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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수래공수거, 인생은 결국 나그넷길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의 우화 2021. 1. 3. 22:26


    한 남자가 도량이 깊기로 소문난 수도승을 방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도승의 방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가구라고는 덩그러니 놓인 앉은뱅이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남자는 수도승에게 인사를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구는 전부 어디에 있습니까?"


    수도승이 그에게 되물었다. 

    "당신의 가구도 여기에 없지 않소?"


    남자가 어이 없다는 듯 대답했다.

    "저야 이곳에 잠시 다니러 온 나그네가 아닙니까?"


    그러자 수도승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이 세상에 잠시 다니러 온 나그네라오."



    길상사 진영각의 법정스님 의자

    무소유를 강조하던 그가 남긴 것은 정말로 이것이 거의 유일하다. 서울 길상사는 스님의 책 '무소유'에 감명받은 대원각이라는 요정 주인(법명 길상화)이 요정 건물을 시주해 만들어진 절이다.(사진: 단비뉴스) 



    위의 이야기는 류상태가 지은 <교양으로 읽는 세계 종교>라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즉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간다'는 인생길을 표현한 위 이야기가 새삼 와 닿는 것은 작년 말에 있었던 화제의 두 사건 때문이다. 


    첫 이야기는 좀 어처구니없던 일로, 혜민스님이라는 스타(Star) 스님이 한 종편 방송에서 '남산 뷰' 고급 저택에서의 생활을 공개한 뒤, 푸른 눈의 수행자로 유명한 현각스님에게 "수도승이 아닌 연예인일 뿐",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도둑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나아가 현각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아먹고 지옥으로 가고 있는 기생충"이라는 막말까지 퍼부었다. 내가 어처구니없다고 여긴 것은 그 젊은 스님의 행동으로서, 수도를 하고 안 하고야 제 마음이지만 '풀(full)소유'의 집은 왜 공개했는지..... 


    화제가 된 혜민스님은 요즘 말로 화려한 스팩의 소유자로서 이로 인해 '데뷰' 때부터 관심을 모았었다. 소개된 기사를 보면, 그는 청소년기를 국내에서 보낸 뒤 미국으로 넘어가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 석사, 프린스턴대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7년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햄프셔대에서 종교학 교수를 지내다 귀국하여 2000년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아 예비 승려가 됐고, 2008년 직지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하고 대한불교조계종의 정식 승려가 됐다. 그리고 2012년 펴낸 명상에세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각종 방송과 강연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렸고, 이른바 스타가 됐다.(아마도 잘 생긴 얼굴도 한몫했으리라 본다)


    그러다 정신줄을 놓았는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종편에 제 집을 공개해 현각스님의 분노를 부르고(공교롭게도 현각스님도 하버드 출신이다) 대충 앞의 망신을 자초했다. 대중들이 공분한 건 그간 무소유를 부르짖던 자가 지닌 '풀소유'에 대한 배신감 때문일 터, 아무튼 그는 한바탕의 논란 후 "모든 활동을 내려놓고 대중 선원으로 돌아가 부처님 말씀을 다시 공부하고 수행 기도 정진하겠다"고 밝혔다. 주위를 보면 배움과 수행이 나이를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나는 혜민스님이 보여준 어처구니없는 행동 또한 그와 같은 범주로써 이해하며 향후의 수행 기도 정진이 부디 순탄하길 고대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이야기다. 그는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의 최후진술에서 부친인 고(故) 이건희 회장에 관해 언급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부회장은 지난해 5월에 있었던 대국민 발표 당시의 '4세 경영 포기'라는 파격적 발언을 재확인시켰다고 하는 바, 이는 그의 눈물보다 더 많은 관심을 모았다. 지난해 5월 그 자신도 말했지만 당시 세인들을 놀래켰던 천문학적인 상속세로 인해 4세 경영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됐다. 이번 재판은 실질적으로 삼성 왕국이 막을 내리게 되었음은 공언한 자리였다는 점에서 그의 눈물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 왕조가 자신의 대에 저무는데 어찌 회환이 없겠는가? 


    후문에 따르면 이재용 부회장은 눈물을 흘리는 동안 가슴을 부여잡았다 하고, '세기의 재판'이 벌어진 서울고등법원 법정은 한동안 숙연한 분위기에 휩싸였다고 한다. 검찰의 기소 내용을 보자면 이 부회장은 죄가 너무 막중해 이번에는 집행유예 같은 것으로 빠져나오기 어렵다. 그렇다고 재판부가 실형을 선고하기도 부담스러울 터인데, 나는 그가 보인 눈물의 진정성이 판결을 결정지으리라 본다. 삼성그룹의 영빈관인 승지원(承志園) 거실에는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글귀가 걸려 있다 하며, 작년 고인이 된 이건희 회장의 집무실에도 부친이 쓴 같은 글귀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감히 예단하거니와 이 부회장의 눈물 속에 이 마음이 담겼다면 무사 귀가할 것이요 그저 흘렸다면 감방으로 갈 것이다. 



    송광사 불일암


    불일암 앞의 또 다른 의자

    불일암에는 법정스님이 만든 의자가 또 하나 전한다. 그는 1975년 불이암을 짓고 홀로 17년을 수행하다 '무소유'란 책을 냈다.  이후 그로 인해 방문자가 많아지자 1992년 이곳을 떠났다. 


    자신이 만든 의자에 앉아보는 법정스님.

    스님은 불일암 시절 장작더미에서 고른 부재를 뚝딱거려 의자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는 이때 "내가 중이 안 됐으면 목수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님은 2010년 3월 11일 입적했다.  


    이태원동 승지원에 몰린 기자들.

    지난 2008년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사건으로 승지원이 압수수색을 받을 때의 사진이다. 


    고 이건희 회장 집무실에 걸렸다는 글씨.

    이건희 회장은 2020년 10월 25일 3시 59분, 6년간의 투병 끝에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른 나이도 그러했지만 국내 최고 부자의 명예를 지녔던 그였기에 가는 길은 더욱 무상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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