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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낭만의 거리 혜화동에 숨은 어두운 역사(II)-동소문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10. 25. 00:12

     

    혜화동은 한양도성 4소문 가운데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에서 유래되었다. 1397년(태조 5년) 이성계가 한양 성곽을 축조할 때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는데 혜화문은 4소문 중의 동소문(東小門)에 해당한다. 당시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창경궁의 정문 이름과 같아 혼란을 주었으므로 1511년(중종 6년)  혜화문으로 바꾸었다. 뜻은 거의 같아 '널리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문'이라는 의미였다.

     

     

    '수선전도'에서 본 혜화문의 위치

     

     

    꼭 뜻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이 문은 정말로 백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으니 북대문인 숙정문을 대신해 실질적인 북문 역할을 담당한 까닭이었다. 왜냐하면 숙정문은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건립 초를 제외하고는 문이 내리 닫혀 있었고, 또 그곳으로 나가봐야 길이 없는 산간으로 연결되는 탓에 북쪽이나 북동쪽, 그러니까 포천, 의정부, 양주 등지로 왕래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겸재 정선(1675-1759)의 '동소문도'를 보면 문은 전란(아마도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성루가 복원되지 않은 상태이며 고갯길이 완연하지만 길 자체는 의외로 시원하다.

     

     

    겸재의 '동소문도'(東小門圖)

    혜화동 로타리 쯤에서 본 혜화문을 그렸다.

     

     

    이후 영조 때 중건된 혜화문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헐렸다. 혜화동이 종점이었던 전차노선을 돈암동까지 연결하는 바람에 성문이 거추장스러워진 까닭인데, 이때 일제는 성문과 성곽뿐 아니라 토목공사로써 도로의 레벨(높이)도 낮춰 약 7m 정도를 밀어버렸다. 전차 통행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아래 흑백사진의 혜화문과 경사 급한 언덕길은 없어지고 현재의 동소문로가 생겨나게 되었다. 지금의 혜화문은 원위치인 동소문로 가운데에서 서북쪽으로 약 30m 정도 옮겨 1992년 12월에 이전∙복원공사를 시작, 2년 후인 1994년 10월 15일 완공되었다.

     

    ~ 여담이지만 과거 70~80년대 혜화동 고개에는 시대불명의 방공호를 개조해 꾸민 '석굴암'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혜화동 언덕길의 화강암 암반을 뚫어 만든 흡사 개미집과 같은 대피 장소들을 룸으로 이용했는데, 화강암 동굴 속에서 마시는 기분도 묘했거니와 겁나게 시원했던 까닭에 폭음을 해도 술이 잘 취하지 않았다. 위 정선의 그림 가운데 내가 맥주잔을 그려놓은 바로 그 장소로, '석굴암'은 80년대 후반, 암반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즈음까지도 비닐을 받쳐가며 영업했으나 결국 문을 닫았고, 혜화문이 건립되고 도로가 정비될 때 그 흔적조차 사라져버렸다.(문득 문득 그곳이 그립다) 

     

     

    일제시대의 혜화문

     

    1994년 복원된 혜화문

    현판글씨를 현대국어식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썼고 글씨도 옛 글자와 다르다. 

     

    혜화동 고개와 혜화문

    삼선동 쪽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혜화문은 원래 이 길에 있었다.

     

    일제시대의 독일 신부가 찍은 혜화문

    1910년대 독일 성 베네딕도회 신부가 찍은 혜화문과 백동 수도원

     

    같은 방향에서 찍은 사진

    백동 수도원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은 카톨릭대학교와 혜화동주교원이 들어서 있다.  

     

    반대편 혜화동주교원에서 바라본 혜화문 

     

    혜화문 안내판

     

    1890년대의 혜화문

     

    지금의 혜화문

    현판이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옛것이 있었음에도 오른쪽 쓰기의 새 글씨를 내걸었던 이유를 모르겠다. 

