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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도 조약의 수수께끼(I)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4. 15. 17:21


    이 땅에 외국 배, 즉 이양선(異樣船)이 처음 정박한 것은 1816년 9월 5일, 충청도 비인 근방의 마량진 앞바다에 나타난 머레이 멕스웰이 이끄는 2척의 영국 군함이었다. 이후 조선 해안에는 수십 차례에 걸쳐 이양선이 출몰했으니 1866년 7월에는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오르다 좌초되어 불태워지기도 했다. 실록을 보면 이들 배를 비롯한 군함과 상선들이 1866년까지 조선 해안에 출몰한 것은 40여 차례에 가까운데, 이들의 대부분은 조선과의 통상을 원해 나타난 배들이었다. 하지만 통상에 성공한 예는 없었다. 반면 일본 막부는 도쿄의 외항인 우라가(현 요코스카 항)를 포격한 미국 함대의 함포사격에 놀라 1864년 쉽게 통상을 허락하고 개항까지 한다.



    1864년 일본을 개항시킨 미군 군함

    1863년 7월 6일, 일본 해안에 미해군 메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시시피호를 비롯한 4척의 군함이 출현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 다시 출현한 이 군함들은 재차 일본을 겁박, 결국 개항을 이끌어낸다. 가운데가 미시시피호로 언뜻 보면 범선 같지만 대포를 장착한 최신형 증기선이다.(위의 1841은 미시시피호가 진수된 해임)


    메튜 페리 제독


    페리 제독과 일본 고메이 천황 사이에 체결된 미일 화친조약문


    <료마가 간다>의 영상 포스터

    일본이 무서워 한 구로후네(흑선)가 주인공 료마와 함께 배경이 되었다. 시바 료타로의 베스트 셀러를 원작 그대로 만든 드라마다. 소설은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가 우라가에 정박한 미국 구로후네를 찾아가 처음 구경하는 것으로써 시작된다.

     

    <료마가 간다>의 국역본. 창해 출판사

    소설은이후 료마를 비롯한 주인공들이 구로후네의 공포를 극복하고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킴으로써 일본이 세계적인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가수 홍정완 씨가 '분량이 무려 10권이지만 한번 잡으면 끝까지 눈을 뗄 수 없는 책'이라 하더니 과연 그러했다.


     

    이후 일본은 서양 제국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구화에 성공하였으니 이를 바탕으로 세계 열강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쇄국주의 조선의 문을 열게 되니 1886년 조선정부와 체결한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인은 그들 나라를 개항시킨 미국과는 방향이 달랐다. 미국은 일본을 통상과 아시아 함대의 기항지로서에 비중을 두었던 반면 일본은 처음부터 조선 병합이 목적이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조선은 그 25년 뒤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일본에는 료마와 같은 인물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조선에는 그와 같은 인물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일본 군함 운요호(운양호)

    조선 개항의 촉매 역할을 한 운요호는 1866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전장 35.7m의 배였다. 일본은 이 군함을 수입해 와 미국 페리 함대에게 당한 그대로를 흉내내 초지진과 영종진을 포격한다.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

    이노우에는 초지진을 포격하며 '드디어 조선을 포격하는구나'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일본 무신들에게 면면히 흐르던 정한론(征韓論)의 실체를 드러낸 독백이었다. 이노우에는 강화도 회담의 부사(副使)로도 참석한다.


    해안에서 본 초지진 돈대

    1875년 9월 20일, 운요호를 비롯한 군함 5척은 강화도의 초입 요새인 초지진을 공격한다. 이에 초지진은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에 이어 세번 째로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이때 일본군이 상륙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초지진 돈대와 포탄 맞은 소나무

    일본 군함의 함포 사격에 초지진은 함락되고 초지 돈대가 무너져 내린다. 초지진은 1973년 이곳 돈대만이 복원되었는데, 돈대와 그 앞 소나무에는 지금껏 포탄의 흔적이 남아 있다.


    1876년 1월 부산 초량진을 위협한 히가시호

    전장 49.2m의 이 군함 역시 조선의 개항에 일익을 하였다. 1864년 독일에서 제조된 것을 1869년 일본 해군이 구입했다.


    1876년 부산 앞바다에 느닷없이 일본 군함들이 나타나 대규모 함포 사격 훈련을 했다.


    초지진 돈대의 포구장전식 대포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해 발사하는 형식의 대포로 포탄으로는 철환(鐵丸)을 사용하였다. 조선 영조 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한 구형 대포로서 사거리는 700m에 불과하며 조준율도 떨어져 맞으면 좋고 안 맞으면 말고 식이었다.


    당대의 후장식(後裝式) 서양 대포

    일본 군함에 장착됐던 이와 같은 대포는 포탄 자체에 장착된 화약이 폭발하는 형식으로, 조선의 대포와는 모든 면에서 게임이 안 됐다. 실제적으로 초지진 포격 때 조선군은 30여 명이 사망했으나 일본은 단 한 명의 피해자도 없었다.


    영종도에 상륙하는 일본 해군 육전대

    초지진을 함포 사격했던 일본은 그 이튿날인 21일에는 영종도의 영종진에 상륙, 군민을 학살, 약탈하고 관청을 불지른다. 강화도보다 방비가 약한 영종도를 택해 기습 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때 조선군 십여 명이 도망가다 총을 맞아 죽었고, 일본군은 상륙 중 두 명이 발을 삔 것이 유일한 피해였다.

