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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우라 아야코와 '빙점(氷点)'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의 우화 2020. 7. 5. 06:49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 1922-1999)는 일본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일본인 기독교도가 독실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드문 일본인 기독교도이며(앞서도 말했지만 일본의 기독교인 인구는 1%도 채 되지 않는다) 아울러 독실하다는 뜻이다. 나는 과거 명색이 신학도였음에도 신·구약이 합쳐서 66권이며 그걸 간단하게 외우는 방법이 3x9=27이라는 것을 미우라 아야코에게 배웠다. 구약성서가 39권이고 신약성서가 27권이니 이를 합하면 66권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크리스천이 된 건 아마도 마에카와 쇼라는 기독교인 친구 때문일 텐데 의학도였던 그가 폐결핵과 골수염을 앓고 있던 아야코에게 의학적 조언과 함께 신앙심을 함께 건넨 듯싶다. 그녀는 예수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으니 당시 난치병을 앓고 있던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먼저 동생 요코를 저 세상으로 보낸 슬픔, 그리고 엉터리 군국주의와 천황폐하 사상으로부터의 도피처를 기독교에서 찾은 면도 있을 것이다.(그녀는 전쟁 패망 후에도 지속되는 군국주의 교육에 초등학교 선생직을 사퇴했다)

     

    글 쓰기를 좋아하던 그녀는 병석에서 자신이 살던 홋카이도의 기독교 잡지에 자주 투병기를 올리며 자신과 환우(患友)들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그런데 즈음하여 그녀는 자원 봉사활동을 하며 가끔 홋카이도 기독교 잡지에 글을 올리기도 하던 미우라 미쓰요라는 사람의 방문을 받게 된다. 잡지의 편집장인 스와가라가 미우라 미쓰요를 여성이라고 착각, 병중의 아야코를 찾아가 위안을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미우라 미쓰요는 망설였으나 아야코를 방문하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두 사람을 맺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얼마 후 홋타 아야코(堀田綾子)는 미우라 아야코로 성이 바뀌었다. 아야코의 나이 37살 때의 일로 미우라 미쓰요는 그녀보다 2살이 적었다.

     

    그 사랑의 힘이었을까, 미우라 아야코는 차츰 병마에서도 벗어나 원기를 회복하게 되지만 홋카이도 산림과 하급 공무원인 남편의 박봉으로는 늘 살림이 쪼달렸다. 이에 그녀는 잡화와 식품을 취급하는 구멍가게를 열었는데, 이게 그만 대박이 났다. 늘 한결 같은 마음씨로써 고객을 싹싹하게 대하고 게다가 비싸지 않으며 다양한 구색까지 갖춘 그녀의 가게는 점점 번창해 구멍가게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으니, 매일 트럭이 와서 물건을 공급하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반면 주위의 가게들은 당연히 죽을 쒔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 미우라가 뜻밖의 제안을 하였다.

     

    "우리는 좋아졌지만 동네의 다른 가게들은 문을 닫게 생겼소. 이건 우리가 원하던 바가 아니오. 가게의 규모와 영업 시간을 줄이고 남는 시간에 당신 좋아하는 글을 써보면 어떻겠소?"

     

    아야코는 남편의 말에 감동을 하고 그대로 따랐다. 손님이 오면 적절히 다른 가게로 안내했다. 이후 가게 구석 방에 엎드려 이런저런 글을 쓰던 그녀에게 어느날 신문의 공모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1964년 아사히 신문사에서 내건 1천만 엔 고료 장편소설 공모 기사였다. 아야코는 그때부터 이를 목표로 소설을 썼고, 기성작가와 신인을 망라하여 731편이 투고된 그 공모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하였다. 그것이 바로 '효댕(氷点)' 즉 '빙점'이었으니 그녀의 나이 42살 되던 해에 거머쥔 두 번째 행운이었다.

