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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조계지와 제물포구락부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9. 18. 03:56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제물포항이 개항되었다. 일본과 그 수호조약에 따라 제물포항, 즉 인천항이 개항된 것인데, 그 근거가 된 4조의 내용은 이러했다.
부산 외에 두 곳을 더 개방하고 일본인의 통상과 왕래를 허용한다.
조약문에 명문화되지는 않았으나 일본은 이때 부산 외에 두 항구로서 원산과 제물포를 강력히 희망했다. 앞서 '강화도 조약의 수수께끼(I)'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원산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함이요, 제물포는 수도 한양을 옥죄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에 따라 1880년 원산이 개항되었다.
하지만 인천은 1882년 말까지 개항되지 않고 있었다. 조선측이 개항하지 않는 이유는 인천항이 서울과 매우 가깝다는 이유였는데, 이것은 일본측이 인천을 개항장으로 요구하는 이유와 같았다. 조선에서는 같은 이유로써 인천 대신 남양(南陽)의 마산포(麻山浦)를 개항장으로 제시했고, 일본도 조선측의 완강함에 남양만을 선택하려 했으나 다시 생각을 바꿔 인천을 요구했다. 그리고 1883년 1월 1일 마침내 제물포항이 개항되었다.
이후 제물포항은 일본인의 독무대가 되었으니, 개항 이듬해인 1884년 9월 제물포에 상륙한 최초의 선교사 알렌은 "제물포에서는 일본인이 가장 우세해 좋은 요지를 차지하고 있다"고 일기에 적었다. 하지만 조선은 1882년 미국에 이어 영국, 독일, 청나라 등과도 수교 통상조약을 맺었던 바, 이들에게도 인천 체류와 제물포항을 통한 무역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1883~1884년 사이, 일본과 맺은 인천구 조계조약(仁川口租界條約)을 필두로 그들 외국인이 거류할 수 있는 조계지(租界地)에 관한 조약이 맺어졌다.
조계지는 조선 내의 외국인이 행정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할 수 있는 조차지를 말한다. 여기서 '조계'나 '조차'는 빌렸다는 뜻이지만 영구히 빌린 것이니 그 나라 땅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조계지는 크게 '청국 조계', '일본 조계', '각국 조계'로 삼분되었는데,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자리한 '각국 조계'가 약 14만 평으로 가장 컸다.(각국조계는 1914년까지 존속했다)
이로써 조계지의 상황이 복잡해지자 각국은 조계지 거주민들의 공동 이익을 위한 모임인 신동공사(紳董公司·Municipal Council)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는 조계지 거주민들의 사교를 목적으로 하는 클럽을 짓기로 합의하는데,(1891년) 그해 바로 제물포구락부(濟物浦俱樂部)라는 명칭의 건물이 세워진다.
구락부는 영어 '클럽'(club)의 일본식 발음을 한자로 만든 신조어로서, 개화기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던 용어를 그대로 들여와 붙였던 바, 제물포구락부의 운영을 일본에서 주도했음이 미루어 짐작된다. 이는 1892년 발행된 <인천사정>에 그 첫 회원이 서양인 6명, 중국인 4명, 일본인이 24명이라고 기록된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다 왕래하는 사람이 늘자 1900년부터 1901년까지 이어진 새로운 공사로써 2층 벽돌조 형태의 신식 회관 건물을 완공시킨다.
* 구락부라는 말은 한국에서도 70~80년대까지 쓰여 동네 축구클럽에도 구락부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었다. 일본에서도 俱樂部라는 한자는 거의 사어가 됐고, 쿠라부(クラブ)라는 발음이 남아 있기는 하나 룸살롱을 뜻하는 말로 전용되어 쓰인다. 다만 향수를 자극하는 말로 사용되는 듯하니, 고급음식점 간판에서도 보았고, 멋모르고 '이방인 구락부'라는 커피를 샀다가 (그 이름에 끌려) 믹스커피가 아닌 거름망을 사용하는 드립커피여서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제물포구락부의 새 건물은 일본식 합각 지붕과 맨사드 지붕을 올렸으며, 마감 재료는 양철과 벽돌을 사용했다. 이 건물의 설계와 시공을 담당한 사람은 훗날 경복궁 관문각, 독립문 등의 건물을 지은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사바틴으로, 건물의 내부에는 외관과 걸맞은 인테리어를 갖춘 음주가무를 위한 무도장, 당구대, 도서실 등이 있었고 실외에는 테니스 코트를 마련했다. 1901년 6월 22일 개관식 때 영국 공사 허버트 고페가 대표연설을 한 우호와 개화의 상징인 이 건물은 이후 외교관이나 사업가 등의 명망가들이 모이는 놀이터로, 그 본연의 목적에 충실히 쓰였다.
(그동안 간과되었지만) 주목할 것은 일본이 이 건물을 주도적으로 건립하고 관리한 이유다. 일본은 이곳을 통해 필시 열강의 군사정보를 비롯한 고급정보를 탐지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일본은 개항 때부터 조선의 병탄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까닭에 병탄을 이룬 1910년 이후로는 이 건물이 당연히 필요 없게 되었던 바, 일시 폐쇄시켰다가 1914년 이후 정방각(精芳閣)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재향군인연합회의 사무실이 되었고, 1934년부터는 일본 부인회의 사교장으로 쓰였다.
이 건물은 광복 직후에는 미군장교 클럽과 인천 재향군인회, 1947년부터는 대한부인회 인천지회 건물로 쓰였는데, 어쩌면 그것마저 왜정시대의 것을 흉내 냈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이후로는 인천 시의회, 인천 교육청, 시립박물관 등으로 이용되었다. 2007년 6월 리모델링한 이후에는 스토리텔링 박물관이라는 괴상한 명칭으로 불리다 지금은 인문강좌와 강연, 음악 감상회 등이 개최되는 문화·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역시 어정쩡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같은 근대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자체가 고맙다.
위치: 인천직할시 중구 송학동 1번지
이 문은 인천을 상징할 만한 대표적인 축조물의 하나로, 인천 항구의 한국인 경계지역이며, 일본인들의 지계(地界)를 확장하기 위해 1905년에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한 인천 유일의 동혈승지로써, 남북을 전망하고 여름철에는 시원한 휴식처로서 많이 이용되었던 곳이다. 명칭도 홍여문, 홍예문, 무지개문 등 다양하게 불려지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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