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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슐레이만 대제가 경험한 우문현답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의 우화 2020. 9. 27. 20:13

     

    오스만제국의 슐레이만 1세(Süleyman I, 재위 1520-1566년)는 1526년 모하시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이끄는 헝가리 군대를 궤멸시키고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을 향해 진격하였다. 만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대마저 깨진다면 적어도 동부 유럽은 완전히 이슬람화될 터인데,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슐레이만 1세는 의외로 합스부르크 왕가와 평화협정을 맺었다.(1529, 1532의 양년) 완강한 저항의 유럽 제국을 도모하기보다 동쪽의 페르시아를 공략해 자국의 영토를 넓힐 요량이었다.

     

    1533년 슐레이만 1세는 페르시아 원정에서도 승리하여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이라크와 아르메니아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아덴과 예멘에 군대를 파견해 아라비아 반도 남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어 그는 1538년 9월 28일, 그리스 북안의 프리베자에서 로마교황 바오로 3세가 조직한 유럽 연합 해군(교황령, 스페인,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몰타 기사단)을 격파하고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 튀니지, 알제리를 정복했다.(이후 오스만 제국은 레판토 해전에서 패할 때까지 40년간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한다) 

     

     

    프리베자 해전도

    갤리언 선 뱃머리에서 슐레이만 1세가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가운데 유럽의 병사들이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고 있다. 이슬람 화가 오하네스 우메드 베자드가 그린 그림이다.

     

    슐레이만 1세 때의 오스만 제국 영토

    3대륙에 걸친 영토를 개척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슐레이만 1세에 대해 유럽 사회에서 부른 명칭은 매그니피션트(Magnificent), 즉 장엄제(莊嚴帝)이다.

     

    카이로에 입성하는 슐레이만 1세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슐레이만 대제(大帝)로 통용된다.  

      

    슐레이메니예 모스크

    1550년 슐레이만 1세의 명령으로 착공되어 7년의 공사 끝에 완공했다. 이스탄불 구시가지 골든혼 근방에 위치하며 오스만 건축 최고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슐레이만 1세와 왕비 록셀라나의 묘가 있다.

     

     

    술탄 슐레이만의 대외적 이미지는 잔인한 정복군주가 아니라 안정된 내치로 번영과 문화전성기를 이끈 영주(英主)로 인식되고 있다. 그의 업적 중에서 유럽인이 특히 인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십자군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복구시킨 일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예루살렘 올드 시티의 성벽과 성문은 로마시대의 건축물이 아니라 거의가 슐레이만 대제 때 건립된 것들이다. 사실 예루살렘 올드 시티는 이슬람의 3대 성지이기도 하므로 문화 군주인 슐레이만으로서는 복원의 필요성을 느꼈을 법하다.

     

    여러 번 얘기했듯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그 세 종교의 공통된 성지이다. 그들은 이 예루살렘 성지를 두고 오래 싸웠고, 이론적으로도 유아독존식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오랫동안 싸우고 있다. 슐레이만 대제도 그것이 못내 헛갈리고 못마땅했는지 유대교 랍비, 기독교 신부, 이슬람 이맘을 불러 물었다.

     

    "그대들은 모두 유일신이신 하느님,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다윗의 하느님을 자신의 하느님이라고 믿으며 저마다 자신은 맞고 남들은 틀렸다고 하니 옳고 그름을 도통 판단할 수가 없다. 짐은 어떤 말을 믿어야 하는가?"

     

    그러자 이슬람 이맘이 말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듣지 말고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시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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