     

    조약의 막후 지휘자 이토 히로부미

    조선을 병탄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이 두 차례 공격은 결국 강화도 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이끌어내는데, 그 정점에는 조선 병탄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1876년 2월 27일, 일본이 조선정부와 체결한 강화도 조약은 강화도와 영종도를 침범했던 일본이 그 죄를 조선에 뒤집어 씌움으로부터 시작됐다. 자신들은 그저 식수를 얻으려 했음에도 조선군이 먼저 포격을 하는 바람에 심각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초지진의 조선군이 먼저 포격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영해를 침범한 이양선에 대한 당연한 조치였다) 그리고 힘의 우위를 앞세운 일본은 결국 13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조약을 이끌어내는데, 근대 조선이 외국과 최초로 체결한 국제조약이자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이었다.



    운요호 사건 도해

    운요호의 칩입로.  일본 전권대표의 상륙로

     

    연무당 자리의 안내판

    서문 안 연무당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장소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실제 장소는 사진 아래의 열무당이다. 연무당과 열무당은 엄연히 다른 장소로 열무당의 위치는 지금의 강화읍사무소 부근이다. 

      

    강화부 지도

    옛 연무당과 열무당이 다른 장소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회담이 체결된 강화부 열무당

    부동자세로 경비를 선 일본군 뒤로 그들이 끌고온 개틀링포가 즐비하다. 

     

    회담의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

    일본군이 문을 지키고 조선의 관리들은 뒤로 밀려 있다. 일본 대표단 수행원이었던 가와다 키이치가 찍은 위 두 장의 사진만으로도 향후 조선의 운명이 가늠된다.

     

    연무당 자리 표석




    연무당 안내문

    연무당 옛 터에는 문화재청과 강화군 등에서 세운 표지판이 여러 개 서 있으나 모두 잘못된 것이다. 강화도 조약은 연무당이 아닌 열무당에서 체결됐다. 



    그 조약의 주요 조항은 다음과 같다. 

     1조: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4조: 부산 외에 두 곳을 더 개방하고 일본인의 통상과 왕래를 허용한다.

     7조: 일본국 항해자가 자유로이 조선의 해안을 측량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9조: 영국 백성들은 자유롭게 거래하며 영국 관리들은 이를 간섭하거나 금지할 수 없다.

     10조: 일본인이 조선의 항구에 머무는 동안 지은 죄는 일본 관원이 일본 법에 따라 심판한다.


    그리고 잘 알려진대로 위 조항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제 1조는 언뜻 조선국을 존중한 듯 보이지만 실은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시키기 위한 일환이요, 제 4조의 부산 외에 두 항구, 즉 원산과 인천 개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 수도 한양을 옭죄기 위한 방편이며, 제 7조의 해안 측량 권리는 앞으로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실질적인 영토 침탈에 해당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제 9조 양국 백성의 자유 거래와 제 10조 치외법권 허용 조항으로, 9조는 이후 무관세 조항으로 해석돼 악용되었으며, 10조의 조항에 따라 향후 조선은 자국의 영토에서 벌어지는 일본군의 만행을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된다.


    학자들 가운데서는 제 9조를 강화도 조약의 가장 큰 독소조항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일본의 공산품이 무제한으로 들어와도 관세를 매길 수 없는 9조의 자유거래 조항으로 인해 조선의 유치(幼稚) 산업들이 모두 무너졌고, 이에 근대산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빼앗기게 되었다 여기는 까닭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가장 큰 독소조항은 역시 제 10조 치외법권의 허용이다. 앞서 말한대로 조선의 관리들은 일본인이 죄를 지어도 이를 처단할 수 없었던 바, 일본인이 마음껏 조선 땅을 휘저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10조의 조항은 일본 역시 미국(1858년)과 러시아(1857년)에 당한 것으로 당시 국제법에 둔감했던 일본은 이 치외법권의 허용을 두고두고 후회했는데, 이를 조선에 그대로 써먹었던 것이다. 위력을 익히 깨달아 경험한 자의 사악한 응용법이랄까? 일본은 쇄국주의 시절에도 네덜란드 등과 꾸준한 국제 무역관계를 유지해온 나라였다. 따라서 국제 사정에 그리 어둡지 만은 않았다. 그와 같은 일본도 당했던 치외법권이니 깜깜이 나라 조선은 오죽해겠는가?


    한마디로 말해 이상의 강화도 조약은 일본의 치밀한 수에 눈을 뜨고 당한 국제 사기극이었다. 이에 지금 보면 통탄스럽기 짝이없는 일이지만, 이것은 당시의 조선이 세상 물정을 몰랐던 만큼 어느정도는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다. 다만 내가 의아히 여기는 것은 조선이 왜 그렇게 무력하게 개항을 했는가 하는 것으로, 이는 과거의 조선이 프랑스 및 미국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장렬한 기상과 대비돼 더욱 아쉬움을 준다. 물론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쇄국주의 정책이 절대 능사는 아니었겠으되 일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위 강화도 조약은 차라리 수수께끼라 불러야 옳을 듯 싶을 정도다. 그리고 그 조약이 결국은 망국으로까지 연결되었던 바, 더욱 통탄스럽고 안타까울 뿐이다.

     

    그 답은 고종의 무능에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공들여 키운 강화도 방어군 진무영 군사들은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쳤다. 그런데 신미양요 3년 후인 1874년 진무영의 사령관이 문관으로 교체됐다. 1873년 고종이 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親政)체제를 구축하며 생긴 일이었다. 고종의 정책은 아비 대원군의 정책을 무조건 반대로 하는 일이었고, 대원군의 사람들이 밀려난 곳에는 와이프 민씨 일당들이 자리를 채웠다. 진무영의 예상도 대폭 삭감됐다. 진무영은 그렇게 무력화되었고 그 2년 후인 1876년 일본의 공격이 있었다. 그간 대비도 없었고 이렇다 할 훈련도 없었던 진무영 군사들의 방어가 제대로일 리 만무했다.  

     


     


    조약문서


    '강화도 조약의 수수께끼(II)'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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