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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도 조약의 수수께끼(II)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4. 16. 18:04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포스터

     

    강화도 조약의 이야기에 웬 톰 크루즈인가 싶겠지만, 이 영화는 강화도 조약 체결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두 가지 단서를 담고 있다. 물론 이 영화에서 조선과의 관계는 단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라스트 신에 등장하는 아래 개틀링 기관총의 위력은 조선 땅 강화도에서도 십분 위력을 발휘했고, 그것은 조약의 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메이지 정부군이 보유한 개틀링 기관총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카츠모토의 군사들


    위의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는 허구이고 주인공 네이던 알그렌 대위(톰 크루즈 분)도 당연히 허구의 인물이다.(미 남북 전쟁에 참전했던 알그렌은 퇴역 후 별볼 일 없이 지내다 일본 메이지 유신 때의 부국강병에 편승해 메이지 정부군의 훈련교관으로 가게 되는데, 이후 카츠모토라는 다이묘가 일으킨 내란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라스트 사무라이의 역할을 했던 카츠모토 모리츠쿠(와타나베 켄 분)는 분명 모델이 있으니 다름 아닌사쓰마번(藩)의 무사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로, 우리에게는 정한론(征韓論)으로 친숙(?)한 인물이다.

     

     

    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 다카모리의 역을 한 와타나베 켄
    세이난 전쟁을 묘사한 그림 / 왼쪽 검은 색 정복을 입은 군사들이 메이지 정부군이고 오른쪽 전통 무사 복장의 군사들이 다카모리의 사쓰마 군으로서 세이난 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타바루자카 전투를 그렸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과거 메이지 유신을 이끈 주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메이지 유신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자 그 여세를 몰아 조선 침공을 맹렬히 주장하고 나섰지만 시기상조라는 중론에 밀린다. 그러자 그는 이에 반발해 1877년 자신의 4만 가병(家兵)으로 온건개혁파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던 바, 이것이 바로 세이난(西南) 전쟁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는 중과부적으로 패해 자살을 하고 만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주장한 정한론은 온건개혁파에게도 전파됐고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다만 그것이 전쟁이 아닌 외교적 방법이었고 시간이 조금 걸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다카모리가 내란을 일으키기 전부터였으니 그것이 바로 운요호 사건이었다.

     

    앞서 말한대로 1886년의 강화도 회담은 운요호 사건의 처리를 위해 조·일(朝·日)의 대표들이 모인 자리였다. 당시의 조선의 전권대사는 판중추부사였던 무신 출신의 신헌(申櫶)이었고, 일본의 전권대사는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라는 현역 육군 중장이었다. 첫날 회담에서 그들은 당연히 운요호 사건의 잘잘못을 다투었는데, 그 이튿날 구로다는 느닷없이 일본측의 일방적 주장이 적인 조약문을 내밀며 날인하기를 요구했다. 그러면서 날인을 안 하면 군사들을 상륙시켜 한양으로 쳐들어가겠다는 위협을 곁들이며 을러댔는데, 그가 데리고 온 군사들이라야 모두 800명에 불과했던 바, 그것이 통할 수 있는 협박은 아닐 듯싶었다.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
    신헌의 <심행일기> / 심행의 심(沁) 자는 강화를 부르던 옛 이름으로, 그가 접견대관으로 임명된 1월 30일부터 고종에 마지막 보고를 올린 3월 1일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일본의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다카

     

    하지만 구로다의 요구가 대부분 수용된 채로 13조 항의 강화도 조약은 체결된다. 사실 믿기 힘든 결과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수수께끼와도 같은 일이라 언급했는데,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인지 이에 대해 시원하게 답해 주는 사람이 없다. 물론 과문(寡聞)한 탓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결국 이 수수께끼를 스스로 풀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앞에서도 말한 이 허무한 조약 체결의 수수께끼를 우선은 구로다 일행이 가지고 온 무기의 위력으로써 풀었다.

     

    아래, 조약이 체결된 열무당의 사진을 다시 보자면 경비를 서고 있는 일본 군인들 뒤로 보이는 화포는 분명 개틀링 기관총으로서 당시의 최첨단 무기이다. 일본군들은 회담의 기간 동안 그 개틀링포의 위력을 수시로 선보였던 바, 아무리 심대강건한 신헌이라 해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구로다가 타고 온 배 다카오마루(高雄丸)에 뒤이은 7척의 군함에서 쏘아대는 함포 사격 역시 조선 대표단에게는 공포로써 작용했을 것이다.

     

     

