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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일전쟁이 남긴 것(III)ㅡ정동에 부는 아라사 바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11. 26. 22:57

     

    198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가장 큰 전리품은 뭐니 뭐니 해도 요동반도를 할양받은 일이었다. 이제 일제는 요동반도를 전초기지로써 한반도와 만주와 중국을 압박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래전 대륙경영을 꿈꿨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이 300년 만에 현실이 될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본 대본영 인사들은 어젯밤 축하만찬의 술기운이 깨기도 전 청천벽력과 같은 보고를 들어야 했다. 일본군 제1군이 진주한 여순(뤼순)항 앞바다에 프랑스와 독일 함선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 대사가 동경의 외무성을 방문하여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되돌려주라는 요구를 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이 취하게 된 요동반도는 청나라 수도 북경에 너무 근접한 관계로 중국에 대한 항구적 위협이 될 수 있으며 조선이 완결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한 조약문 제1조를 유명무실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즉 여순 앞바다에 몰려든 프랑스와 독일 함선은 러시아의 사주에 의해 출항한 천진과 산동반도 교주만에 주둔하던 아시아 함대의 군함들로서, 철병하지 않으면 포격하겠다는 위협에 다름 아니었다. (이른바 삼국간섭) 

     

    이것이 모두 시모노세키 조약 후 일주일 안에 일어난 사건이었으니 일본으로서는 승리의 단꿈 속에서도 빼앗은 물건을 도로 빼앗기는 악몽을 맛보아야 했는데, 이 삼국간섭의 주역이 러시아라는 데는 더욱 분통이 터졌다. 그 러시아인즉 과거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영불연합군에 패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무렵, 종전(終戰)회담(북경조약)을 알선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써 거대한 연해주 땅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꿀꺽한 전력이 있는 나라였다. 그 러시아가 이번에는 요동반도를 노리고 1만2000명(청일전쟁시 일본측 사망자) 피의 대가로 얻은 요동반도를 무상취득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중국으로부터 획득한 외(外)만주 영토 / STB 상생방송 캡처
    청일전쟁 전황도와 요동반도의 위치

     

    하지만 일본이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재간은 없었다. 지금 일본의 국력으로 위의 세 나라와 맞서 싸운다는 건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었던 바, 눈물을 머금고 전리품을 되돌려주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러시아는 곧바로 요동반도의 여순과 대련을 조차해 육군과 해군을 주둔시켰고, 동청철도(시베리아 횡단철도 중 치바에서 만주를 경유해 우수리스크까지 이어지는 노선)에 이어 남만주철도(동청철도의 하얼빈에서 대련까지 연결되는 노선)의 건설을 획책하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1850년부터 공사를 시작한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1895년 현재 만주의 목전인 치바 근방까지 와 있는 상태로서,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것도 바로 이 철도 때문이었다. 그해 1904년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완공이 예정된 해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만주와 연해주로 러시아 군대와 보급품이 밀려들게 될 터, 일본으로서는 이판사판의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이었다.

     

     

    동청철도와 남만주철도의 노선

     

    잠시 다른 얘기를 하자면, 지난 11월 16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의 가담자 중의 한 명인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 당시 주한 일본 영사관보·補)가 사건 직후 일본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가 나고야의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을미사변 그다음 날에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에는 "우리가 왕비를 죽였으며 의외로 쉬어서 놀랐다"는 나름대로의 감상과 함께 구체적인 시해 과정이 담겨 있었다.

     

     

    호리구치 구마이치의 편지

     

    한 일본계 미국인이 취득한 이 편지를 감정하여 세상에 알린 사람은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이라는 책을 쓴 재일교포 2세 김문자 교수였다. 앞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 - 그날의 진실'에서 말한 바 있거니와 김문자 교수는 그 책에서 명성황후의 시해의 주범으로 특히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육군 대장을 주목했다. 가와카미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낙승할 수 있었던 요인을 자국 첩보전의 결과라고 보았는데, 김문자 교수는 그와 같은 생각이 곧 명성황후 시해를 획책한 이유가 되었다고 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일본군은 개전 이틀 전 경복궁에 침입해 조선정보총국을 장악했고, 이후 조선 주둔 청국군에게 전달되는 청국 사령부의 지령을 사전 탐지해 대처했던 바,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향후 벌어지게 될 러일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도 의주~부산 간 설치된 전신망(電信網) 확보가 필요하다 여겼던 것인데, 삼국간섭 이후 친러정책으로 급선회한 명성황후가 전신망 사용권을 승인할 리 없을 터, 왕비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벌인 것이었다. (☞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김문자 저, 김승일 역, 2011년 태학사)

     

     

    가와카미 소로쿠

     