     

    이 소설은 일본열도를 세게 흔들었다. '빙점'은 당연히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와 드라마로도 몇 번이나 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도 '빙점'은 엄청나게 팔렸고 영상으로도 몇 차례 리메이크되었는데, 내가 본 영화는 작고한 김영애 씨가 표독한 양어머니로, 서울여고 출신의 원미경 양이 딸로 출연했던 1982년 작 '빙점'이다.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졸업생 대표로 축사를 하게 된 원미경이 밤새 원고를 준비하지만 막상 졸업식장에서는 그것을 읽을 수 없게 되는 장면이다. 김영애가 그것을 백지와 바꿔치기한 것인데, 이 양어머니는 딸이 망신당하는 모습을 학부모석에 앉아 눈꼬리를 세우고 지켜본다. 하지만 딸은 답사 원고가 백지로 바뀐 사실을 그대로 고하며, 졸업 후 우리에게 닥쳐올 역경은 이보다도 훨씬 더 할 것이러니 저 구름 위의 태양처럼 꿋꿋하게 극복해 나가자는 즉흥연설로써 좌중의 우레같은 박수갈채를 받는다. 이런 상황이 이르게 된 자조지종은 다음과 같다.

     

    종전(終戰) 후 게이죠(한국영화에서는 남궁원 분)는 홋카이도 아사히가와 시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아내 나쓰에(김영애 분)와 세 살박이 딸 루리코와 행복하게 산다. 그런데 나쓰에는 병원의사 무라이와 살짝 바람을 피고, 그 사이 루리코는 밖에 나갔다가 불한당에 살해되고 만다. 이후 게이죠는 부부 합의 하에 여자 아이를 입양해 수양 딸로 키우게 되는데, 이 아이는 다름아닌 루리코를 살해한 불한당의 딸로, 게이죠가 아내 나쓰에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체의 사실을 숨기고 데려온 아이였다.

     

    이 같은 내막을 모르는 나쓰에는 그 아이에게 요코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정성스럽게 키우지만 어느날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 이때부터 분노의 화신으로 돌변한다. 또한 요코의 자상한 오빠 토오루(정한용 분)도 요코와 자신이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이라는 알게 된 후 동생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고, 요코는 토오루의 친구인 기타하라(이영하 분)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요코가 좋은 데로 시집가는 것을 가당찮게 여긴 나쓰에에 의해 출생의 비밀이 까발려진다. 이에 충격을 먹은 요코는 결국 음독 자살을 기도하는데.....

     

    미우라 아야코는 '빙점'의 저변에 기독교 원죄의식을 깔았다. 그리고 지옥과 같은 갈등을 전개시키지만 이 모든 갈등을 용서와 사랑이라는 기독교적 사고로써 해결했던 바,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휴머니즘 작품이 되었다. 작품에 깔려 있는 기독교 정신 때문일까, 그녀의 소설과 에세이는 기독교인이 많은 한국에서 특히 반향이 커서, 무려 146편의 작품이 306회나 번역 출간되며 무라카미 하루키를 제치고 최고의 판매부수를 기록한 일본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명성과는 무관하게 육체적으로는 내내 병마에 시달려야 했으니 폐결핵과 골수염 이후로도 직장암 수술을 받았고 다시 파킨슨 병으로 고생하다 77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와 같은 자신의 불행을 이웃 사랑이라는 실천적 신앙심으로 극복했던 바, 아래의 금언을 남기기도 했다.

     

    "질병으로 인해 내가 잃은 것은 단지 건강뿐이다. 대신 나는 이웃과 신앙과 생명을 얻었다. 사람이 생을 마감한 뒤에 남는 것은 그 사람이 행한 위대한 공적이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나눈 사랑이다."

     

     

    이시하라 사토미 주연의 '빙점'

     

    지금도 발간되는 스테디셀러 '빙점'

     

     

    내가 보았던 영화의 포스터

     

    말년의 미우라 아야코

     

    홋카이도 미우라 아야코 기념관 사진

    '추위가 극심한 겨울은 이불을 뒤짚어쓰고 <빙점>을 써내려갔다'는 한국어 설명이 달려 있다.

     

     

    추억의 바로 그 영화(예고편/화질은 엄청 나쁘지만.....)

     

     

    이시하라 사토미 주연의 '빙점'(전편/자막 있고 화질 괜찮음)

     

    이시하라 사토미 주연의 '빙점'(후편/전·후편, 네이트 서피 일본드라마 클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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