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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실제가 혼재된 예루살렘(I) - 솔로몬 왕의 성전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9. 30. 21:00
일반인에게는 생소하고 의아하게 여겨질 일이나 이스라엘 왕국의 초기 왕 다윗과 솔로몬은 기실 그 실재성을 꾸준히 의심받아 왔다. 역사상 존재하지 않은 가상의 인물이거나 촌장 정도의 인물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는 모태 시오니스트이자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 참모총장과 부수상을 역임했던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의 무리한 발굴의 귀결이기도 하지만, 성서의 진실을 밝히려는 이스라엘 핀켈스타인이 제기한 끊임없는 의문의 반영이기도 하다.( ☞ '철저히 파괴된 성서의 도시 하솔'/'엑소더스,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I')
이가엘 야딘
이스라엘의 건국 영웅 영웅으로 퇴임 후에는 본업인 고고학자로 돌아가 하솔 왕국, 다윗과 솔로몬의 유적, 마사다 요새, 사해문서 등을 발굴했다.
이가엘 야딘의 예루살렘 발굴 보고서
이스라엘 핀켈스타인
텔아비브대학 고고학 교수로 모세의 출애급과 여호수와의 가나안 정복, 다윗과 솔로몬 왕국을 역사적으로 부정했다.
므깃도 요새와 핀켈스타인
그의 주장에 따르면 솔로몬 왕국 시대의 것이라 여겨져온 하솔과 므깃도 및 게젤(열왕기상 9:15)은 북이스라엘 오므리 왕조의 것임이 분명하다.
다윗과 솔로몬 왕국을 부정한 핀켈스타인의 책
(국내 번역본은 없으며 위 책은 케이씨비에스를 통해 주문 가능하다. ₩25,870)
이스라엘 핀켈스타인이 다윗 왕국의 허구성을 말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다윗 시대 유적층에서 통일왕국의 유적을 전혀 찾지 못한 까닭이다. 예루살렘의 고대 유적지에서 통일왕국 시대인 기원전 10세기의 유적이라 할 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유물이라는 것도 깨진 도기편 몇 개가 전부였다. 핀켈스타인의 해석에 있어서는 1993년에 발견되어 성서고고학자들을 흥분시킨 텔 단 석비의 '다윗'이라는 명문도 한 나라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다윗 집안의 사람일 뿐이다.
~ 핀켈스타인의 주장인즉슨 성서에는 예후가 요람을 죽이는 걸로 나와 있으나(열왕기하 9:24) 텔 단 석비에는 하사엘이 아합 왕의 아들 요람 및 다윗 집안 사람을 죽인 걸로 기록돼 있는 바, 오히려 성서의 기록이 의심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아합 왕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한 나라의 왕으로서 명기(明記)된 반면 다윗은 전통적인 왕가(王家) 표기법이 아닌 일반적 가문으로 표기되었다고 말한다.
텔 단 석비(Tel-Dan Stele, BC 900–850)
아람 왕 하사엘(열왕기상 19:15-18)이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세운 기념비의 조각으로 추정된다.
텔 단 석비의 '다윗' 명문
1993년 7월 21 이스라엘 북부 텔 단에서 발견된 이 아람어 비석 조각(길이 32cm 폭 22cm)에는 아람 왕 하자엘의 승전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비문 9째 줄에 '베이트 다비드'(다윗 가문)라는 단어가 출현한다. 이 비문은 성서 밖에서 다윗에 대해 언급된 거의 유일한 기록으로 현재 이스라엘 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핀켈스타인이 엑소더스를 부정하는 이유도 그에 관한 역사적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니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이집트 쪽은 물론이요, 기를 쓰고 찾은 이스라엘 측에서도 히브리 노예들의 이집트 탈출에 관한 그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에 지난 1999년 이스라엘 역사학회와 고고학회는 '출애급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고 기원전 7~5세기 성서 편집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공식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정이 이러한 바, 핀켈스타인이 엑소더스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이유가 있을 리 없다.
~ 이스라엘은 1967년 '6일 전쟁'에서의 승리 후 시나이 반도를 장장 15년간이나 점령하다 1982년 중동 평화협정이 체결되며 비로소 이집트에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 15년 간, 이스라엘 성서역사학자 및 고고학자들은 그곳 시나이 반도, 즉 성서의 '광야'를 이잡듯 샅샅이 조사했으나 출애급에 관한 그 어떤 증거도 찾아낼 수 없었기에 결국은 위와 같은 발표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지금 출애급을 믿는 사람은 대한민국 기독교인 뿐이라고들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믿지 않는 얘기를 한국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것이니, 오죽하면 도비아스라는 유대교 랍비가 "너무 순진하다(too naive)"며 냉소하기까지 했을까.