    그와 함께 주범으로 거론되는 또 한 명이 야마가다 아리토모(山縣有朋) 육군대신이다. 야마가다는 육군대장으로 청일전쟁 당시 조선 주둔 제1군을 이끌던 사령관이었는데, 을미사변은 그가 육군 중장 출신의 직속부하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을미사변 당시의 일본공사)에게 왕비 살해의 밀명을 내림으로써 시작된다. 이에 미우라가 1895년 9월 1일 이노우에 가오루를 대신해 신임 일본 공사로 조선에 건너와 명성황후의 살해계획을 입안하고 실행한 것이 곧 을미사변이다. 즉 야마가다는 가와카미 소로쿠 및 이토 히로부미와 공모해 을미사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야마가다는 러시아와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으니 강대국 러시아와의 싸움은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대신 그는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와 만나 조선 나눠먹기를 시도했다. 즉 대동강을 잇는 선을 경계로 북쪽의 땅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이 각각 차지해 자국의 영토로 삼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는 소원인 동방에서의 부동항을 다수 확보할 수 있게 되는 바 손해 볼 것이 없지 않냐는 야마가다의 흥정이었다. 물론 그 속내는, 일단은 그렇게 조치한 후 나중에 힘이 생기면 조선과 만주는 물론 시베리아까지 차지하겠다는 것일 터였다.*

     

    * 실제로 일본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 7만의 병력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해 바이칼 호 부근까지 쳐들어갔으나 미국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회군했다. 

     

     

    야마가다 아리토모

     

    그러나 이 제안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 의해 거부되었다. 러시아가 표명한 거절 사유는 자신들은 대국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보존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 사람이 들었으면 무척이나 고맙고 감격스러웠을 말이겠지만 이것은 그저 겉으로의 구실일 뿐, 니콜라이 2세의 속내는 '이제 가만 나눠도 러시아 땅이 될 한반도이거늘 일본과 나눠가질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당시 고종은 아관이라 불리던 러시아공사관에 있었다) 결국 야마가다는 기타 부분에 있어서의 상호협력을 약속한 '로바노프-야마가다 의정서'에 만족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 /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유폐되었던 니콜라이 2세는 볼세비키에 의해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된다. 황제 오른쪽에 서 있는 소녀가 디즈니 에니메이션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아나스타샤 로마노바 공주다.
    비운의 공주 아나스타샤 /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생존설까지 나돌았지만 2007년에 유해가 발굴되었다. 그녀 역시 가족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의견들이 교환된 때와 장소는 1896년의 페테스부르크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조선에서 온 민영환도 있었다. 앞서  '조선의 마지막 충신 충정공 민영환과 러일전쟁 뒷얘기'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새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자 '아라사 황제폐하 즉위 축하사절단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돼 1896년 5월 25일에 거행되는 대관식의 참석을 위해 출국했다. 그해 4월 1일 제물포 항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 요코하마를 거쳐 태평양을 건넌 사절단은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해 뉴욕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다시 대서양을 건너 런던, 베를린, 바르샤바 등을 경유해 5월 20일 목적지에 당도했다. 

     

     

    민영환이 방문한 페테스부르크 겨울 궁전
    민영환이 보았을 페테스부르크의 거리 풍경

     

    사절단은 이렇듯 50일간 지구의 2/3 바퀴를 도는 힘든 여정을 거쳐 힘들게 참석했음에도 황제를 비롯한 러시아 인사들에게 별 다른 대접을 받지 못했다. 반면 청나라 사절단의 대표로 간 청일전쟁의 패전지장(敗戰之將) 이홍장은 환대를 받았던 바, 동청철도부설에 관한 세부사항이 논의되었고, 중국과 한반도에서의 대일(對日) 공동대응과 상호원조에 관한 15년 기한의 러청비밀 군사동맹을 체결했다.(1896. 6. 3)

     

    그 가운데는 재차 전쟁이 일어날 경우 중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과, 일본에 지불할 전쟁배상금을 프랑스와 공동 차관으로 제공하겠다는 약속도 있었다. 즉 청나라와는 만주 지역에서의 철도 가설과 군사 협력 등 흥정거리가 존재했으나 조선은 러시아에 있어 신세만 지려는 조금은 귀찮은 나라였던 것이다.

     

    외교의 묘미는 그와 같은 불비한 조건 속에서 소기의 성과를 득(得)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영환이 얻어낸 것은 없었다. 민영환은 고종이 요구한 러시아 차관문제를 비롯해 러시아 군사고문관 · 교관 초빙 및 친위대 조직문제, 한러전신망 연결문제에 논의했으나 재상 비테로부터 검토해보겠다는 답변만을 들었을 뿐, 확답을 얻어내지 못했다. 이는 민영환의 외교 역량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소국(小國)이라는 당시의 처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예로 보면 될 터인데, 무엇보다 쓸만한 카드를 모두 써버린 조선으로서는 더 이상의 히든 카드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조선에는 정동구락부라고 불리는 주한 외국인과 국내 정치인의 사교모임이 있었다. 주요 멤버로는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서재필, 이완용 등의 국내 인사 및 미국공사 실, 프랑스 영사 플랑시, 미국 군사고문 다이,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이 있는데, 국적으로 보아 알 수 있듯 모임의 구심점과 지향점은 미국이었다.(이때는 이완용과 그의 형 이운용이 친미파이던 시절이다) 강대국 미국이 조선을 지원해주고 보호해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으니, 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긴 것이 바로 춘생문(春生門) 사건이다.

