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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의 수수께끼(III)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4. 20. 23:58
일찍이 개화(改化)에 눈 떴던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불행히도 후사 없이 요절을 했다. 이에 헌종은 불과 여덟 살의 나이에 노론 세력인 안동 김문(金門)에 의해 옹립되었는데, 조금 나이가 들어 뭔가를 해보려 할 즈음 갑자기 죽고 만다.(그때가 23살로, 그에 관한 독살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나마 헌종은 후사가 없었던 바, 그다음 왕인 왕인 철종 역시 안동 김씨에 의해 옹립되었다.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변(昪, 초명은 원범)이란 왕족 청년을 데려다 왕위에 앉힌 것이다.(1849년)
이는 다들 일찍 가는 바람에 왕실에 근친(近親)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안동 김문이 제 입맛에 맞는 자를 찾은 결과이기도 했다. 이에 잠시 풍양 조씨에게 넘어갔던 힘은 다시 안동 김씨에게 넘어왔고, 철종은 그저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천애고아로서 겨우 연명하다 하루아침에 왕이 된 그에게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당시의 세계는 제국주의의 발호와 함께 급변하고 있었던 바, 시급한 개화가 요구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안동 김문에 개화의 의지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편하게 먹고살며 세도를 누리던 그들이 변화를 원할 이유는 전혀 없기에.
이하응(흥선대원군)은 철종의 후사 역시 안동 김씨에 의해 옹립되려는 것을 극적으로 막았다. 이름뿐인 왕족 이하응은 안동 김씨의 전횡에 파락호로 살았으나 한 방을 지닌 자였는데, 그 한 방이 철종의 죽음과 더불어 터졌다. 공교롭게도 철종 역시 후사가 없었던 바, 당시 왕실의 최고 실권자인 대왕대비 조 씨(효명세자의 와이프)와 공모해 그 빈 왕좌에 재빨리 제 아들 명복(고종)을 앉혔던 것이다.(1863년) 당시 고종의 나이 12살, 국가의 권력은 자연히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로 집중됐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결국 조선의 멸망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그가 공들인 삼수병(三手兵: 포수, 사수, 살수의 통칭)들은 기대에 걸맞은 빛나는 활약을 보였지만 그들의 분전은 오히려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기의(機宜)를 놓치는 꼴이 되었다. 아무 의미 없는 소리겠으나 조선이 그때 프랑스나 미국에 문호를 개방했다면 분명 35년 간의 일제 식민지 기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바람직했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니, 제국주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보여준 행각이나 미국의 필리핀에서의 행각을 보면, 그들이 조선에 관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어림없다.
문제는 개화의 실기(失期)였다. 좀 더 빨리 문호를 개방했다면 틀림없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개화를 서두른 고종의 선택 또한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력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고종은 친청(親政)이 시작되자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쇄국정책에 무조건적인 반대를 보였던 바, 강화도 회담의 전권대사 신헌이 조약에 별다른 고민을 보이지 않은 것은 이와 같은 고종의 의중에의 반영일 터이다.(당시 고종의 정책은 딴 게 없었고 오로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반대로 나가는 것이었다)
아무튼 고종의 개화 조급증이 결국 강화도 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이끌어냈다는 것이 그 수수께끼 역사에의 나의 최종 결론이다.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해 앞뒤 생각 없이 개항을 선택한 탓에 신헌 역시 앞뒤 생각 없이 조약문에 서명날인을 하게 된 것이 바로 강화도 조약의 본질이었다.(따라서 이왕 늦은 거 좀 더 국가의 힘을 키워 개방을 했다면 좀 더 나은 결과가 도출되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을 지우기 힘들다. 그렇게 보자면 꼰대 최익현의 주장이 훨씬 시류에 적합한 것이었다)
혹자는 신헌이 원래부터 개화론자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증거로써 개화론자였던 강위,* 박규수** 등과의 친분을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서울 화계사와 운현궁에 내걸린 신헌의 글씨를 보자면 그가 개화론자였다는 말은 맞지 않을 듯한 바, 그 사진들을 몇 장 올려본다.
* 강화도 회담의 배석자로 조약 체결 쪽으로 분위기를 이끈 인물이다. 시인이자 개화사상가로 훗날 한성순보를 창간했다.
** 유명한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평안감사 당시 제너널 셔먼호를 불태운 장본인이지만 강화도 조약에 임해서는 개항 반대론자인 최익현과 시종일관 대립한 대표적 개화론자였다.'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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