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에는 1979년 이전의 대만수교사를 미중관계에 집어넣고 1979년 이후의 관계는 따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내년에 벨기에하고는 수교 120년이 되지만 러시아와는 수교 31년이 된다.
1992년도가 중국과의 수교 원년이라니 낯설다. 양국간의 그 엄청난 역사를 생각해보면 더욱..... 아무튼 내후년이면 수교 30년, 솔로몬의 지혜가 절실해 보인다. 사드(THAAD) 사태 이후의 평온이 왠지 폭풍 전야 같은 느낌을 주는 요즘이기에.....
* 다만 민간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모국의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흔들었다가 사과를 한 트와이스의 쯔위
('하나의 중국' 정책에 위배되는 짓을 했으므로 - 이에 쯔위는 자기 나라의 국기도 흔들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부캐 이름으로 마오를 제안했다가 뭇매를 맞은 이효리
(국부 모택동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 나 참, 어이 없어서..... 마오는 다 마오쩌뚱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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