     

    1774년 제작된 문루 현판

    영조 20년 혜화문이 신축될 때 걸렸던 현판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복원되긴 했어도 원래의 위치가 아닌 까닭인지 뭔가 어색하니, 우선은 옛 모습대로 복원되지 않은 데다 현판의 글씨도 엉터리였었다.(우선은 글씨가 안습이었고 방향도 현대국어식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썼다) 다행스럽게도 지적이 있었는지 작년말 본래의 현판(영조 때인 1774년 제작된)을 최대한 모방한 현판이 새로 걸려 조금이나마 옛 자취를 되찾게 되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도 행복한 투정인지 모르니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헐린 서대문(돈의문)과 서소문(소의문)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복원조차 할 수 없는 처지이다.

     

     

    디지털 복원된 돈의문

    옛 자리 근방에서 핸드폰으로 만 볼 수 있는 이상한 복원이 이루어졌다.('뉴스웨이' 사진)

     

    소의문 표석

    서울 중구 서소문로 100 중앙일보 구관 앞길의 푯돌 하나만이 과거를 증언한다.

     

     

    이렇듯 한양도성의 ·소문이 일제에 의해 헐려나가는 와중에도 숭례문과 동대문은 제 자리를 지켰다. 이제는 제법 알려졌지만 여기서 '한양도성의 정문 숭례문'에서 언급했던 생존의 이유를 다시 한번 싣고자 한다.

     

    1916년 데라우찌에 이어 제 2대 조선 총독이 된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경성 일본거류민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선신궁이 있는 남산과 일본인 거주 지역인 용산을 잇는 대로(大路)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자 중간을 가로 막고 선 숭례문이 방해거리가 되었던 바, 하세가와는 이 참에 한양도성 4대문을 모두 철거하기로 마음 먹는데, 그 방법이 육군 원수 출신답게 포로 쏘아 부셔버리는 것이었다. 그때 경성 일본거류민회 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남대문은 분로쿠노에끼(文綠役,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지나간 문입니다. 당시를 기념할 만한 것은 남대문 외 두 세가지밖에 없는데, 파괴해버리면 아깝지 않겠습니까? 문은 보존하고 성벽을 허물어 길을 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세가와는 이 제안 역시 받아들였고, 이에 숭례문은 고시니 유키나가가 입성한 흥인지문과 함께 살아 남게 되었다. 나아가 일제는 조선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 1호를 내려 이 문을 조선 승전기념물로써 문화재로 등록하기까지 이르니 1934년 8월 27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 403호에 의해 조선 보물 제 1호와 2호가 되었다.(3호는 서울 보신각 종으로, 당시 조선 땅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참고로 평양의 고적들도 일부는 그렇게 살아남았으니 연광정은 임진왜란 때 고시니 유키나가와 명나라 심유경이 회담한 장소로서 보존됐고, 기타 현무문, 칠성문, 보통문, 을밀대 등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승전과 관련 있는 곳으로서 보존됐다. 예를 들자면 현무문은 청일전쟁 때 하라다 주키치라는 병졸이 쏟아지는 총탄 속을 돌파해 문을 연 곳이고, 보통문은 노즈 미치쓰라 사단이 돌파해 평양에 입성한 장소라는 식이었다.

     

     

    겸재의 '연광정도'(練光亭圖)

    평양성의 대동문과 연광정, 대동강과 모란봉 등을 그렸는데 '해동제일승제일필'이라는 글씨가 써 있다. 조선 최고의 경치를 최고의 솜씨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단층인 연광정이 당시는 중층누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 칠성문

    북한 국보 1호인 평양성의 내성 북문으로 북두칠성에서 가져온 이름인 바, 곧 북문을 의미한다. 누각을 제외하고는 고구려 때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을밀대와 현무문

    일제가 1920년 발행한 <조선풍속풍경사진첩> 속의 사진으로, 청일전쟁 당시 이곳에서 청군 섭지초와 일본 오시마 요시마사 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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