    회담 장소였던 열 무당 안내판 / 사진에서는 개틀링 기관총의 모양새가 더욱 확연하다.
    개틀링 기관총의 사격 모습 / 남북전쟁 당시(1862년 경) 리처드 개틀링이라는 사람이 발명한 이 기관총은 6개의 묶임 총틀에서 연속적으로 총탄을 발사시킬 수 있는 특장으로써 속사와 연발, 장전과 이동의 문제를 모두 해결한 최신식 무기였다. 이 기관총은 수동의 핸들이 모터 구동으로 개량됐을 뿐 거의 같은 형식으로써 현대에도 사용돼지고 있는 바, 어쩌면 미래에서도 사용될는지 모르겠다..
    영화 '터미네이터' 속의 개틀링 건
    영화 속의 개틀링 기관총
    영화 속의 개틀링 기관총
    개틀링 기관총'의 위력
    동학란과 개틀링 기관총 / 훗날 우금치 전투에서 2만 명의 동학군을 몰살시킨 것도 이와 같은 개틀링 기관총이었다. 분당 400발을 발사할 수 있다.
    구로다(黑田)와 일본변리사절단이 타고 온 다카오(高雄)호
    구로다 일행이 도착한 갑곶 돈대 / 이곳에서 양국 간의 실제적인 전투는 없었다. 하지만 갑곶 해안에 정박한 7척의 군함들은 수시로 함포 사격을 해댔던 바, 신헌 일행에게 겁을 주기 충분했다.
    갑곶진의 치(稚) /치의 소포(小砲)와 불랑기(佛狼機)가 그때도 있었지는 알 수 없으되 당시 일본이 끌고온 개틀링 기관총에 비하면 모두 어린애 장난감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갑곶 돈대에서 바라본 문수산성 / 1866년 갑곶에 상륙한 프랑스 군은 건너편 문수산성과 강화부 성을 함락시키지만 결국은 패퇴한다. 하지만 조선군은 구로다의 일본군을 끝내 패퇴시키지 못했다.
    1876년 당시의 갑곶 돈대 / 구로다 일행이었던 가와다 키이치가 찍은 사진이나 현재 이 모습은 찾을 길 없다.(갑곳 돈대는 지금의 자리가 아닌 위 강화대교가 끝나는 자리에 있었다)
    강화 읍성 진해루 / 갑곶에 내린 구로다 일행은 이 문과 아래 강화부 남문을 통과해 회담장인 열무당에 도착한다.
    강화부 남문
    강화도 회담의 장소라고 잘못 알려진 곳 연무당은 고려시대 부터 이어져 온 군사훈련장으로 조선시대에는 외교장(外敎場)으로 불렸다.(연무당은 외교장에 있던 건물) 아래 수문도 아래 지도에 표시돼 있다.
    수문
    연무당 자리에서 보이는 서문
    옛 강화부 지도 / 지도에서 연무장 옆의 수문과 서문을 찾을 수 있다. 연무당과  열무당은 다른 장소이며 강화도 조약은 열무당에서 체결되었다.
    옛 열무당에 자리에서 본 용흥궁과 성공회성당 / 열무당은 강화읍사무소 부근에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신헌이 위축됐을 것이라 생각되는 무기는 또 있었으니 일본군의 개인 화기였던 후장식(後裝式) 스나이더 소총이 그것이다. 이 소총은 전장식(前裝式) 소총 엔필드 라이플을 대신한 최신예 무기로서, 기존 소총의 단점이던 장전에의 소요시간을 크게 단축시켰을 뿐 아니라 사거리와 명중률 또한 획기적으로 높인, 한마디로 무시무시한 화력의 개인 화기였다. 반면 당대의 조선은 그때까지도 화승총이 고작이었던 바, 신미양요 당시 미군의 후장식 레밍턴 소총에 243명이 몰살당한 광성보의 패전을 익히 들어 알았을 신헌으로서는 저항에의 의지를 일찌감치 상실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미양요 당시의 조선군 주검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속의 스나이더 소총 /후미장전 시스템, 즉 총알을 약실에 밀어넣게 만든 브리치로딩(breech loading) 시스템을 볼 수 있다. 장전에 약 5초 정도 걸린다.
    착검을 한 스나이더 소총
    스나이더 소총의 위력 / 5초에 1번 꼴로 쏠 수 있는 바, 5열이면 무한 연속사격이 가능하다. 여기서 발포 명령을 내리는 외국인은 보신(戊辰) 전쟁에 실제로 참전했던 프랑스인 교관 쥘 브뤼네를 모델로 삼은 것 같다.
    구형 총인 엔필드 라이플(1856년 패턴) / 총구에 총알을 압축시켜 넣은 후 방아쇠를 당겨 격발 시키는 형식의 소총이다. 장전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단점으로 인해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후장식 스나이더 소총으로 대체되었는데 당대의 조선에는 그나마 이런 무기도 없었다.

     

    이것은 접견대관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신헌이 고종을 마주한 자리에서도 읽힌다. 고종은 일본 배가 물러나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이것저것을 묻는데, 이때 신헌은 다음과 같이 부국강병을 강조한다. 짧은 만남에도 일본에 비해 열세인 조선의 국방력을 절감했던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험준한 산천이 있어 방비에 유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병기(兵器)는 매우 약하고, 군사의 수도 크게 부족하며 정병(精兵)의 수도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지방에는 규율을 갖춘 군사가 더욱 부족하니 지혜로운 자라도 장수 노릇을 할 수가 없습니다. 천하의 대세는 각국이 타국의 군대를 쓰는 시대인데(외국 용병까지 고용하는 시절인데) 우리나라의 형편은 그저 이러하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각국이 업신여길까 매우 근심됩니다."

     

    심헌은 힘의 열세를 절감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해 조약체결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밀땅을 하였다. 하지만 (남보다 조금 나을지는 모르겠으나) 안타깝게도 그 역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깜깜이였다. 이것은 구로다를 만난 신헌이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넸다는 결코 웃을 수 없는 일화로써도 알 수 있는 바, 당대의 조선이 헤쳐나가야 할 숲은 정말로 험하고도 긴 가시나무 덤불이 아닐 수 없었다.

     

    "자꾸 조약을 맺자, 조약을 맺자 하는데, 그 조약이란 것이 대체 무엇을 말함이오?"

     

    신헌은 '조약(Treaty)'이라는 단어의 개념조차 알지 못한 채 회담장에 나왔던 것이었다.

     


     * '강화도 조약의 수수께끼 III'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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