     

    춘생문 사건은 조선의 친미 · 친러파들이 고종을 경복궁에서 빼내 미국공사관으로 이거시킴으로써 일본의 간섭을 파(破)하고 김홍집 친일내각을 실각시키려던 사건이었다. 이에 1895년 11월 28일, 정동구락부의 지령을 받은 시위대(侍衛隊)의 무리가 경복궁 뒷담에 위치한 춘생문으로 잠입해 고종을 빼내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변절자가 발생, 춘생문으로 숙위군과 일본 경비대가 몰려드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는데,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그와 같은 시도가 전혀 달갑지 않다는 것이었다. 

     

     

    서소문 중앙일보 사옥 근방의 시위대 병영 터 푯돌/ 1895년 5월 신설된 시위대는 이후 대한제국의 핵심부대로서 황실 경비와 수도방어를 담당하였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군대해산령에 의해 와해되었다.
    춘생문과 연결되던 경복궁 건청궁 뒷담
    춘생문은 이처럼 크고 작은 문이 붙은 협문이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 사진은 창경궁 월근문
    춘생문으로 여겨지는 문 / 월간중앙 수록 사진으로 1930년대에 찍은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일본의 압력과 간섭을 벗어나려는 고종과 정동구락부 멤버들의 노력은 결국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이루어진다. 아관은 아라사(俄羅斯) 공사관, 즉 정동의 러시아공사관을 이르는 말로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세자는 궁녀의 복장으로 변복(變服)을 하고 여성용 가마를 이용해 극적으로 경복궁을 탈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한다. 그리고 곧바로 내각대신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니 당일로 친일내각의 영수(領首)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친러 군인들과 상인들에 의해 맞아죽었으며 귀향길에 오른 군부대신 서리 어윤중은 용인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

     

     

    당시의 정동 러시아공사관
    벅적지근한 러시아공사관 주변 광경이 당시 러시아의 위세를 대변한다.
    1885년 건립된 러시아공사관은 한국전쟁 때 포격으로 소실되고 전망탑만 남았다. 1903년 고종으로부터 대지를 하사받아 지어진 러시아정교회의 니콜라스 성당도 이 근방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같은 시기(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

     

    고종이 아관에 머물던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 9일간의 기간이 고종과 친러파에게는 봄날이었을 것이니, 이때 명성황후의 시녀였다 후궁이 된 엄귀인은 영왕(英王) 이근을 회임한다. 민영환이 러시아에 갔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니 고종을 보살펴주는 러시아에 대한 감사의 표시 외에 여러가지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으니, 러시아로서는 잡은 고기에 더 이상 먹이를 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고, 일제에 시달리는 조선의 고충 또한 헤아리려 하지 않았다. 조선으로서는 마지막 카드, 말하자면 쇼당 카드를 아관파천으로 이미 써먹었던 바, 아무런 카드도 내밀 것이 없었다. 

     

    앞서 2편에서 말한 것처럼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한 고종은 칭제건원(稱帝建元)하여 대한제국의 황제에 오른다. 하지만 곧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며 황제의 꿈은 일장춘몽으로 끝을 맺고 대한제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다. 그 조선 500년의 마지막 불꽃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피웠는데, 당시 하바로브스크에서 발행되던 <프리 아무리예>는 안 의사가 일본 영사관으로 압송돼 조사받으며 한 발언이 실렸다. 그 기사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차이자고우(하얼빈)역의 꼬레아 파르티잔(빨치산)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의 이성과 심장은 조국에서 일제에 의해 병을 얻었다. 죽게 되어 (오히려) 나는 기쁘다. 나는 조국 해방을 위해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 아울러 이 신문은 "이토의 죽음을 조선인들은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몇 번이나 진짜로 이토가 암살됐는지를 물었고, 그 사실이 확인되자 참을 수 없는 흥분 상태에 빠졌다"고 전했다. 

     

    안 의사의 마지막 말은 한국과 중국 사람들에게 정말로 울림이 있었는지 중국의 주은래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중일갑오전쟁(청일전쟁) 후 중조(중국과 조선) 인민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은 20세기 초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영웅 안중근의 잘 알려지지 않은 발언들
    여순 감옥에 걸린 저우언라이의 말
    안 의사가 순국한 여순감옥 / 삼국간섭 후 여순항을 조차한 러시아 군이 1902년 세운 것으로, 러시아는 85칸의 이 건물을 병원과 병영으로 이용했으나 러일전쟁 후 일본이 200여 칸을 증축, 감방 275개, 2천여 명을 수감할 수 있는 감옥으로 전용했다.
    여순감옥은 지금 박물관 겸 대련시 근대사연구소가 되었다.
    여순감옥의 내부 / 조선미디어 사진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개최됐던 덕수궁 석조전 / 또 한번 한반도 문제에 간섭한 러시아(소련)는 한반도의 단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1946년 3월 20일부터 1947년 10월 21일까지 미국과 자리를 마주했으나 끝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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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