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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비운의 스토리 1 -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 손호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17. 23:35
백제 의자왕에 대해 쓰려 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한 후 마지막 왕 의자가 당나라 장안에 끌려가 7일만에 사망한 일, 이것은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의 최대 비극으로 생각하는 일이기에 한번쯤은 다뤄보고 싶었다. 삼전도에서 인조 임금이 청태 종 홍타이지에게 삼두고배(三頭叩拜)를 행한 일, 1910년 8월 29일 순종의 창덕궁에서의 마지막 공무(公務)도 슬프기 한량없지만, 그 두 사람은 무능의 끝판왕인지라 그리 정이 가진 않는다. 반면 의자왕의 경우는 한없이 슬프다.
망국의 오욕을 뒤집어 쓴 백제탑
정림사 탑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지금껏 선명하다.
삼전도 비(대청황제공덕비)
이 비석은 인조가 항복한 한강 삼전 나루 인근에 세워졌으나 이후 여기 저기 옮겨다니다 지금은 롯데월드 옆 석촌호수가에 안착됐는데, 우연찮게도 삼전 나루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돌아왔다. 청 태종 홍타이지의 공덕을 몽골 문자, 만주 문자, 한문의 3가지 글자로 새겼다.
조선통감부 통감 관저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된 비극의 장소다.총독 관저가 있던 곳
조선통감부 장소에는 지금 서울 에니메이션 센터가 자리하고 있고, 관저가 있던 곳은 '기억의 터'가 조성됐다. 교훈의 현장으로 남겨둬도 괜찮았을 통감부 건물과 총독 관저는 1960년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나는 오늘, 글의 시작을 오나라 마지막 왕 손호(孫皓)로부터 하려 한다. 그 이유를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모르셔도 상관은 없다. 아니 오히려 모르는 것이 편하다. 알고 나면 슬픔 이전에 화가 먼저 뻗칠 것이기에.....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일단 삼국지연의의 말미를 더듬어보았다. 대부분의 삼국지 버전이 촉나라 황제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는 바, 오나라의 최후가 어찌 됐는지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촉나라가 망한 후로도 오나라는 위나라를 대신한 진(晉)나라와 17년을 대치하니 그림으로 보자면 아래와 같은 형국이었다.
보다시피 진나라는 과거의 위(魏)와 촉(蜀)을 합친 위세였던 바, 그 1/3에 불과한 오나라로서는 꽤 오랫동안 선전한 셈이라 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손권 시대에 닦아놓은 저력 때문일 것이었다. 죽은 관우의 복수를 위해 촉나라의 총력을 동원해 침공한 유비가 한방에 박살난 이릉(夷陵) 연화계의 사진을 앞서 '백발 인물열전(관운장 편)'에 실은 바 있다. 오나라는 그만큼 저력 있는 강국이었다. 하지만 264년 오정후(吳程侯) 원종이 제위(帝位)에 오르면서부터 망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나라 마지막 황제 손호이다.
손호는 손권의 핏줄이긴 했으나 적통이 아니었으므로 제위와는 인연이 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나라 임금 경제(景帝)가 병사했을 때 마침 이웃나라 촉한이 망했고, 이어 교지(월남)마저 위나라에 빼앗기자 위기감을 느낀 국민들 사이에서 능력있는 임금을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태자 손완이 아직 유년(幼年)인 탓이었다. 이에 승상 복양흥과 죄장군 장포가 손권의 셋째 아들 손화의 서장자였던 원종(손호의 자)을 옹립하였던 바, 손호는 졸지에 제위를 거머쥐게 되었다.