앞서도 밝혔듯 나는 이스라엘 핀켈스타인의 주장에 여러모로 동조하는 편이지만 다윗과 솔로몬 왕의 실재 여부에 있어서 핀켈스타인을 편들 생각은 없다. 다만 한가지,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사실을 이 지면을 통해 밝히려 하는 바, 그것은 과거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지금 예루살렘 올드 시티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과거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가 감격에 젖어 노래한 시편의 예루살렘 역시 지금 예루살렘 올드 시티가 아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시편 122-5)
이 글에 앞서 포스팅한 '슐레이만 대제가 경험한 우문현답'에서 언급한대로 지금 예루살렘 올드 시티에 남아 있는 성문과 성벽 등의 유적을 예수 시대, 즉 로마시대의 유적으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들은 모두 예수 이후 1500년이나 지나 세워진 건축물로서 오스만제국 슐레이만 1세 시절인 1538~1540년에 집중적으로 건립된 것들이다. 억지로나마 예수 시대의 건물을 찾자면 예루살렘 성전산의 서쪽 석축 기단부, 이른바 '통곡의 벽'과 아브라함의 무덤이라는 헤브론의 막벨라굴 정도랄까.(막벨라굴의 기단부는 헤롯 왕 때의 것이라고 함)
예루살렘 통곡의 벽
성전산의 서쪽 석축 기단부만 로마시대에 것이고 이후 비잔틴 시대와 이슬람 시대를 거치며 증축되었다.
헤브론 막벨라굴
아이들이 서 있는 기단부만 헤롯 왕 때의 흔적이고 나머지는 모두 이슬람 시대에 건립되었다.
지금의 예루살렘에서 통일왕국시대나 분열시대의 흔적을 찾는 것은 서울에서 백제 왕성이나 고려 남경(南京)의 흔적을 찾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이 쫓겨난 로마시대 이후 그곳에는 2000년간이나 이민족이 들어와 살아왔던 바, 3000년 전 도성의 흔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렇게 보면 과거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다는 모리아산(성전산)에서 솔로몬 시대의 유물이 단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핀켈스타인의 주장은 오히려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즉 지금의 예루살렘 올드 시티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왕국 시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위 시편에서 순례자가 노래한 예루살렘도 올드 시티와는 무관한 기드론 골짜기 남서쪽 기슭에 있었던 기원전 11세기의 여부스족 성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예루살렘은 사사시대까지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 성을 다윗이 빼앗아 통일왕국의 수도를 삼았고 솔로몬의 성전을 만들기 위해 그 북쪽에 성전 터를 마련하였다. 그렇게 확장된 수도 면적은 히스기야 왕 시절에 다시 늘어났다. 예수 시대 예루살렘은 하스몬 왕조(BC 142-63) 때 북쪽에 왕궁 터를 마련하며 4배 정도로 확장되어진 면적(약 55만 평)이 이어져 왔는데, 헤롯은 그렇게 넓혀져 포함되어진 영역에 성전을 세웠을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구약성서 역대기를 보면 솔로몬의 성전은 분명 당시 시온으로도 불리던 다윗의 도시에 세워졌다.(사무엘하 5:9) 다윗 왕은 말년에 여부스 족속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구입하였고(역대하 21:22/'사무엘기'의 여호와가 퍼뜨린 까닭 모를 전염병'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 장소) 그곳에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다.(역대하 3:1) 훗날 바빌론에서 돌아온 스룹바벨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파괴된 성전을 작게나마 복원시킨 곳도 필시 그곳이겠지만 그곳에 다시 헤롯이 성전을 세웠을지는 의문이다. 헤롯은 하스몬 왕조로부터 매우 넓은 땅을 물려받았기에 굳이 예전의 비좁은 장소를 고집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외신을 보니 재선이 힘겨울 것으로 예상되는 트럼프가 내세울만한 치적거리를 만들기 위해 이스라엘과 중동 일부 국가들을 서둘러 수교시킨 듯 보인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들은 아마도 영원히 화합할 수는 없을 것이니, 그 빙탄불상용의 정점이 바로 성전산이다. 유대인들은 그곳이 헤롯이 세운 여호와의 성전이 있던 성스러운 장소임에도 자신들이 나라를 잃고 떠도는 동안 이슬람에게 침탈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그 성전산이 솔로몬 시대의 그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로마시대의 성전은 여호와를 믿는 유대인이 세운 것이 아니라 이민족의 출신의 왕 헤롯이 유대인을 어르기 위해 세운 민심 무마용 건축물이라는 사실은 간과한다)
누구나 다 아는대로 그 성전산 위에는 무함마드가 하늘을 부름을 받아 승천한 장소에 만들었다는 이슬람 모스크 '바위 돔 사원'과, 무함마드가 일야(一夜)에 메카에서 이 산으로 이동해 하나님의 표적을 목격한 일을 기념해 만들었다는 '알 아크사' 모스크가 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이 장소를 회복하는 것이 숙원인 바, 매입에서부터 최후로는 성전(聖戰)이라는 4단계 계획안을 마련해놓고 있다. 이스라엘을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과연 그 장소가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곳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솔로몬 왕 때의 예루살렘(?)
솔로몬 왕 시절 다윗의 성이 확장되어 성전산까지 포함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그림이다.
느헤미아 시절의 예루살렘(?)
페르시아 왕 아르닥사사 1세가 유대인들을 포로에서 풀어준 후(BC 444) 그들이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했을 때 성전산의 성전도 복원했다는 주장을 담은 그림이나 많은 물음표가 말해주듯 그 위치는 불분명하다.
헤롯의 성전 자리에 세워진 바위 돔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
잠재적 화약고 예루살렘 올드 시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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