새 황제는 즉위 초, 창고를 열어 빈민구제 사업을 하는 등 선군(善君) 코스프레를 했으나 곧 본색을 드러내 주색잡기에 빠져들었다. 이를 본 복양흥과 장포는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임금 손호의 귀에 들어가는 통에 그 두 사람은 붙잡혀 죽고 삼족까지 처형당하는 멸문지화를 입게 된다. 그것이 손호가 황제가 된지 겨우 4개월만이었다. 그들이 반역을 한 것도 아닌데, 게다가 자신을 제위에 올려준 은인임에도 가차없이 죽이는 걸 보면 손호가 얼마나 엿같은 인간성의 소유자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오 황제 손호
이어 그는 선제(先帝)인 경제의 아내 경황후를 죽이고 그의 어린 아들마저 살해하니 신하와 백성들은 벌써부터 넌더리를 내었다. 하지만 손호는 꿋꿋하게 역대 패역군주들의 길을 걸었으니 수도 무창(武昌)에 호화궁궐을 짓고 후궁을 5천 명으로 늘였다. 인구 200만의 나라에서 후궁이 5천 명이었으니 평소 거울 좀 보던 여자들은 모두 궁으로 끌려갔다 보면 될 듯싶다. 그는 간신들을 중용하고 충신들은 죽이거나 내쳤으니 주위에는 당연히 제대로 된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중의 한 사람, 영좌국사(領左國史: 실록을 편찬하는 사관) 위소(韋昭)는 손호만큼이나 꿋꿋이 제 갈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 물론 손호와는 반대 길이었다.
위소는 조금 시니컬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위소는 다른 신하들이 서응(瑞應: 임금의 어진 정치에 하늘이 감응하여 내리는 길한 징조)에 목이 멜 때 홀로 웃었다.(서응에 호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드러내 비웃지도 않았으며 다만 홀로 웃었다) 임금인 손호가 새로운 서응에 대해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던 바, 그같은 그가 관직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전 임금 경제의 실록 편찬을 맡은 사관이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그의 죽음을 불러 오고 말았으니 경위는 다음과 같다.
황제 손호는 당시 오나라 역사서인 '오서'(吳書)를 쓰던 좌국사 위소에게 제 아비 손화의 본기(本紀)를 맡겼으나 당연히 거절당했다. 앞서 말했듯 손화는 태조 태황제 손권의 아들이기는 했으나 제위에 오른 적이 없었던 바, 그밖의 인물이 실리는 열전(列傳)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손호는 그 대답에 분노했으나 말이야 옳은 터라 당장에 어쩌지는 못하고 그 2년 뒤 다른 일을 빌미로 하옥시키고 사형을 내렸다.
인물이 없던 오나라였지만 동관령(東觀令) 화핵(華覈)만은 잇달아 상소를 올려 그의 사면을 간청했다. 그의 나이가 칠순이고 지금 '오서'를 쓰고 있으니 실록이 완성될 때까지만이라도 목숨을 부지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손호가 가납할 리 만무하였으니, 위소는 결국 죽임을 당했다.(273년)
영좌국사 위소(204-273)
진수의 정사(正史) '삼국지'는 위소의 '오서'가 있어서 편찬이 가능했다.
천하통일의 기화를 엿보던 진(晉) 무제 사마염은 279년 11월, 드디어 대군을 일으켜 오나라를 쳤다. 그때까지도 황제는 주색에 빠져 있었고 기강이 해이된 군사들은 전투를 꺼렸으니 오나라의 성들은 쉽게 함락되거나 항복했다. 용양장군 왕준이 이끄는 진나라의 군사가 오의 수도 건업(建業)에 이르렀을 때는 익년 3월로,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5개월 만이었다. 진의 대군이 황성인 석두성(石頭城)을 에워싸자 손호는 스스로를 결박한 몸으로 나와 왕준에게 항복하였던 바, 오나라의 영화는 4대 60년(220-280년)만에 종막을 고한다. 손호는 사마염에 의해 귀명후(歸命侯)에 봉해졌고 진나라의 수도 낙양에 끌려와 살다 284년 죽어 북망산에 묻혔다. 1
* 2편으로 이어짐.
낙양 북망산 손호의 묘
난징 석두성 유지(遺址)
- 손호는 풍수가의 말을 듣고 무창(武昌)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조운(漕運)의 불편함에 다시 건업으로 천도한다. 건업은 지금의 난징(남경)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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